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인 메모리엄>과 <프래그먼트>가 바라보는 진화 본문
알프레드 테니슨은 19세기 영국 시인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왕실 시인(계관 시인)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테니슨을 찬사를 받았고, 왕실 역시 테니슨을 인정했습니다. 영국 왕실이 알프레드 테니슨을 지목했을 때, 테니슨은 장편 시집 <인 메모리엄>으로 커다란 명성을 얻는 중이었습니다. <인 메모리엄> 덕분에 알프레드 테니슨은 왕실 시인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인 메모리엄>은 테니슨이 고인이 된 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절절하고 애달픕니다.
왜 개인적인 애절함이 수많은 사람들과 왕실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문학 평론가들은 <인 메모리엄>이 개인적인 애절함을 시대적인 혼란과 상실감으로 확장했다고 평가합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은 혼란과 상실감을 겪는 중이었고, 그래서 <인 메모리엄>을 읽는 동안 그들은 위로를 받거나 공감대를 형성했을 겁니다. 이건 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메리 셸리가 개인적인 상실감을 인류 멸망으로 확장한 문학 효과와 비슷하겠죠. 왜 19세기 유럽 사람들이 혼란과 상실감을 겪었을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진화 이론은 가장 커다란 이유들 중에서 하나였습니다. 진화 이론은 중세 유럽 1,000년과 유럽의 사고 방식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만약 21세기에서 알프레드 테니슨이 워렌 페이가 쓴 <프래그먼트>를 읽는다면, 테니슨은 깜짝 놀랄 겁니다. 왜 테니슨이 놀랄까요? 소설이 너무 얄팍하기 때문에? 종잇장보다 등장인물들이 가볍기 때문에?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찾는다고 해도, 쥐꼬리 같은 필력조차 없기 때문에? 그것들 역시 이유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소설이 너무 얄팍하고, 종잇장보다 등장인물들이 가볍고, 쥐꼬리 같은 필력조차 없다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프래그먼트>가 재미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취향이 있죠. 어떤 SF 팬들은 괴수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이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SF 팬들은 등장인물들을 후딱 넘기고 괴수 이야기에 치중하죠. 이런 SF 팬들은 <프래그먼트>가 재미있다고 생각할 테고 제프 밴더미어가 쓴 <빛의 세계>가 끔찍하게 지루하다고 느끼겠죠. 반면, 알프레드 테니슨은 <프래그먼트>를 읽고 두뇌가 썩는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타임 머신>에서 시간 여행자는 초라한 미래 인류를 측은하게 바라봤습니다. 시간 여행자처럼, 알프레드 테니슨은 21세기 독자들과 <프래그먼트>를 측은하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 때문에 알프레드 테니슨은 <프래그먼트>를 싫어할 겁니다. 이 소설이 진화 이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의 무인도 생태계는 아주 독특하고 기이하게 진화했습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을 비롯해 19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진화 이론은 날벼락이었습니다. 이미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들은 진화 이론을 어느 정도 긍정했습니다. 장 자크 루소 역시 진화 이론을 짐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유럽 사람들은 생명체들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성경에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 생태계는 고정적이고 바뀌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 1,000년 동안 유럽 사람들은 자연이 고정적이라고 믿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 유럽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연 과학자들(자연 철학자들)은 각종 표본들과 화석들을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진화 이론을 외쳤고 생명체들이 바뀐다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진화 이론은 유럽 문명을 발칵 뒤집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사고 방식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자연 생태계는 고정적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성경이 진화를 말하지 않는다면, 생명체들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계속 진화 이론을 긍정하고 논증들을 들이댑니다. 유럽 사람들은 커다란 혼란과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다들 시대가 끝난다고 느꼈습니다.
