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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는가

OneTiger 2017. 10. 22. 20:00

[게임 <에이븐 콜로니>의 한 장면. 이렇게 멋진 외계 식생과 개척 도시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닐까요?]

 

 

예전에 alt.SF는 어느 SF 그림책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어떻게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죠. alt.SF는 영화나 게임을 멀리 하고 소설들에 주력하는 웹진이었습니다.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과학 소설'이라는 명칭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과학 소설. 고장원님 같은 일부 SF 고수들이나 SF 독자들이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과학 영화나 과학 게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소설만 사이언스 픽션에 특화한 것처럼 이야기하죠.

 

개인적으로 과학 소설이라는 명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나, 일단 그 점을 넘어가겠습니다. 그보다 더 말하고 싶은 점은 이겁니다. 정말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는가? 테이블 게임이든 비디오 게임이든, 게임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나? 테이블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동시에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물음은 가혹할지 모릅니다. 다양한 테이블 게임들과 비디오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합니다. 어떤 게임들은 SF 소설들을 이용하고, 어떤 게임들은 SF 소설들에게서 발상을 빌립니다.

 

 

가령, 저는 <쉐도우런>이 윌리엄 깁슨에게서 발상을 빌렸다고 들었습니다. <아컴 호러>는 이름 그대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쓴 소설들을 테이블 게임으로 옮겼죠. <워해머 40K> 역시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을 총망라한 미니어처 게임입니다. <황혼의 제국>은 스페이스 오페라 문명을 통치할 수 있는 게임이고, <배틀테크> 같은 게임들은 보행 기갑 병기들을 주로 다루죠. <사이쓰> 같은 게임은 멋진 스팀펑크를 보여주고요. 비디오 게임들도 화려한 명단을 자랑합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비디오 게임들 중에서 우주 4X 장르를 본격적으로 선보였죠. <듄 2>는 실시간 전략 게임을 퍼뜨리기 시작했고요. <홈월드>나 <워존 2100>은 어떻게 실시간 전략 게임이 3D 그래픽을 활용할 수 있는지 강조했습니다. <스페이스 콜로니>나 <아노 2070>은 플레이어가 근사한 미래 도시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고요.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은 풍성한 내용을 자랑하는 한편 아찔한 우주 광경을 보여줍니다.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의 스크릿샷만 봐도 두 눈이 돌아갈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굉장한 게임들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한다고?"

 

 

과연 사이언스 픽션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평론가들과 작가들과 팬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정의했습니다. 그것들을 여기에서 모두 설명하지 못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어슐라 르 귄이 말한 "모든 소설은 은유다. SF 소설은 과학을 이용한 은유다."가 마음에 듭니다. 아마 이게 <어둠의 왼손> 서두에 실렸을 겁니다. 하지만 르 귄 역시 소설을 강조했습니다. 노먼 스핀래드는 "SF 작가가 썼다면 모두 사이언스 픽션이다."라고 말했죠. 참으로 당돌한 정의이나, 스핀래드 역시 소설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alt.SF는 사이언스 픽션을 뭐라고 정의할까요. alt.SF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기사들은 몇몇 있으나, 대부분 소설만 이야기합니다. alt.SF는 소설이라는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하고, 처음부터 게임 따위가 끼어들 여지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흠, 왜 여러 사람들은 게임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고, 소설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이야기할까요. 누구라도 <마스터 오브 오리온> 같은 게임을 본다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 정의는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오직 소설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장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황혼의 제국>과 <아컴 호러>와 <드라운드 어스>와 <마스터 오브 오리온>과 <배틀 포 듄>과 <아노 2070>과 <스텔라리스>와 기타 등등의 게임들도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거죠. SF 게임은 농도가 옅습니다. 플레이어가 어떤 SF 게임을 고를 때, 왜 그 플레이어는 SF 게임을 골랐을까요. 한때 <스타크래프트>는 우리나라에서 국민 게임이었습니다. 과연 수많은 한국 사람들은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설정들과 발상들에 열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전략과 용병술에 열광했을 뿐입니다.

 

만약 어떤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와 비슷한 완성도를 자랑했다면, 그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판타지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스타크래프트 2>는 1편만큼 국민 게임이 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실시간 전략 게임이 인기를 끌지 못하기 때문이죠. 즉, 사람들은 SF '게임'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SF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사실 게임 중계와 관련된 시청자들이나 플레이어들이나 중계자들이나 사이언스 픽션 따위에는 개미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다들 정신적 초능력을 마나라고 불렀죠. 유령 요원이 마나를 이용하다니, 하하.

 

 

게임 플레이어는 <아노 2070>이나 <스텔라리스>로 과학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학적 상상력을 정말 깊게 논하고 싶다면, SF 소설을 읽는 편이 낫습니다. <골드 코스트>나 <히페리온의 몰락>을 읽는 편이 낫겠죠. 게임들은 전술이나 조작에 치중하기 때문에 정작 과학적 상상력에 깊이 주목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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