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집단 섹스, <잔상>과 <노래하던 새들도>에서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케이트 윌헬름이 쓴 소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와 존 발리가 쓴 소설 <잔상>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연인을 한쌍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서 연인은 한쌍입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연인이 될 수 있죠. 세 사람들이나 네 사람들은 연인이 되지 못합니다. 연인은 오직 한쌍이고, 그래서 수많은 창작물들은 한쌍이 헤어지거나 서로를 그리워하거나 다시 만나는 과정을 노래합니다. 심지어 SF 장르에서 두 연인은 시간을 거스르고 서로 만납니다.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아련한 시간 여행 로맨스일 겁니다. 이런 소설에서 두 연인은 시간을 거스르고 직접 만납니다. 한편으로 단편 소설 <채리티가 남긴 말>에서 두 연인(소녀와 소년)은 서로 만나지 못합니다. 소녀와 소년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속했습니다. 양쪽은 그저 소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두 연인이 서로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뛰어넘지 못하는 아득한 격차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안타깝고 애잔합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은 소녀와 소년의 안타깝고 애잔한 시간 여행 로맨스를 대표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이 소설이 선사하는 여운은 가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막판에 두 연인이 정말 서로 만날 때, 심지어 잠시 두 연인이 그저 서로 스치거나 암시를 교환할 뿐이라고 해도, 그 장면은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사례에서 서로 만나기 위해 두 연인은 시간을 건너고 건너고 다시 건넙니다.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에서 소녀를 만나기 위해 소년은 계속 여러 세계들을 건너뜁니다. 소녀와 소년이 영원히 만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연인은 유일하게 육체를 나눌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례들에서 오직 연인만 사랑이 담긴 섹스를 끌어안을 수 있죠. 이 세상에는 여러 가족 관계들과 사회적인 관계들이 있으나, 대부분 사례들에서 (사랑이 담긴) 섹스는 오직 연인으로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섹스는 두 성별이 합치는 과정입니다. 설사 동성 연인이 섹스한다고 해도, 섹스는 한쌍입니다. 연인은 한쌍이죠. 연인에게는 다른 뭔가가 없습니다. 연인에게는 오직 서로가 있을 뿐입니다. 축구팀에서 선수 하나가 레드 카드를 받는다고 해도, 다른 10명의 선수들은 열심히 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연인 사이에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연인에게 서로는 전부입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연인이 헤어지는 과정은 가장 슬픕니다. 연인이 다시 만나는 과정은 가장 감동적입니다. 연인이 서로 만나고, 키스하고, 젖가슴을 애무하고, 섹스한다면, 감동은 훨씬 커질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연인과만 섹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섹스를 (이성이든 동성이든) 한쌍이 결합하는 과정이라고 간주합니다. 섹스는 한쌍입니다. 섹스가 한쌍이 아닐 때, 우리는 그게 이상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섹스가 한쌍이 아닐 때, 그건 일상을 벗어나고 비일상에 속하겠죠. 존 발리가 쓴 소설 <잔상>에서 집단 섹스는 비일상에 속합니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집단 섹스는 가장 비일상적일지 모릅니다. 케이트 윌헬름이 쓴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집단 섹스를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다릅니다. <잔상>에서 집단 섹스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인간적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집단 섹스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지 모릅니다. 반면,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에서 집단 섹스는 충격적이고 끔찍하고 역겹습니다. 집단 섹스를 목격했을 때, 소설 주인공 마크는 정신병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이 소설에서 집단 섹스는 절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섹스는 개인적입니다. 오직 연인 한쌍만이 아름답게 섹스할 수 있죠. 여러 사람들이 서로 뒹굴고 몸들을 섞는다면, 그건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옥일 겁니다.