이런 혼란은 비단 유럽만 아니라 다른 서구 문명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 장 루이 아가시는 자연의 대칭성이 아주 조화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장 루이 아가시는 진화 이론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간주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체들은 놀랍게 진화할 수 있습니다. 장 루이 아가시는 속편하게 생각했죠. 21세기 오늘날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속편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생명체들이 진화한다는 논리 사이에는 아무 갈등과 충돌이 없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자연 과학과 달리, 종교는 헛되고 허약해졌습니다. "아무것도 목적 없이 방황하지 않고, 어느 한 생명도 파괴되거나 쓰레기처럼 허공에 버려지지 않으리라. 신께서 모든 일을 마치실 때에." 알프레드 테니슨은 읊조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믿을 뿐입니다. 언젠가 선이 모두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런 꿈을 꾼다고 해도,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빛을 찾으며 우는 아이. 나는 울음 이외에 아무 언어도 갖지 못한 아이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개인적인 애절함을 노래했을 겁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 역시 애절함을 느꼈겠죠.
만약 21세기에서 알프레드 테니슨이 영화 <고지라>를 관람한다면, 테니슨은 깜짝 놀랄 겁니다. <고지라> 역시 진화 이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고지라>는 선사 시대부터 21세기 신생대까지, 자연 생태계가 계속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죠. 엄청난 진화 역사 동안 고지라는 살아왔으나, 그렇다고 해도 <고지라>는 진화 이론을 적극적으로 긍정합니다. 게다가 거대 괴수가 사람들을 습격했음에도, 신은 인간들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균형을 맞춥니다. 인간들은 그저 보조적으로 고지라를 도왔을 뿐입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이런 내용에 깜짝 놀랄 겁니다.
<크라켄>에서 알프레드 테니슨은 크라켄이 심해에서 지상으로 상륙한다고 적었습니다. 심해에서 어마어마한 크라켄은 수면으로 솟구칩니다. 크라켄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릴 겁니다. 인류는 감히 어마어마한 심해 괴수에게 대적하지 못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심해에서 크툴루가 올라온다고 쓰기 전에 이미 알프레드 테니슨은 심해에서 크라켄이 올라온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신은 크라켄을 한 큐에 보내버리고, 크라켄은 다시 심해로 가라앉습니다. 신은 인간들을 구원합니다. 그렇게 알프레드 테니슨은 믿었죠. 19세기 유럽 사람들 역시 믿었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지라>에는 신이 아니라 진화와 자연이 있습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고지라>가 아주 불경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영화가 신을 거부하고 진화와 자연을 말하기 때문이죠. 알프레드 테니슨과 달리, 21세기 도시 시민들은 아무렇지 않게 <프래그먼트>를 읽고 <고지라>를 관람할 겁니다. 21세기 도시 시민들은 진화 이론을 별로 고민하지 않겠죠. 어떤 독자들은 <프래그먼트>에 쥐꼬리 같은 필력조차 없다고 비판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독자들은 진화 설정에 시비를 걸지 않을 겁니다. 그런 독자들 역시 진화 이론을 긍정할 겁니다. 이런 사례는 문학이 절대 보편적이지 않다는 증거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조차 문학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문학이나, 21세기 인도네시아 농민 역시 <오디세이아>가 감동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문학은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문학에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은 <프래그먼트>에 질겁하겠으나, 21세기 도시 시민들은 진화 이론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문학이 보편적일까요? 정말 문학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유럽 문명이 세계를 장악하기 때문에, 21세기 인도네시아 농민은 <오디세이아>가 감동적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인도네시아 농민은 <오디세이아>가 아니라 <오디세이아> 배후의 유럽 문명이 감동적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보편성을 이야기하나, 보편성은 아주 희미하거나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유럽 문명이 세계를 장악하지 못했다면, 21세기 사람들은 <오디세이아>가 감동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보편성은 아주 넓게 퍼진 특수성일지 모릅니다. 특수성이 넓게 퍼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특수성을 보편성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문학 평론가들은 정말 문학이 보편적인지 논의합니다. 이런 논의는 절대 끝나지 않겠죠.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특수성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어떤 문학들은 일부러 특수성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SF 소설들은 그런 사례일 겁니다. SF 소설들은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문화, 다른 자연으로 열심히 나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