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뚝딱뚝딱 공학을 예찬하는 SF 소설들 본문
소설 <마션>은 어떻게 척박한 외계 행성에서 주인공 우주 승무원이 살아남는지 보여줍니다. 외계 행성에 혼자 남았기 때문에 우주 승무원은 각종 생명 유지 장치들을 만들고 식량들을 길러야 합니다. 당연히 <마션>은 기계 공학과 우주 물리학에 치중합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우주 승무원이 임시 기지를 차리고 차량을 운전하고 감자들을 키우는지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독자들은 이게 정말 가능한지 논의를 벌이겠죠. 임시 우주 기지에서 덕테이프가 유용할까요? 정말 우주 승무원이 덕테이프로 우주 기지를 고칠 수 있을까요?
많은 독자들은 이런 부분이 하드 SF 장르에 가깝다고 여길 겁니다.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모습. 이런 관점에서 하드 SF 장르는 공학을 예찬합니다. 하드 SF 장르는 과학적으로 엄중한 동시에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공학을 예찬해요. 만약 하드 SF 소설에서 그런 장면이 빠진다면, 하드 SF 소설이 그저 과학적인 엄중함만 유지한다면, 독자들은 소설이 시시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중력의 임무>처럼 고작 뗏목을 만든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은 뭔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하드 SF 소설들은 이런 과정(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과정)을 묘사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의 미덕은 이런 것이죠.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우주 승무원들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거대 우주 구조물 라마 우주선를 탐사합니다. 외계인들은 라마 우주선을 건조했고, 우주 승무원들은 라마 우주선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합니다. 내부를 탐사하기 위해 우주 승무원들은 오직 간단한 전진 기지를 설치했을 뿐입니다. 우주 승무원들은 뗏목을 만들거나 중력 자전거를 탑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뭔가를 열심히 만드는 행위가 아니죠. 유기물 스프 바다는 생체 로봇들을 만듭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뭔가를 뚝딱뚝딱 열심히 만드는 행위가 아닐 겁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어떻게 유기물 스프 바다가 생체 로봇을 만들 수 있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우주선 안에 유기물 스프와 유전자 지도와 각종 재료들이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심지어 어떻게 라마 바다가 생체 로봇들을 만드는지 아서 클라크조차 모를 겁니다. 아직 인류는 생명 현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인류는 영원히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광신도들은 지적 설계 같은 헛소리를 퍼뜨립니다.) 그래서 아득한 우주와 생명 현상은 신비롭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오직 그런 신비로움을 강조할 뿐이고, 우주 승무원들은 직접 뭔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처럼, 어떤 하드 SF 소설들은 뚝딱뚝딱 만드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인간이 뭔가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외계인들이 라마를 건조하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건조했기 때문에 라마 우주선은 태양계 안으로 날아올 수 있었죠. <라마와의 랑데부>는 우주선 건조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나, 독자들은 라마 우주선을 건조하는 과정을 상정할 수 있어요. 우주선부터 우주복까지, 인데버 승무원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장비들 역시 기술자들이 뚝딱뚝딱 열심히 만든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라마와의 랑데부>가 뭔가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소설은 그런 과정을 간접적으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공학을 간접적으로 예찬할 수 있어요.
공학 과정이 있기 때문에, 어설픈 급조 뗏목과 작은 잠자리 자전거부터 초거대 라마 우주선까지 모두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라마와의 랑데부>는 공학을 예찬합니다. 물론 하드 SF 소설이 뭔가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면, 그건 훨씬 커다란 예찬이 될 겁니다. <마션> 같은 소설을 읽었을 때, 독자들은 자신이 직접 임시 우주 기지를 짓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을 겁니다. 적어도 독자들은 그런 과정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테고, 그런 재미 때문에 다들 <마션>을 읽겠죠. <마션>에서 인간(주인공 승무원)은 직접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이런 과정은 '공학을 예찬'할 수 있어요.
하드 SF 소설은 엄중한 고증에서 이륙하고 비약적인 우주로 날아갑니다. 소설 <마션>이 비약적인 우주로 날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마션>이 실망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런 독자들은 <마션>보다 <블러드 뮤직>이나 <쿼런틴>을 훨씬 높게 평가하겠죠. 결국 하드 SF 소설은 머나먼 우주로 날아가고 안락한 고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왜 구태여 엄중한 고증에서 하드 SF 소설이 이륙해야 할까요? 결국 비약적인 우주로 날아가야 한다면, 왜 비약적인 고도가 아니라 엄중하고 과학적인 고도에서 하드 SF 소설이 출발할까요? 왜 하드 SF 소설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까요?
