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장르 속의 상대적인 도덕, 관습, 문화 본문
"사람과 매우 유사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태양계 외부 행성이 발견되었다. 천문학자들은 이 별에 '쎅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쎅스' 별의 사람들은 무릇 성인 남녀가 오직 은밀한 공간에서만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자나 미성년자들끼리 밥을 먹는 것, 여러 사람이 밥을 먹거나 동성끼리 밥을 먹는 것은 매우 변태적인 짓이라고 간주되어 심한 박해와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위 내용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아니, 어떤 관점에서 위 내용은 소프트 SF 소설인지 모릅니다. 숱한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늘어놓고 어떻게 외계인이 인간과 다른지 황당하게 조명하죠. 외계인은 다른 우주, 다른 항성계, 다른 행성이나 위성, 다른 사회에 속했습니다. 따라서 외계인은 이방인이고, 외계인은 인간과 다릅니다. 외계인은 인간과 '아주 많이' 다르죠. 이걸 강조하기 위해 SF 작가들은 온갖 황당무계한 문화들과 관습들을 들이댑니다. 가령, 우리는 종교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신을 믿습니다. 그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외계인들은 신을 믿지 않을지 모릅니다. 외계인들은 그런 관념을 비웃을지 모르죠. 외계 행성에서 선교사가 돌아다닌다면, 선교사는 광대가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여자와 남자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하지만 외계인들에게는 성별이 없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성별들은 훨씬 많을지 모릅니다. 외계인은 성별을 바꿀 수 있을지 몰라요. 인간에게 모욕적인 행위는 외계인에게 명예로운 행위일지 모릅니다. 어떤 문화권에서 침을 뱉는 행위는 모욕적이나, 어떤 문화권에서 그건 인사에 해당합니다. 외계인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침을 뱉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외계인은 이방인이 됩니다.
소설 <듄>에는 외계인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행성들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있습니다. <듄>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프레멘 역시 명예롭게 침을 뱉을 수 있죠. 프레멘은 아라키스 행성 원주민들입니다.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고, 물은 꽤나 희귀합니다. 그래서 프레멘이 침(수분)을 뱉을 때, 그건 명예를 기리는 행위가 됩니다. 코맥 매카시가 쓴 소설 <국경> 3부작에서 카우보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침을 찍찍 뱉으나, 아라키스 행성에서 그건 명예로운 행위가 됩니다. 아라키스에서 프레멘이 스스로 희귀한 수분(침)을 몸 밖으로 버리거나 눈물(수분)을 흘릴 때, 그건 정말 고귀하고 아름다운 행위가 됩니다. 우리는 눈물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나, 아라키스에서 그건 훨씬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소설 <국경> 3부작 속에서 침을 찍찍 뱉는 카우보이들은 프레멘들이 정말 이방인들이라고 간주하겠죠. 이렇게 구태여 외계인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이방인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계인들이 다른 우주, 다른 항성계, 다른 행성이나 위성, 다른 사회에 속했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이방인들을 훨씬 잘 상징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프레멘들은 인간입니다.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죠. 하지만 외계인들은 다릅니다. 외계인들은 인간과 아주 많이 다르게 생겼을 겁니다. 어쩌면 문화 차이보다 외모 차이는 훨씬 이질적일지 모릅니다. 소설 <노인의 전쟁>은 외모 차이가 문화 차이보다 훨씬 커다란 충격이라고 말하죠.
왜 사이언스 픽션이 이방인을 강조할까요? 사이언스 픽션은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습니다. 19세기 유럽은 세계화를 추진하는 중이었습니다. 서글프게도 그 세계화는 학살들과 수탈들로 얼룩졌습니다. 유럽 침략자들은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 무엇보다 아메리카 대륙을 들쑤셨습니다. 그런 수탈들 덕분에 유럽 문명은 막대한 부를 쌓았죠. 그런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사이언스 픽션 작가들은 이런 상황을 바라봤을 겁니다. 그들은 문명이 다른 문명을 침략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세계화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유럽 SF 작가들에게 낯선 땅의 낯선 이방인은 낯선 소재가 아니었죠.
