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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SF 소설과 논리적인 개연성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SF 소설과 논리적인 개연성

OneTiger 2018. 6. 14. 20:14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꽤나 유명한 문학 기법입니다. 이는 특별히 부정적인 기법으로서 유명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모든 갈등을 단번에 해결하는 인위적인 장치를 뜻합니다. 소설, 만화, 연극, 애니매이션, 영화, 게임 등에는 수많은 갈등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갈등들은 긴장감을 형성하고, 격렬한 싸움이나 전투를 부르고, 비극이나 비장미를 연출합니다. 크고 복잡한 갈등을 이야기하는 창작물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을 겁니다. 그래서 창작가는 뭔가 압도적이고 복잡한 갈등을 집어넣고 싶어하죠.


문제는 그런 복잡한 갈등을 해소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게 갈등 관계를 만들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어떻게 이런 복잡한 관계들을 깔끔하게 풀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어떻게 갈등을 풀어나가야 할까요? 빠르게? 천천히? 이 갈등이 저 갈등으로 이어지고, 저 갈등이 다시 이 갈등으로 이어지고, 다이달로스 미궁처럼 갈등들이 비비 꼬였다면, 어디에서 창작가가 손을 대야 할까요? 복잡한 갈등 관계를 시원하게 풀기 위해 창작가들은 골머리를 싸매야 할 겁니다.



갈등 관계들이 시원하게 풀릴 때, 사람들은 뭔가 해소나 정화를 느끼고 감동을 받을 겁니다. 만약 창작가가 갈등 관계들을 복잡하게 꼬아놓고, 그걸 제대로 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상당히 찝찝하거나 답답하다고 느낄 겁니다. 만약 갈등 관계들이 아주 복잡하고, 창작가가 그것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런 복잡한 갈등 관계는 부작용을 부를 겁니다.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창작가에게 화를 터뜨리겠죠. 그래서 창작가는 무리하게 갈등들을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남발합니다.


이는 뭔가 아주 커다란 사건 하나가 뜬금없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복잡한 애정 관계를 형성했다고 가정하죠. 어떻게 이런 복잡한 애정 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야 할지 작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다고 썼습니다. 결국 모두 죽었고, 갈등은 깔끔하게(?) 해소되었습니다. 분명히 이는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마무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결말에 동의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작가가 일부러 그런 엉뚱한 결말을 유도했다면, 독자들 역시 이해하겠죠. 하지만 이는 그저 궁색한 결말에 불과합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SF 장르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상대적으로 흔한 기법입니다. 아니, 사실 이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보다 불가해한 소재에 가깝겠죠. 불가해한 영역을 묘사할 수 있기 때문에 SF 장르는 거대하고 극적인 결말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은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이게 엉터리라고 비난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은 떡밥들을 제대로 풀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이상한 물건 때문에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스트루가츠키 형제에게 불만을 터뜨리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고작 인간이 첨단 외계 문명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외계 문명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스트루카츠키 형제가 그렇게 결말을 지었어도, 독자들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불가해한 감성을 받아들입니다. 비록 여기에 정화나 해소는 없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SF 독자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처럼 몇몇 SF 소설에서 외계인은 문자 그대로 신적인 존재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외계인이 악당이라고 말하고, 아서 클라크는 외계인이 천사라고 말하나, 분명히 양쪽 모두 외계인이 신적인 존재라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상대적으로 쉽게 불가해한 설정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해한 설정을 다룬다고 해도, 이는 여기에 논리적인 개연성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불가해한 설정은 서로 다르죠.



이는 모든 SF 소설이 아무렇지 않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써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해한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불가해한 설정이 자연스럽게 SF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반면, 주류 문학은 현실성을 다뤄야 하고, 그래서 이런 설정을 쉽게 써먹지 못하겠죠. 설사 쉽게 써먹을 수 있다고 해도, 주류 문학은 뭔가 특별한 이야기 구조를 짜맞춰야 할 겁니다. 아니면 주류 문학은 초현실주의나 부조리 문학에 기대야 할 겁니다. 작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개연성이 없고, 논리적인 사건 전개가 없고,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할 겁니다.


사실 수많은 독자들, 관객들, 게임 플레이어들은 개연성을 자세하게 따집니다. 마치 개연성이 우주적인 진리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독자들, 관객들, 게임 플레이어들은 모든 것에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댑니다. 이는 꽤나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별로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이 논리적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꽤나 광신적입니다.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대기업들을 숭배합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이 대기업을 숭배하고 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녹음기처럼 사람들은 그저 지배 계급이 세뇌하는 말들을 모방할 뿐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창작물들은 비논리적입니다. 창작가들은 자신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이해하지 못하죠.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개연성과 논리적인 사건 전개를 물고 늘어집니다. 하지만 그들은 뭐가 논리인지 알지 못해요. 그들이 정말 논리를 안다면, 자본주의 세상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광신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독자들은 논리적인 사건 전개를 갈구합니다. 광신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논리적인 전개가 존재할 수 있나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독자들 역시 개연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모든 일상을 장악하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파악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개연성들을 지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사실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거대한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 상황에서 독자들이 사소한 개연성들을 지적한다면, 그건 꽤나 우스꽝스럽지 않을까요. 수많은 독자들은 고대 소설들이 우연들을 남발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 소설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결국 현대 소설들 역시 그저 얄팍하고 유치한 어릿광대 놀음에 불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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