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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 도시 가루다들이 위계적인 이유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페르디도 기차역>, 도시 가루다들이 위계적인 이유

OneTiger 2019. 1. 18. 20:13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다양한 유사 인간 종족들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온갖 외계인들을 선보이는 것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들이 언제나 드워프들과 엘프들과 놈들과 하플링들과 기타 유사 인간 종족들을 선보이는 것처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유사 인간 종족들을 늘어놓습니다. 북적거리는 근대적인 산업 도시에서 인간들은 양서류 종족, 조류 종족, 절지류 종족, 식물 종족과 어울립니다. 숱한 유사 인간 종족들은 서로 다른 특징들을 자랑합니다.


수중 종족으로서 양서류 종족은 물의 정령과 친하고, 절지류 종족은 기이한 교미 습관을 보여줍니다. 딱딱한 선인장처럼 식물 종족은 가시들을 찌를 수 있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커다란 재미들 중에서 하나는 이런 다양한 종족들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겠죠. 사실 이런 재미(다양한 종족 설정)는 스팀펑크를 떠받치는 주된 요소가 아닐 겁니다. 스팀펑크는 미래를 과거에 투영합니다. 스팀펑크는 거대한 비행선, 보행 전차, 만능 잠수함, 인조인간, 개조 생명체 같은 미래적인 설정을 19세기 산업 사회에 투영합니다. 그렇게 투영하는 재미는 스팀펑크를 뒷받침해요.



구태여 19세기 유럽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압니다. 산업 혁명은 근대성을 만들었죠. 산업 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21세기 초반 첨단 과학 시대 역시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는 19세기 산업 혁명에서 비롯했어요. 산업 혁명이 무엇인지 자세히 모른다고 해도, 다들 그런 사실을 희미하게 느끼겠죠. 19세기 산업 혁명은 출발점입니다. 이건 근대성이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SF 작가들은 이런 근대성을 비틀고 뒤집고 과장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근대성이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와 이어지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첨단 과학을 19세기 근대성에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요.


SF 작가들은 19세기 근대성을 이용해 21세기 첨단 과학을 살필 수 있죠. 이건 '거꾸로 짚어나가는' 재미입니다. 기본적으로 스팀펑크 장르는 그런 재미를 보장합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설은 온갖 첨단 과학들과 마법들을 함께 보여주고 21세기 시각을 19세기에 투영하죠. 어떤 독자들은 19세기 시각과 21세기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19세기 시각은 여전히 21세기로 이어집니다. 21세기가 포스트 모던하다는 주장들과 달리, 아직 우리는 모더니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직 모더니티, 근대성을 완전히 넘어가거나 버리지 않았어요. 적어도 아직 근대성 안에서 사회 구조는 맴도는 중입니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쉽게 망상에 빠질 수 있어요.)



사회 구조가 근대성을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시각, 세계관, 관념, 사상 역시 근대성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21세기 사회 구조가 19세기 사회 구조에서 별로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여러 부분들에서 사회 구조는 많이 바뀐 것 같으나, 전반적인 골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19세기 임금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갈등했고 격렬하게 파업하고 싸워야 했습니다. 그건 19세기 산업 사회의 흔한 풍경이었죠. 여전히 그런 풍경은 21세기 초반 현대 사회를 장식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숱한 노동 조합들은 파업을 진행하는 중일 겁니다.


주류 언론 매체들이 그런 파업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 21세기 초반 현대 사회에서 파업은 아주 일상적인 풍경입니다. 그래서 19세기 산업 사회와 21세기 초반 현대 사회는 별로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SF 작가들이 21세기 시각을 19세기에 투영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어색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레 미제라블>이나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을 때, 21세기 도시 시민들은 그런 소설들에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이 아주 보편적인 감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탁은 여자 노동 조합 파업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반문할 겁니다. 사실 수구 보수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노동 조합 파업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동탁보다 21세기 보수적인 사람들은 훨씬 일상적으로 노동 조합 파업을 바라볼 겁니다. <레 미제라블>과 21세기 현대 사회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현대 도시 시민들은 팡틴을 일상적으로 바라보거나 팡틴에게 공감할 수 있어요. <레 미제라블>에서 비참하게 팡틴이 몰락할 때, 뮤지컬 극장에서 팡틴 배우가 "I dreamed a dream."이라고 서글프게 부르짖을 때, 21세기 도시 시민들은 그게 익숙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비정규 여자 노동자들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남한 사회 역시 다르지 않아요. 1970년대에 자본가들이 여공들, 이른바 공순이들을 착취하지 않았다면, 눈부신 경제 발전은 없었을 겁니다.


