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모로 박사의 섬>과 외로운 이방인 본문
제목처럼, 허버트 웰즈가 쓴 소설 <모로 박사의 섬>은 모로 박사의 섬을 보여줍니다. 여기는 무인도이고,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습니다. 가끔 화물선들은 여기에 보급품들과 생필품들을 배달하나, 선원들 역시 여기가 무슨 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여기는 미지의 섬입니다. 아무도 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도 여기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장르 소설에서 이런 미지의 섬은 두 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미지의 섬은 환상적인 유토피아가 되거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공포를 연출합니다. 그래서 여러 유토피아 소설들이나 추리 소설들은 섬을 이야기합니다.
섬은 유토피아를 품을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섬에서 연쇄 살인이 터진다면, 사람들은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고, 범인은 계속 희생자들을 늘릴 수 있겠죠. <모로 박사의 섬>은 후자입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는 밀실 살인이나 연쇄 살인마가 없으나,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 섬에서 모로 박사는 조수와 함께 동물 실험에 몰두합니다. 사실 그건 일반적인 동물 실험이 아니라 개조 동물 실험에 가깝습니다. 모로 박사와 조수는 야생 동물을 개조하고 그들을 '인간'으로 만듭니다. 섬에는 반인반수들이 많습니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섬에서 모로 박사는 그들과 함께 고유한 문명을 이룩합니다.
이런 문명이 '인류 문명'일까요? 어떤 독자는 반인반인수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그들이 또 다른 지적 생물종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설사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지적 생물종이기 때문에 인간과 그들이 대등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모로 박사는 반인반수들을 가르치고 이른바 문명인으로 만들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섬은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사방에 '인간'이 없고 오직 반인반수들만 우글거리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낍니다. 사실 소설 주인공은 계속 이방인이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모로 박사와 조수와 다른 반인반수들과 진정으로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누가 이런 섬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모로 박사가 수술하는 과정은 정말 끔찍합니다. <모로 박사의 섬>은 1896년 소설입니다. 20세기 바이오펑크 소설들과 달리, 여기에는 첨단 유전 공학이 없습니다. 모로 박사는 끔찍하게 살을 찢고 뼈를 깎고 수술을 감행합니다. 이런 수술은 완전하지 않았고, 반인반수들은 완전히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외톨이라고 느낍니다. 어쩌면 <모로 박사의 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런 감성일지 모릅니다. 이방인. 외톨이. 인간은 오직 소설 주인공 하나뿐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동물입니다.
사방에 모두 동물만 있다면, 인간은 처절한 고립을 느낄 겁니다. 아무리 동물들이 똑똑하다고 해도, 동물들은 그저 동물들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똑똑한) 동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처절한 고립을 느끼겠죠. 분명히 인간과 반인반수들은 어느 정도 닮았습니다. 인간과 반인반수는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생각을 나눌 수 있죠. 어쩌면 섹스 역시 가능할지 모릅니다. 비록 인간과 반인반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과 반인반수는 서로 섹스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올라프 스태플던이 쓴 소설 <시리우스>는 그런 느낌을 어느 정도 암시합니다. 똑똑한 개조 목양견과 인간 여자가 서로 섹스할 수 있다면, 인간과 반인반수 역시 가능하겠죠.
허버트 웰즈는 그런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치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건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설사 인간과 반인반수가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고, 섹스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반인반수들은 진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자꾸 그들은 원래 상태, 본능을 내세우는 상태, 서로 물어뜯고 죽이는 상태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만약 늑대들이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면, 아무 불편한 마음 없이 우리는 그런 장면을 바라볼 수 있겠죠. 늑대들은 그저 야생 동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반인반수들은 어느 정도 인간입니다. 그런 그들이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면….
