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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하드 SF 소설이 전달하는 가치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하드 SF 소설이 전달하는 가치

OneTiger 2018. 6. 19. 20:02

하드 SF 소설은 과학적으로 엄중하게 상상한 소설을 뜻합니다. 하드 SF 소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겠으나, 대충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정의에 반대하겠으나, 이는 완전히 틀린 정의가 아닐 겁니다. 여기에서 엄중한 상상력이 무엇을 뜻할까요? 아마 엄중한 상상력은 SF 작가가 자연 과학 지식에 좀 더 공을 들인다는 뜻일 겁니다. 똑같이 우주 항해를 다룬다고 해도, 작가가 천문학 지식과 우주 비행 지식을 최대한 반영한다면, 그 소설은 하드 SF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작가가 초공간 도약이나 초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는다면, 그 소설은 하드 SF가 아니라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겠죠. 만약 작가가 19세기 증기선이 우주로 나갈 수 있다고 쓴다면, 그 소설은 완전히 사이언스 판타지가 될 테고요. 그래서 SF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이 가장 핵심적인 SF 소설이라고 간주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과학 기술을 가장 많이 반영할 수 있고, 덕분에 가장 원대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SF 작가가 엄중한 과학 기술에 상상력을 덧붙인다면, 그 소설은 독자를 아득하고 아련한 우주 멀리 보낼 겁니다.



이는 하드 SF 소설이 다른 장르보다 무조건 뛰어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드 SF라는 하위 장르는 무조건 작품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드 SF 소설 역시 소설입니다. 사상과 주제와 필력과 문체가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가가 과학 지식들을 많이 들어부어도, 하드 SF 소설은 별로 감동적이지 않을 겁니다.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그저 아서 클라크가 과학 기술을 엄중하게 상상하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아서 클라크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일 겁니다.


아서 클라크가 우주를 경이롭게 선망하지 않는다면, <라마와의 랑데부>는 그렇게 감동적인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서 클라크가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보기 때문에 <라마와의 랑데부>는 하드 SF 소설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종종 칼 세이건이나 닐 타이슨 같은 대중 과학자는 어려운 과학 지식 없이 놀랍고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런 놀라움은 하드 SF 소설이 전달하는 놀라움과 비슷합니다. 경이롭고 아득한 우주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반드시 엄중하게 상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엄중한 상상력은 경이로운 시각을 따라가는 요소입니다. 저는 작가가 보여주는 시각이 엄중한 상상력보다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경이롭게 우주를 바라본다고 해도, 엄중한 사실 위에 작가가 서있지 않는다면, 그런 시각은 빛을 잃을 겁니다. 작가가 경이롭게 우주를 바라본다고 해도, 자연 과학적인 사실들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런 시각은 너무 낭만적으로 흐를지 모릅니다. 경이로운 시각이 허황되거나 낭만적으로 방황하지 않도록 엄중한 상상력은 그런 감성을 붙잡습니다. 만약 엄중한 상상력이 디딤돌이 되지 않는다면, 경이로운 감성은 엉뚱한 방향으로 영원히 흐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하드 SF 소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드 SF 이외에 다른 하위 장르들 역시 놀랍고 장대한 장면들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에서 증기선이 외계 행성으로 날아가고, 증기선 승무원들이 신비한 우주 동물들을 만난다고 해도, 그런 소설은 얼마든지 장대한 장면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증기선은 자칫 낭만적인 구석에 빠질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증기선이 우주로 날아가는 장면이 엉뚱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이 멋지다고 생각하나, 스팀펑크 판타지의 우주 증기선은 모두에게서 쉽게 공감을 끌어내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하드 SF 소설의 장거리 우주선은 상대적으로 쉽게 그럴 수 있겠죠. 엄중한 자연 과학을 깔았기 때문에.



문제는 하드 SF 소설 역시 언젠가 머나먼 상상력의 세계로 날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엄중하게 출발할 수 있으나, 결국 세상을 뒤집고 상상력의 세계로 날아가야 합니다. 만약 작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SF 소설은 그저 재미있는 교양 과학에 머물 겁니다. 그런 소설들 역시 존재합니다. 그런 소설은 외계 행성을 보여주고, 이질적인 물리 법칙을 강조하고, 엄중한 상상력을 곁들이나, 세상을 뒤집지 않습니다. 그런 소설은 경이로운 시각을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왜 독자들이 하드 SF 소설을 읽을까요? 교양 과학을 배우기 위해? 어려운 과학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하드 SF 소설에게 그런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중국 정부가 SF 소설들을 후원하는 이유는 계몽주의 때문일 겁니다. 지식인들은 SF 소설을 쓰고, 대중은 SF 소설에게서 과학 지식을 배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정부는 SF 소설들을 후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SF 소설의 핵심이 그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SF 독자들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모습을 보고 고정 관념을 깨고 싶어합니다. SF 독자들은 아득하고 머나먼 우주에서 지구와 인간과 문명을 돌아보고, 고정 관념을 날려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저는 SF 독자들이 하드 SF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과학 지식을 얻고 싶다면, 그 사람은 SF 소설이 아니라 과학 서적을 읽어야 할 겁니다. 하드 SF 소설은 과학 지식을 전달할 수 있으나, 그건 핵심이 아닐 겁니다. 핵심은 고정 관념을 부수는 발상입니다. 판타지 소설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 역시 유사 인간 종족과 괴수와 마법과 다른 차원을 내세우고, 고정 관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드 SF 소설은 어떻게 우주 속에서 인류가 기나긴 역사를 걸었는지 살펴보고, 그런 역사 위에서 고정 관념을 깨뜨립니다. 아마 그건 하드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이 드러내는 가장 큰 차이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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