비좁고 불결한 공장 속에서 젊은 공순이들이 폐병에 걸리든 붉은 피를 토하든, 자본가들은 공순이들을 착취해야 했어요. 21세기 남한 사회는 그런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죽어나간 여자 노동자들을 기리지 않죠. 여전히 남한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산업 발전이 최고라고 떠받듭니다. 그래서 SF 작가가 19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할 때, 거기에는 별로 어색함이 없어요.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19세기와 21세기를 능수능란하게 연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유사 인간 종족들이 있고 이건 커다란 특징입니다. 이건 스팀펑크 장르의 공공연한 특징이 아니죠. 게임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나 <디스아너드>를 보세요. 여기에는 각종 유사 인간들이 없습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에 다른 특징들을 덧붙였고 가상의 산업 도시를 훨씬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유사 인간들 중에서 가루다 종족은 꽤나 특이합니다. 소설 주인공 아이작 그림너블린이 가루다 야가렉을 만났기 때문에 본격적인 사건은 커지기 시작합니다. 아이작이 야가렉과 만나지 않았다면, 사건은 커지지 않았을 겁니다. 사건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겠죠. 그래서 소설의 마무리 역시 가루다 종족이 담당합니다. 가루다 종족은 평등을 추구합니다. 어쩌면 유사 인간들 중에서 가루다는 가장 평등을 중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야가렉은 그런 평등과 별로 깊은 관계를 맺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야가렉은 사막 가루다 사회에 속했으나, 거기에서 쫓겨났고, 그래서 사막 가루다의 평등 사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요.


야가렉과 만난 이후, 가루다 종족을 좀 더 파악하기 위해 아이작은 도시 가루다들을 찾아갑니다. 사막 가루다를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작은 도시 가루다들을 찾아갔죠. 하지만 도시 가루다들 역시 별로 평등한 사회 구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 가루다들은 상당히 강압적이고 위계적입니다. 그들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충성을 요구하죠. 왜 사막 가루다들과 도시 가루다들이 다를까요? 왜 사막 가루다들과 달리, 도시 가루다들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할까요? 왜 그들이 가루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을까요?



어쩌면 도시가 그들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사막에서 가루다들은 마음껏 날아다니고 사냥하고 무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아무도 가루다들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다릅니다. 산업 도시는 인간들의 영역입니다. 인간들, 특히, 인간 정치인들과 인간 자본가들은 다른 종족들을 배척합니다. 인간 정치인들과 인간 자본가들은 가난하고 약한 다른 종족들을 배척합니다. 도시 가루다들 역시 가난하고 약합니다. 그들은 인간들이 드러내는 멸시와 차별을 피해야 했고 뒷골목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인간들이 계속 차별했고 괄시했기 때문에 도시 가루다들은 폭력적인 환경에 적응해야 했을 겁니다.


폭력에 맞서기 위해 도시 가루다들은 폭력을 배우고 폭력을 휘둘러야 했겠죠. 그래서 그들은 평등한 관계를 버렸을 겁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이런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도시 가루다들에게는 다른 사정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수많은 흑인들은 범죄자들입니다. 왜 흑인들이 범죄자들이 될까요? 원래 그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원래 깜둥이들이 미개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남한 사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노예 제도를 비롯해 각종 인종 차별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말콤 엑스는 아무 이유 없이 소총으로 무장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런 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죠. 심지어 흑인 노예를 부린 적이 없는 남한 사람들조차 흑인과 노예를 쉽게 연결합니다. 남한 사회가 미국 사회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그런 막대한 차별 속에서 흑인들은 범죄자들이 됩니다. 이건 흑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건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도시 가루다들 역시 비슷할 겁니다. 인간들이 멸시했고 차별했기 때문에 도시 가루다들은 폭력적으로 바뀌었겠죠. 강자들이 폭력적으로 약자들을 억누를 때, 약자들 역시 폭력을 휘두릅니다. 그런 폭력은 잘못이나, 진짜 근본적인 잘못은 약자들이 아니라 강자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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