<모로 박사의 섬>은 반인반수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이런 시각이 인종 차별에 가깝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은 유럽 문명인입니다. 반인반수들은 무인도 거주민들입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서 소설 주인공은 이성과 문명을 나타내고, 반인반수들은 야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어떤 독자들은 <모로 박사의 섬>이 인종 차별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조셉 콘라드가 쓴 <암흑의 핵심>이 인종 차별이라는 비판과 비슷할 겁니다. 조셉 콘라드는 백인 남자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수탈한다고 썼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암흑의 핵심>에서 아프리카 밀림과 흑인 원주민들은 절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미쳐 돌아가는 암흑의 핵심에서 흑인 원주민들 역시 멀리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은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라 공포와 광기가 휘몰아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서구 문명을 비판했음에도 <암흑의 핵심>이 인종 차별적인 시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모로 박사의 섬>이 <암흑의 핵심>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실 양쪽 소설은 비슷한 구도를 보여줍니다. 유럽 문명인이 배를 타고 어떤 광기의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흑의 핵심>과 달리, <모로 박사의 섬>은 훨씬 비판적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섬을 빠져나오고 유럽으로 돌아갑니다. 네, 여기는 유럽입니다. 유럽은 고상하고 지적이고 세련된 문명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소설 주인공이 문명에 쉽게 어울릴까요? 그건 아닙니다. 섬에서 빠져나온 이후, 소설 주인공은 수많은 유럽 사람들을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인도의 반인반수들과 세련된 유럽 사람들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인반수들과 달리, 유럽 사람들은 고상하게 치장했으나, 그것들은 그저 가면과 허례허식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유럽이라는 문명 역시 야만과 별로 다르지 않았죠.
<모로 박사의 섬>은 더 이상 길게 이야기하지 않으나, 소설 주인공은 계속 처절한 고립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사방에 오직 동물들만 있다면,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혼자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처절하게 외로움에 시달리겠죠. 사실 이건 굉장히 비참한 형벌일지 모릅니다. 인간이 인간과 함께 살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인간이 동물들과 살아야 한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원할지 모릅니다. 콜린 윌슨이 문학 비평 서적 <아웃사이더>를 썼을 때, '아웃사이더'를 설명하기 위해 콜린 윌슨은 허버트 웰즈가 쓴 <눈먼 자들의 나라>를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나라>처럼, <모로 박사의 섬> 역시 아웃사이더를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모로 박사의 섬>에서 소설 주인공은 아웃사이더입니다. 사방에 오직 동물들(유럽 사람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처절한 고립을 느끼고 아웃사이더가 될지 모릅니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두 눈을 뜬 사람이 소외되는 것처럼,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유럽 문명에서 소설 주인공은 스스로를 고립시킬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은 문명인들이 동물이라고 느끼나, 그런 사고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못합니다. 이런 결말 때문에 독자들은 <모로 박사의 섬>이 인간을 부정한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솔직히 <모로 박사의 섬> 이외에 국내에서 유명한 허버트 웰즈 소설들, <타임 머신>, <우주 전쟁>, <투명 인간>은 모두 인간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해도, 독자들이 무조건 인간을 부정하고 비관해야 할까요. 허버트 웰즈는 서구 문명이 저지르는 범죄들을 비판했고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인간성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식민지 수탈과 1차 세계 대전을 거친다면, 누구나 인간성에 기대를 걸지 못하겠죠. 하지만 한편으로 허버트 웰즈는 인류 문명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고 몇몇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모로 박사의 섬>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인간성을 부정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허버트 웰즈가 더 나은 문명을 기대한 것처럼, 한편으로 독자들은 인류 문명이 더 나아져야 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현대 인류 문명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독자들은 고민할 수 있겠죠.
현대 인류 문명을 고민할 때, 독자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까요? <모로 박사의 섬>은 유럽 문명과 야만적인 비유럽 세계를 대조합니다. <암흑의 핵심> 역시 유럽과 아프리카 식민지를 대조합니다. 사실 허버트 웰즈와 조셉 콘래드가 살았을 때, 식민지 수탈은 아주 뜨거운 화두였습니다. 식민지 쟁탈 때문에 결국 유럽 문명은 세계 대전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끔찍하게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유럽 문명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죠. 그걸 포기하기 싫었기 때문에 유럽 문명은 엄청난 전쟁을 터뜨렸습니다. 결국 우리가 부러워하는 고상한 문명은 식민지 수탈에서 비롯했습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독자들은 훨씬 깊게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