왜 서로 대조적인 관점에서 두 소설이 집단 섹스를 바라볼까요? <잔상>은 파편화된 개인들에서 시작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엄청난 공황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파산합니다. 사람들은 고립되고, 소외되고, 배제됩니다. 소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공동체'를 그리워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공동체'가 없습니다. 공동체가 존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공의 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공공의 것을 싫어합니다. 개인의 소유 없이 자본주의는 이윤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개인을 강조하고 자유주의를 좋아합니다. 설사 공공의 것이 있다고 해도, 그건 오직 자본가 계급만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그건 진짜 공공의 것이 아니겠죠.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부정하고 오직 개인만을 강조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정말 고전 자유주의를 계승할까요? 어쩌면 고전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신자유주의를 극도로 혐오할지 모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들을 존중하나, 경제 공황 속에서 개인들은 처절하게 파편화됩니다. 고전 자유주의 철학자들에게 보수적인 엘리트 성향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 파편화된 개인들을 반기지 않겠죠.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자유주의가 사회를 부정하기 때문에 <잔상>에서 소설 주인공은 사회를 그리워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공동체를 원합니다.
공동체는 사회적인 관계들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움직이고 살아갈 때, 그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잔상>에서 소설 주인공이 방문하는 켈러 마을은 정말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끈끈한 사회적인 관계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적인 관계들은 육체들을 연결합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면, 개인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못하겠죠. 켈러 마을은 그걸 극단적으로 승화하고, 섹스 역시 사회적인 관계가 됩니다. 켈러 마을에는 개인적인 한쌍이 없습니다. 모두는 모두의 연인입니다. 모두가 모두의 연인이 될 때, 파편화된 개인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 섹스는 아름답습니다.
반면,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클론 마을에서 시작합니다. 클론 마을은 문자 그대로 복제 인간들이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복제 인간들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복제 인간들은 집단을 중시합니다. 개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수많은 똑같은 인간들 중에서 그저 하나에 불과합니다. 모든 인간이 똑같다면, 개인은 중요하지 않겠죠. 똑같은 외모,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유전 형질, 똑같은 철학, 똑같은 사고 방식. 이런 상황에서 다양성과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제 인간들은 집단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개인을 무시합니다. 당연히 그들은 집단적으로 섹스합니다. 모두 똑같기 때문에 집단 섹스는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 마크는 복제 인간이 아닙니다. 마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인간입니다. 마크는 이른바 진짜배기입니다. 오랜 동안 마크는 혼자 생활했고 그래서 개인적인 생활에 익숙합니다. 마크가 복제 인간 집단으로 들어갔을 때, 마크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크는 자신이 고유한 개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마크는 집단이 개인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개인을 중시하기 때문에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집단보다 개인에게 손을 듭니다. 이 소설은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그래서 집단 섹스는 혐오스럽습니다.
마크가 집단보다 개인이 중요하다고 외칠 때, 어떤 독자들은 전체주의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전체주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으나, 분명히 어떤 독자들은 전체주의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겁니다. 전체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합니다. 집단은 없고, 개인은 있습니다. 적어도 집단보다 개인은 우선합니다. 집단적인 행동은 위험합니다. 아무리 광우병이 나쁘고 수입 쇠고기가 나쁘다고 해도, 단체 시위나 단체 거리 행진 같은 집단적인 행동은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유 시장은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합니다. 그래서 전체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쉽게 시장 만능과 자유 방임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노골적으로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크가 집단을 부정하고 개인을 외칠 때, 분명히 자유주의는 마크에게 손을 들어줬을 겁니다. 집단은 위험합니다. 집단 섹스 역시 위험하겠죠. 집단 섹스는 역겹고 추악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에서 <잔상>과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집단 섹스를 바라봅니다. <잔상>은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개인이 중요하다고 외칩니다.
개인의 자유와 집단, 사회, 공동체, 공공의 것. 어떻게 우리가 이것들을 바라봐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집단 섹스와 연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조건 개인을 중시해야 할까요? 우리가 무조건 집단을 내세워야 할까요?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겁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개인과 집단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만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인 합의'일 겁니다. 개인들이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을 때, 개인과 집단은 균형을 이룰 수 있겠죠. 개인을 내세우는 사람과 집단을 내세우는 사람 모두 '사회적인 합의'를 중시해야 할 겁니다. 분명히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살아가고, 개인들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합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개인과 집단은 충돌하지 않겠죠.
우리가 정말 집단 섹스를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면, 먼저 우리는 사회적의 합의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강한 개인이 약한 개인을 무자비하게 파멸시키는 상황에서, 우리가 집단 섹스를 이야기한다면, 그건 공허한 망상으로 흘러갈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