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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장르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SF 장르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OneTiger 2018. 12. 12. 17:18

픽션, 창작물이 창의력을 높일 수 있을까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연극, 테이블 게임, 보드 게임이 창의력을 높일 수 있을까요? 문화 평론가들은 창작물들에게 무슨 기능들이 있는지 논의합니다. 창작물은 허구입니다. 아무리 창작물이 현실적이기 원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픽션, 창작물은 허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픽션과 픽션을 구분하죠. 이것 때문에 숱한 문학 작가들은 고통에 시달립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문학 작가들은 허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떤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나리오가 현실적이라고 해도, 그건 허구이고, 문학 작가들은 허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학 작가들은 현실에 있지 않은 것을 만들어야 하죠. 역사학자가 1871년 파리 코뮌을 이야기하기 원한다면, 역사학자는 사실을 조사하고 사실을 늘어놓아야 합니다. 역사학자는 뭔가를 빼먹거나 뭔가를 훨씬 강조할 수 있으나, 현실에 없는 것을 집어넣지 못합니다. 역사학자가 현실에 없는 것을 집어넣는 순간, 그것은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이 됩니다. 사람들이 엉터리 3류 기자를 욕할 때처럼, 역사학자는 사실이 아니라 소설을 쓰겠죠. 역사학자와 달리, 소설 작가가 1871년 파리 코뮌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소설 작가는 허구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소설 작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특정한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역사적인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거나 재해석하거나 심지어 현실에 있지 않은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습니다. 파리 코뮌에서 어떤 소녀가 열심히 부르주아지들과 싸웠다고 소설 작가가 쓴다고 해도, 독자들은 정말 그 소녀가 있었는지 묻지 않을 겁니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허구들이 교차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따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독자가 그런 소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면, 소설 작가는 이게 역사책이 아니라 소설책이라고 반박하겠죠.


이렇게 소설을 비롯해 여러 문학들과 게임들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허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허구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고, 영화를 관람하고,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게임에는 수치 계산, 퍼즐 조립, 캐릭터 조작 같은 즐거움들이 있으나, 한편으로 게임 역시 서사와 등장인물과 배경을 포함합니다. 바둑과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V>가 똑같은 전략 게임이라고 해도, 바둑과 <HoMM V>는 다릅니다. 바둑에는 등장인물과 서사가 없으나, <HoMM V>에는 등장인물과 서사가 있죠. 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수치 계산만 아니라 엘프 레인저와 흡혈귀와 오크와 인간 군주가 펼치는 서사를 함께 즐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허구가 나쁘다고 여깁니다. 허구는 나쁩니다. 허구는 부정적이고, 사실은 긍정적이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끼지 않고 소설을 읽고, 영화를 관람하고,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고전 문학이 위대하다고 칭송하죠. 수많은 사람들은 업튼 싱클레어가 쓴 소설 <정글>을 직접 읽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은 <정글>이 위대한 문화 유산이라고 동의할 겁니다. <정글>은 허구입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죠. 왜 허구를 부정적으로 여김에도, 사람들은 픽션을 좋아하고 심지어 위대하다고 칭송할까요. 이게 지적 허영일까요. 이게 그저 지적 허영에 불과할까요.


그런 측면은 없지 않겠으나, 분명히 창작물에는 여러 중요한 기능들이 있을 겁니다. 창작물은 대리 체험, 가상 체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화주의 혁명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레 미제라블>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공화주의 혁명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거대 문어와 싸우지 않았다고 해도, <바다의 노동자>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거대 문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리 체험, 가상 체험은 창작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소설들을 읽을 때, 독자는 견문을 넓힐 수 있어요.



