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장르를 좋아하는 취향들 본문
소설 <세븐이브스>는 2015년에 닐 스티븐슨이 쓴 하드 SF 소설입니다. 달이 부서졌을 때, 생존하기 위해 인류는 우주 거주지로 몰리고, 이는 다시 방대한 행성 공학과 새로운 사회 구조와 유전 변형을 형성하고, 모든 것은 인류 문명을 거시적으로 조명합니다. <세븐이브스>는 여러 호평들을 받은 거시적인 하드 SF 소설이고, 게다가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세븐이브스>의 한국어 번역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골수 SF 독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좀 시큰둥했습니다. <세븐이브스>가 여러 호평들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음에도, 저는 번역본을 빨리 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반면, <고지라: 괴수왕> 예고편을 봤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저는 이 예고편을 계속 보고, 보고, 보고, 다시 봤습니다. 솔직히 2019년에 오직 한 번만 극장에 갈 수 있다면, 저는 <고지라: 괴수왕>을 고르고 싶습니다. 저는 모스라의 생김새가 궁금하고, 모스라가 무슨 역할을 맡을지 궁금하고, 정말 라돈(로단)이 강렬하게 활약할지 궁금하고, 고지라와 킹기도라가 맞붙을지 궁금하고, 인간들이 이런 괴수들을 경외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고지라: 괴수왕>은 인류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했다 운운할지 모릅니다. 그런 묘사가 나온다면, 저는 <고지라: 괴수왕>에게 열렬하게 분노를 터뜨리겠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이 영화가 보고 싶고, 모스라의 생김새와 역할과 라돈의 활약과 고지라와 킹기도라의 싸움과 거대 괴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합니다. 어쩌면 전작 <고지라>가 그런 것처럼, <고지라: 괴수왕>은 싸움박질보다 묵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영화가 될지 모릅니다. 만약 <고지라: 괴수왕>이 그런 영화라면, 또 다시 사람들은 영화 예고편이 사기를 쳤다고 욕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가 보여준 묵직한 분위기는 꽤나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거대 괴수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흥미롭습니다. 영화 내부와 외부에서 <고지라>는 거대 괴수가 오직 싸움박질을 위한 소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신적인 기운에 가까운, 장엄한 영적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고지라: 괴수왕>에서 그런 시각은 더욱 두드러질 것 같습니다. <고지라: 괴수왕>이 피상적인 환경 오염 운운한다면, 저는 거기에 열렬하게 분노를 터뜨리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은 흥미롭고 인상적인 괴수물이 될 것 같습니다. (소설 <고지라>의 한국어 번역본이 없다는 사실은 꽤나 서글프죠. 소설 <퍼시픽 림>의 번역본은 있으나, <고지라>는 없어요.)
하지만 진짜 골수 SF 독자들은 <고지라: 괴수왕> 같은 블록버스터 괴수물 영화보다 <세븐이브스> 같은 거시적인 하드 SF 소설을 지지할 겁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영화입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아주 상업적인 블록버스터입니다. 반면, <세븐이브스>는 소설, 게다가 하드 SF 소설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핵심은 하드 SF 소설이고요. 따라서 진짜 골수 SF 독자들은 <고지라: 괴수왕>보다 <세븐이브스>를 선호하겠죠. 저처럼 <세븐이브스>보다 <고지라: 괴수왕>을 기대하는 사람은 진짜 SF 팬이 아니겠죠. 적어도 저 같은 사람은 골수 SF 독자가 아닐 겁니다.
이런 사례를 마주칠 때마다, 저는 SF 장르를 좋아한다는 문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합니다. 화려한 시각 효과 투성이의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좋아한다면, 그게 SF 장르를 좋아한다는 뜻일까요? 저는 상업 블록버스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드 SF 소설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모두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주변부에 가까워요. 하지만 주변부에도 여러 가치들이 있을 테고, 우리는 그런 가치들을 즐길 수 있겠죠. 누군가가 주변부가 핵심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오류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핵심과 주변부를 인식하고 그것들을 함께 즐긴다면, 그건 취향의 하나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핵심보다 주변부에 더 마음이 끌린다면…. 그건 골수 SF 독자의 마음가짐이 아니겠죠. 그래서 저는 제가 골수 SF 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제가 SF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몇몇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을 좋아할 뿐입니다. 그것들이 SF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저는 그저 SF 장르를 운운할 뿐입니다. 진짜 골수 SF 독자들이 이 블로그를 본다면, 그들은 여기가 웃기다고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SF'라는 딱지를 붙였음에도, 이 블로그는 진짜 사이언스 픽션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짜 사이언스 픽션을 말하는 곳은 alt.SF 같은 웹진이나 고장원님 블로그겠죠.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그저 거대 괴수나 생체 우주선을 떠들 뿐이고, 진짜 사이언스 픽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점을 인식하는 행위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내에 아무 생각 없이 사이언스 픽션을 떠드는 목소리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이언스 픽션을 떠들기 위해 사람들이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고민 없이 무조건 사이언스 픽션을 떠든다면, 우리는 SF 장르를 왜곡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시작했고 왜 사이언스 픽션이 감동적인지, 우리는 어느 정도 고민해야 할 겁니다.
거대 괴수나 생체 우주선을 떠든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거대 괴수나 생체 우주선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따라서 거대 괴수와 생체 우주선을 떠들고 싶다면, 저는 어느 정도 SF 장르를 규정해야 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SF 장르를 왜곡할지 몰라요. 게다가 SF 장르를 왜곡하거나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다면, 저는 왜 거대 괴수와 생체 우주선이 로망인지 파악하지 못하겠죠. 그런 비평이나 감상은 꽤나 피상적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