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약소국들의 SF 소설들 본문
듀나, 김보영, 배명훈, 이재창, 김창규, 장강명….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SF 작가들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SF 독자들은 저 사람들이 쓴 소설들을 한 번쯤 읽었겠죠.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저런 SF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겁니다. 가끔 표도기님이나 고장원님 같은 분들이 일본이나 중국에 한국 SF 소설들을 소개하시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입니다. 당연히 북한 사람들도 우리나라 SF 작가들을 잘 모를 겁니다. 우리 역시 북한 사람들이 SF 소설을 쓰거나 읽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여러 SF 동호회를 돌아다녔으나, 그 중에 (박상준님이나 홍인기님 같은 고수들마저) 북한 SF 소설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전혀 없는 듯하군요. 아마 제 경험과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중국과 (북한과)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지만, 중국과 일본은 한국에 무슨 SF 작가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죠. 음, 우리는 일본 SF 소설들을 나름대로 많이 읽으나, 중국 SF 소설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지 모르겠습니다. <삼체> 덕분에 중국 SF 소설들도 인지도를 얻었으나, 아직 갈 길은 멀죠.
게다가 유럽이나 북미는 한국 SF 소설들을 전혀 모를 겁니다. 유럽이나 북미는 일본 SF 소설들에 익숙할 테고, (<삼체> 덕분에) 중국 SF 소설들도 어느 정도 알 테지만, 한국 SF 작가들을 전혀 모르겠죠. 유럽이나 북미가 반드시 한국 SF 작가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여러 나라들에 있는 SF 작가들이 서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가끔 한국 SF 소설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듀나, 김보영, 배명훈, 이재창, 김창규, 장강명 등이 있는 것처럼 다른 나라에도 SF 작가들이 있을 겁니다.
저기 동남 아시아의 어디엔가, 중동의 어디엔가, 아프리카의 어디엔가, 남아메리카의 어디엔가 좋은 SF 작가들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유럽이나 북미, 일본과 전혀 다른 SF 소설들을 쓸지 모릅니다. 그 나라의 독자들은 자신들만의 문제를 논의할 테고, 그런 논의는 유럽이나 북미, 일본 독자들과 다르겠죠. 하지만 저는 아프리카 작가들이 어떤 SF 소설들을 쓰는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독자들이 어떤 SF 소설들을 읽는지 몰라요. 아마 제가 인생을 다 사는 그 날까지 아프리카 SF 소설들을 읽지 못하겠죠.
솔직히 동남 아시아나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SF 소설들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적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작가의 명성마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SF 소설을 고를 때, 저는 소재나 설정을 우선 고려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SF 작가가 썼다고 해도 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읽지 않습니다. 아무리 3류 작가가 썼다고 해도 설정이 마음에 든다면 선뜻 읽습니다. (그래서 종종 <프래그먼트> 같은 것을 읽습니다. 아, 허무하고 아까운 시간과 비용이여….)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가 지금까지 읽은 SF 소설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 러시아, 일본, 한국 SF 소설들입니다. 특히, 미국 SF 소설들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마 미국 SF 소설들을 제외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얄팍한) 독서 경험들이 팍팍 줄어들 겁니다. 그래서 좀 더 다채로운 SF 소설들을 읽고 싶다고 가끔 생각합니다. 저런 다채로운 SF 소설들을 읽는다고 해도 그게 정말 다채로운 경험으로 이어질지 확신하지 못하나, 다른 나라들의 작가들이 뭐라고 썼는지 읽고 싶어요.
뭐, 비단 SF 소설들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배웁니다. 가령, 철학 같은 학문도 유럽이나 북미를 열심히 따라가죠. 동양 철학이 존재하나, 고대 지식인들이 동양 철학을 채웁니다. 우리는 수많은 19세기 유럽 철학자들을 압니다. 하지만 19세기 동양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낯설 겁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아쉬운 부분이죠. 그야말로 많은 것들이 서구화가 되었다고 할까요.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아쉬운 점은 우리가 너무 유럽이나 북미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때 중동이 유럽보다 훨씬 찬란한 문화와 과학을 자랑하는 시기가 있었죠. 만약 그런 현상이 계속 이어졌다면, 우리는 유럽보다 중동 문명에 더 익숙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동남 아시아와 중동과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만큼 성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훨씬 많이 받아들이겠죠. 그들의 SF 소설 역시 많이 받아들일 테고요. 결국 더 많은 나라들이 더 평등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