게다가 본격적인 SF 소설들이 태어나기 전에, 사회 구조를 비판하기 위해 계몽주의 작가들은 외계인을 도입했습니다. 만약 작가들이 선량한 외계인 사회를 보여준다면, 작가들은 기준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선량한 외계인 사회는 구체적인 기준이 됩니다. 작가들은 그런 기준을 이용해 인류 사회를 비판할 수 있어요. 인류 사회는 선량한 외계인 사회를 바라보고 변화를 추구할 수 있죠. 그래서 본격적인 SF 소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외계인은 인기 좋은 소재였습니다. 20세기 이후, 여러 사상들과 문화적인 상대성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외계인은 훨씬 많은 인기들을 끕니다. 이제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다양한 외계인 종족들은 빠지지 못할 소재가 되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종종 중세 판타지 소설들 역시 상대성과 이방인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온갖 드워프들, 하플링들, 엘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유사하나,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드워프와 하플링과 엘프와 어울릴 때, 인간은 상대성을 느낍니다. 인간과 엘프는 반목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모욕적인 행위는 드워프에게 명예로운 행위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인간과 하플링이 친하다고 해도, 몇몇 부분에서 인간과 하플링은 아주 다를지 모릅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엘프 이루릴 세레니얼은 인간 후치와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이루릴을 <로도스도 전기>에 나오는 디드리트와 비교한다면, 독자들은 이루릴이 훨씬 이질적이라고 느낄 겁니다. 이루릴은 디드리트 같은 엘프와 다르죠. 디드리트는 그저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에 불과하나, 이루릴에게는 상대성이 있습니다. 이루릴은 비단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죠. 종종 그건 백치미에 가깝습니다. 독자가 디드리트보다 이루릴이 훨씬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독자는 그런 백치미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중세 판타지 역시 외계인을 이야기하는 계몽주의 작가를 계승했을지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 역시 여러 사상들과 문화적인 상대성을 받아들였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세 유럽 판타지 속의 상대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장르 이름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는 '중세 유럽'에 기반해야 합니다. 아무리 판타지 속의 중세 유럽이 진보적이라고 해도, 그건 진짜 진보가 아니겠죠. 진보는 혁명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19세기 근대적인 진보는 혁명의 물결들을 몰았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은 혁명의 시대였죠. 그런 혁명의 시대는 21세기 초반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혁명의 물결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 판타지는 혁명을 말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에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죠. 혁명은 사회를 전복합니다.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 중세 유럽은 계몽주의 유럽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때 중세 유럽 판타지는 더 이상 중세 유럽이 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계몽주의 판타지나 스팀펑크 판타지가 되어야 할 겁니다. 이건 장르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장르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중세 유럽 판타지 속의 상대성은 사회를 전복하지 않아요. 전복과 혁명을 피하기 위해 중세 유럽 판타지는 중세 속에 계몽주의를 어설프게 끼워넣습니다. 반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전복과 혁명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라는 장르 이름은 시대상(중세 유럽)에서 떨어지지 못하나, 스페이스 오페라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훨씬 다채로운 사회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따라가지 못하죠.
전복과 혁명은 엄청난 상대성을 부를지 모릅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후치 네드발은 이루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치 네드발에게 이루릴보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쓴 소설 <붉은 별>의 화성 외계인 네티는 훨씬 이질적일 겁니다. 적어도 이루릴은 왕권 사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후치와 이루릴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후치와 이루릴은 모두 왕권 사회를 인정합니다. 이루릴은 왜 바이서스 시민들이 투표하지 않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화성 외계인 네티는 공유 사회를 추구합니다. 중세 유럽 사람(과 계몽주의 유럽 사람이 뒤섞인) 후치에게 공유 사회는 괴악한 헛소리가 될지 모릅니다. 아니, 심지어 후치는 19세기 공화주의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드래곤 라자>부터 <붉은 별>까지, 인간상들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올바른 도덕, 정상적인 행동, 사회적인 관습, 문화적인 상대성.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틀린 것일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우리는 자본주의가 옳다고 간주하나, 그건 아주 틀릴지 모르죠. 계몽주의 작가들처럼,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 과학자들은 외계인을 빌릴 수 있습니다. 사실 쎅스 외계인 이야기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 류동민 교수가 쓴 경제학 서적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에 나옵니다. 외계인 이야기는 정말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