'하드하다'는 문구가 무엇을 가리킬까요? 여기에는 여러 대답들이 있을 겁니다. 언제나 장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죠.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과학적으로 엄중하다'는 문구는 수많은 대답들을 낳을 수 있어요. 그것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대답은 '공학을 예찬하는 분위기'일 겁니다. 하드 SF 소설은 공학을 예찬해야 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누군가가 뚝딱뚝딱 뭔가를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드 SF 소설에서 누군가는 복잡한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면 누군가는 그런 공학적인 결과를 구경하고 감탄해야 합니다. 등장인물이 공학적인 결과를 구경하고 감탄하는 동안, 하드 SF 소설은 공학을 예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드 SF 소설은 공학 친화적입니다.
왜 하드 SF 소설이 공학을 예찬할까요? 왜 우리가 이런 묘사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할까요? 여기에도 여러 대답들이 있겠으나, 한 가지 대답은 이런 공학이 시대를 바꾸고 문명을 확장하고 생존을 보장했다는 대답일 겁니다. 현대 인류 문명은 산업 혁명과 함께 발전했습니다. 산업 혁명은 현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하는 아주 단단한 디딤돌입니다. 그렇게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SF 소설 역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 혁명이 현대적인 19세기를 열지 않았다면, SF 소설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노동자들이 뚝딱뚝딱 거대 공장과 증기선과 열차와 각종 기계들을 만들지 않았다면, 현대적인 19세기는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SF 소설 역시 태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기계 공학이라는 놀라움 없이 <발전기의 왕> 같은 소설이 나타날 수 있겠어요? 따라서 태생적으로 SF 소설들은 공학을 예찬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런 공학은 생존을 보장합니다. 이미 19세기 소설 <신비의 섬>은 어떻게 공학이 생존을 보장하는지 구구절절 보여줬습니다. <마션>은 고등 생명체가 절대 살지 못하는 외계 행성에서 우주 승무원이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뭔가를 뚝딱뚝딱 만들 때, 불가능은 가능성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뭔가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건 우리의 가장 커다란 정체성이고, SF 소설은 그 부분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신비의 섬>이나 <마션> 같은 소설은 백지 상태에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시대를 바꾸거나 문명을 확장하거나 생존을 보장한다는 관점을 제외한다고 해도, 우리는 순수하게 뭔가를 창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레고 블록들로 집이나 자동차나 배를 만든다면, 우리는 창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하드 SF 소설은 그걸 훨씬 복잡하고 거대하고 현실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립니다. "나는 이런 것을 만들고 싶어. 나는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어. 나는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해." 어쩌면 하드 SF 소설 밑바닥에는 이런 심리들이 깔렸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공학을 예찬하기 위해 현실적인 고도에서 하드 SF 소설들은 이륙할 겁니다. 결국 하드 SF 소설이 비약적인 상상력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하드 SF 소설은 공학을 예찬해야 합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을 보세요. 이 소설에는 구닥다리 우주복과 첨단 외계 우주선이 있습니다. 구닥다리 우주복은 현실적인 영역입니다. 현실적인 영역에서 <우주복 있음>은 공학을 예찬할 수 있죠. 그리고 소설 주인공이 우주복을 입은 이후, 소설은 외계 우주선을 보여줍니다. 우주복을 입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비약적인 상상력으로 넘어갈 수 있었죠.
흔한 스페이스 오페라들 및 사이언스 판타지들과 달리, 이렇게 SF 소설들은 공학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오직 하드 SF 소설들만 공학을 예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는 다른 방법으로 공학을 예찬할 수 있겠죠.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와 스팀펑크는 비일상에서 훨씬 높은 비일상을 추구합니다. 하드 SF 장르는 일상에서 비일상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엄중하게 공학을 예찬하고 싶다면, 스페이스 오페라 및 스팀펑크보다 하드 SF 장르는 나을 겁니다. SF 소설들에서 사람들은 뭔가를 즐겁게 뚝딱뚝딱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모든 문학 중에서 유일하게 SF 소설들만 이런 과정을 예찬할 수 있을 겁니다. 우주선, 로봇, 인공 지능, 비행 자동차, 생태 돔, 사이보그 나무….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과정은 정말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