게다가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을 알고 싶어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바뀌는 이야기들은 많은 인기를 끕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그런 이야기는 인기를 끌지 못할지 모릅니다. 창작물들을 읽고 보고 플레이할 때, 우리는 숱한 등장인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게 가상의 관계라고 해도, 독자들은 그런 관계를 현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이용해 현실을 해석하고 소설을 현실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특히, 등장인물이 아주 이상적이고 매력적일 때, 독자들은 그걸 현실에 훨씬 적극적으로 대입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어떤 소녀들은 소설 <야생종>에 나오는 안얀우가 롤모델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비록 소녀들이 표범으로 변신하거나 치유하는 젖을 뿜지 못한다고 해도, 소녀들은 안얀우의 사상과 성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롤모델이 있다면, 부정적인 타산지석 역시 있겠죠. 소설 <치숙>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소설 화자를 비판할 겁니다. 소설 화자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제국주의를 동경할 때, 독자들은 혀를 끌끌 차겠죠. 독자들은 무지, 기만, 사기, 왜곡, 세뇌를 경계할 겁니다. 독자들은 현실을 훨씬 논리적으로 파악하기 원할 테고, 그렇게 <치숙>은 현실 일상에 영향을 미치겠죠.



어떤 사람들은 논픽션에도 그런 기능들이 있을 거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논픽션은 그런 기능들(대리 체험, 가상 체험,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들, 이상적인 등장인물과 부정적인 등장인물)을 강조하지 못합니다. 소설 작가는 허구적인 등장인물들을 직접 배치하고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소설 작가는 사실을 부풀리거나 비틀거나 없는 것을 덧붙일 수 있어요. 이렇게 소설 작가는 다른 논픽션 작가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비단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죠. 작가는 아예 등장인물의 무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고 1인칭 시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설 <정신기생체>와 달리, 일반적인 논픽션은 인간을 깊이 파고들지 못하죠.


정신분석학 서적은 <정신기생체>를 모방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가상 체험과 이상적인 등장인물과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를 훨씬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소설을 비롯해 창작물들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창작물이 허구이기 때문에 창작물을 즐기는 동안 사람들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소설에 감정을 강하게 이입한다고 해도, 소설은 허구이고, 독자들은 거리를 벌리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읽은 이후 우리가 엠마뉘엘 마크롱을 까는 행위와 <태평천하>를 읽은 이후 독자들이 윤직원을 까는 행위는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가 똑같다고 오해합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논픽션일까요, 픽션일까요.)



그리고 창작물은 창의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대리 체험, 가상 체험,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들, 이상적인 등장인물과 부정적인 등장인물을 이용해 소설 독자들은 현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리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이상적인 등장인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을 상상할 때,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어떻게 현실이 바뀔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가능성은 아직 현실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능성을 상정하고 싶다면, 우리는 허구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논픽션은 이걸 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논픽션보다 픽션, 창작물은 훨씬 잘 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이 허구적인 여유를 허용하기 때문에 그 여유 속에서 우리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등장인물들(가상의 다른 인간들)을 바라보고 '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학자들은 이게 창작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일지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반론들이 있겠으나, 반론들이 있다고 해도, 여러 문학자들은 이런 기능이 꽤나 중요하다고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주류 문학이 가능성을 상정한다고 해도, 주류 문학은 현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이 '지금 여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그건 공간적인 이동이나 회고를 넘어서지 못할 겁니다. 주류 문학은 뒤를 돌아보거나 양쪽을 쳐다볼 수 있으나, 미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싶다면, 창작물은 그저 가능성만을 상정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창작물은 아예 현실을 뒤집어야 합니다. 그때 창작물이 키우는 가능성은 극대화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SF 소설들은 창작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지금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주류적인 시간과 공간을 넘고 다른 어떤 것들을 극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외계 식생을 둘러보거나 거대 괴수를 관찰하거나 개조 미생물들을 퍼뜨리거나 자본주의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SF 독자는 자신이 표범으로 변신하고 야생 동물들과 뛰어노는 초인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죠. 창작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창작물 중에서 SF 소설들은 가장 중요할지 모릅니다. SF 소설들은 가장 중요한 창작물일지 모릅니다. 이것 역시 이견들에 부딪힐 수 있겠으나, 심지어 주류 문학자들조차 SF 소설이 주류 문학보다 '다른 어떤 것'을 훨씬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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