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오묘한 조합 본문
인간은 꽤나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과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들을 분류할 때, 유전자 개념을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두 눈만으로 동물들을 분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아리스토텔레스는 난관에 부딪혔어요. 서로 비슷하게 생긴 동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와 돌고래를 분류하기 위해 꽤나 고심했습니다. 허먼 멜빌이 '고래는 분수공으로 숨을 쉬는 물고기'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돌고래와 물고기가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쪽 모두 바다에 살고, 지느러미들이 있고, 몸매가 유선형이죠.
그래서 다들 돌고래와 물고기가 똑같은 종류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에게 아가미가 있고 돌고래에게 분수공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은 돌고래를 물고기에 넣지 않고, 따로 분류했어요. 꽤나 날카롭고 명석한 관찰이죠. 허먼 멜빌이 말한 것처럼 19세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자연 철학자들마저 돌고래와 물고기를 구분하지 않았죠. 게다가 이런 문제들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옵니다. 어떻게 박쥐와 새를 구분해야 할까요. 박쥐는 새일까요, 아니면 네발 동물일까요.
오스니얼 마쉬는 꽤나 유명한 고생물학자입니다. 특히, 스테고사우루스를 분류한 학자로서 유명하죠. 문제는 이 양반이 처음에 스테고사우루스를 엉터리로 복원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홀로세 현재에 스테고사우루스처럼 생긴 동물은 없습니다. 등에 거대한 장식물들을 달고 다니는 네발 동물은 없어요. 따라서 거대한 골판들을 처음 봤을 때, 마쉬는 머릿속이 아찔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아니, 도대체 이렇게 생긴 동물을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요. 아마 마쉬는 현생 동물 중에서 누가 골판들을 매달고 다니는지 궁리했을 겁니다. 그리고 거북을 떠올렸겠죠.
그래서 마쉬는 스테고사우루스를 거북처럼 복원합니다. 이 양반은 스테고사우루스가 등에 거북처럼 골판들을 짊어지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이후, 상당히 온전한 화석이 등장했고, 마쉬는 그 화석을 근거로 이용해 좀 더 올바른 모양을 복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쉬가 실수했다고 놀리면 안 되겠죠. 오직 두 눈만으로 선사 시대 동물을 분류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사실 21세기 고생물학자들 역시 어떻게 공룡을 복원하면 좋을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두 눈으로만 판단하면, 틀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죠.
이런 분류 방법들을 볼 때마다 저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음,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나,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는 오묘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물고기와 돌고래처럼, 거북과 스테고사우루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돌고래와 물고기를 과감하게 분류하고, 마쉬가 거북과 스테고사우루스를 혼동한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검마 판타지는 이상한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굉장히 무시합니다. 아니면 무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반적인 사이언스 픽션과 매우 다른 장르라고 여깁니다.
특히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무시하곤 하죠. 이른바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가 등장한 이후, 그런 무시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솔직히 <사소한 정의> 같은 소설은 (무시를 당하기는 고사하고) 훌륭한 SF 소설로 통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워낙 스페이스 오페라가 악명을 떨쳤고 게다가 여전히 수많은 소설들과 영화들과 게임들이 아무 생각 없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양산하기 때문에 이 장르는 여전히 비판을 받습니다. 무엇보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과학적 상상력보다 우주 활극을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스페이스 판타지라고 부릅니다. 아니면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부릅니다. 스페이스 판타지나 사이언스 판타지는 스페이스 오페라만큼 자주 쓰이는 용어이고, 종종 스페이스 오페라와 별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즉,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서로 만나고, 사이언스 판타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를 이야기하면, 검마 판타지를 간과하지 못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혹은 사이언스 판타지가 분명히 검마 판타지의 속성들을 어느 정도 품었기 때문입니다.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소설들을 읽으면, 이게 사이언스 픽션인지 검마 판타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저런 소설들을 사이언스 픽션을 빙자한 판타지로 간주하고, 사실 그런 평가는 아주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반적인 검마 판타지와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나 프랭크 허버트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겉보기에' 사이언스 판타지는 우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겉보기에' 사이언스 판타지는 우주를 향한 동경을 품었습니다. 비록 '겉보기일 뿐'이지만, 돌고래와 물고기가 다르고 거북과 스테고사우루스가 다른 만큼, 사이언스 판타지는 일반적인 검마 판타지와 달라요. 그래서 두 가지의 속성이 비슷하다고 해도 사이언스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는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