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우물 안 개구리들 본문
[중세 판타지와 달리, 여기에는 변화와 진화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매력은 그것이죠.]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속담이 SF 소설과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SF 소설이 우물 안 개구리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리석은 이유는 단기적인 시각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아주 넓습니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우물은 넓은 하늘을 좁게 가리고, 개구리는 좁은 하늘이 세상의 전부라고 판단합니다. 그건 편협한 판단이죠. 그래서 누군가가 편협하고 단기적으로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물 안 개구리에 비유하죠.
이게 SF 소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SF 소설은 근본적으로 거시적인 전망을 밑바탕에 깝니다. SF 소설은 인류 문명이 거시적으로 바뀐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거시적인 변화가 어떻게 미래 사회와 미래 관념을 형성하는지 이야기합니다. 비록 SF 작가들마다 다양한 미래 관념들을 설정하나, 수많은 SF 소설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드러냅니다. 그건 결국 세상이 바뀐다는 신념입니다.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고, 게다가 산업 혁명이나 정보 혁명 이후 아주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SF 소설들은 출발합니다. 세상이 변한다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작가는 SF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세상은 부정적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아니면 세상은 긍정적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우리는 그게 긍정이나 부정인지 확신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우리가 21세기 관념을 26세기에 반영할 수 있겠어요? 도덕이나 윤리는 가변적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 고정적이지 않아요. 시대에 따라 도덕과 윤리는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유행 같습니다. 걸핏하면 유행이 바뀌는 것처럼 도덕과 윤리 역시 수시로 바뀝니다.
17세기 인간과 21세기 인간은 절대 똑같은 윤리관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17세기에 백인이 흑인을 두들겨 패는 행위는 비윤리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그런 행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엄청난 화제가 됩니다. 26세기 사람들 역시 21세기 사람들과 아주 다른 윤리관을 의식할 겁니다. 따라서 어떻게 세상이 변하든, 우리는 그게 부정인지 긍정인지 판단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해요. 우리는 그저 인류 역사가 거시적으로 바뀌었고, 앞으로 그런 변화가 새로운 사회와 관념을 형성할 거라는 사실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추정 위에서 SF 소설은 출발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반지 전쟁> 같은 중세 판타지와 <듄>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슷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듄>은 판타지 소설 목록에 자주 들락거리는 단골 손님이고 인기 스타입니다. 하지만 정말 <듄>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반지 전쟁> 같은 중세 판타지와 비슷할까요. <반지 전쟁>은 문명이 바뀐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몇 천 년이 흐른다고 해도, <반지 전쟁>에서 인간, 드워프, 엘프, 오크 같은 종족들은 비슷한 문명을 유지합니다. 임라드리스 군주 엘론드는 자신이 아주 오랜 기간을 살았다고 증언하나, 그 오랜 기간 동안 중간계 문명은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건 다소 이상한 현상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10년이 강산을 바꿀 수 있음에도, 중간계에서 문명은 별로 바뀌지 않아요. 여전히 온갖 종족들은 말을 타고, 수레를 끌고, 범선으로 항해하죠. 반면, <듄>은 끊임없이 바뀌는 자연 생태계와 인류 문명을 강조합니다. 아예 <듄> 그 자체는 사람들이 행성 생태계를 사막에서 녹지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행성 생태계가 바뀌었을 때, 인류 문명 역시 바뀝니다. 이런 관점에서 <반지 전쟁>과 <듄>은 아주 다릅니다. 판타지 독자들이 두 소설을 비슷하게 취급한다고 해도,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문명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반지 전쟁>과 <듄>은 완전히 다릅니다.
왜 <듄>이 행성 생태계와 인류 문명이 바뀐다고 주장할까요? 현실 속에서 자연 생태계와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고정적이고 이상적인 자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고정적이고 영구적인 문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화나 환경 변화는 자연 생태계를 바꾸고, 생산력 발전이나 계급 투쟁은 인류 문명을 바꿉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변화를 단선적인 역사 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단순한 시각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상은 분명히 바뀌었습니다. 전쟁 같은 비극은 계속 인류 문명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이 존재한다고 해도, 전쟁을 치르는 양상은 아주 많이 바뀌었습니다. 17세기 사람들은 인터넷을 이용해 독재자를 타도하는 시위를 꿈조차 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21세기 사람들에게 별로 낯설지 않아요. 그런 행위가 전쟁을 막지 못한다고 해도, 양상 그 자체는 아주 많이 바뀌었죠. 이건 장족의 발전입니다. SF 소설은 이런 변화가 계속 이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건 인류 문명을 아주 많이 바꿀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런 변화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고정적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나요. 그런 사람들은 전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죠. 이건 아주 웃기는 헛소리입니다. 17세기 사람들이 인터넷을 이용해 반전 시위대를 조직할 수 있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과거 사람들은 반전 시위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7세기와 21세기는 엄청나게 달라졌죠. 17세기와 21세기가 엄청나게 다른 것처럼, 21세기와 26세기는 엄청나게 다를 겁니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겠죠. 아마 그런 사람은 SF 소설이 이야기하는 변화 역시 받아들이지 못하겠죠.
※ 이미지 출처: http://conceptartworld.com/inspiration/dune-concept-art-and-illustration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