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하드 SF 작가의 의도와 SF 공식들 본문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여러 웃긴 문구들이 있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풍부한 재치와 화술로 필력을 장식했고, 곳곳에서 <스타십 트루퍼스>는 웃음을 유발합니다. 이른바 3대 그랜드 마스터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중에서 로버트 하인라인은 재치 있는 작가에 가장 가까울 겁니다. 아서 클라크는 재치에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얀 사슴 시리즈는 신나는 웃음들로 이어지나, 이런 웃음들은 아서 클라크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역시 요절복통 웃음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자신을 자랑할 때, 아시모프는 정말 신나게 만담들을 늘어놓습니다. 소설 <아자젤> 시리즈는 정말 웃깁니다. 하지만 아시모프는 이런 만담들을 사이언스 픽션과 제대로 결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시모프 대표 소설들은 별로 웃음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일상 속의 웃음보다 만담을 중시하기 때문에, 비일상적인 사이언스 픽션에서 아시모프 만담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서 클라크 및 아이작 아시모프와 달리, 대표적인 사이언스 픽션들 속에서 로버트 하인라인은 농담들을 던집습니다. 그래서 <스타십 트루퍼스>는 재미있습니다. 독자는 킥킥거리고 웃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농담들 뒤에는 자본주의 군사 정책이 있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폭력으로 적대 세력들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본주의는 필수적으로 군수 산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군수 산업 사이에는 필수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시장 경제가 포화 상태에 다다른다면,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할 겁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외부 영역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외부 영역이 시장 경제를 반대한다면, 자본주의는 폭력적으로 외부 영역을 시장 경제 속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식민지 수탈, 군수 산업, 세계 대전은 서로 이어집니다.
20세기 초반 서구 사회주의자들에게 식민지 수탈, 군수 산업, 세계 대전은 가장 중요한 화제들이었습니다. 아직 군수 산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아직 세계 대전이 터지지 않았을 때, 아무도 식민지 수탈에 상관하지 않았을 때, 이미 사회주의자들은 얼마나 심각하게 자본주의가 폭력적인지 깨달았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이런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예찬합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자본주의 경제를 예찬하기 때문에, <스타십 트루퍼스>는 강력한 군사 정책을 찬양합니다. <스타십 트루퍼스>가 강력한 군사 정책을 찬양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웃긴 문장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웃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문장들이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 로버트 하인라인은 웃긴 문장들을 썼을 겁니다. 독자들은 로버트 하인라인이 웃긴 문장들을 썼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웃지 않습니다. 소설 <스타쉽 트루퍼스>가 자본주의 군사 정책을 찬양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스타십 트루퍼스>가 수구 꼴통 소설이라고 느낄 겁니다. 아무리 로버트 하인라인이 웃긴 문장들을 썼고, 독자들이 웃긴 문장들을 인식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웃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게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 로버트 하인라인은 웃긴 문장들을 썼을 겁니다.
독자들은 이걸 압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웃어야 할 거야." 이렇게 독자들은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했음에도, 독자들은 웃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게 올바른 독서인가요? 흔히 많은 사람들은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독자들은 로버트 하인라인이 의도적으로 웃긴 문장들을 썼다고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웃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어휴, 이런 수구 꼴통 아재 같으니."라고 핀잔을 날립니다.
이게 올바른 독서인가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했음에도,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게 올바른 독서인가요? 그렉 이건은 <쿼런틴>을 썼습니다. 소설 <쿼런틴>은 하드 SF입니다.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독자들은 머리가 터진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쿼런틴>이 어려운 용어들을 줄줄이 늘어놓을 때,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가요? 만약 독자들이 어려운 용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소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왜 소설 주인공 탐정이 뭔가를 관찰하거나, 경우의 수를 맞추거나,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관통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들은 대략적으로 소설 얼개를 따라갈 수 있으나, 독자들은 뭐라고 포콰이가 설명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가 어려운 용어들과 설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게 올바른 하드 SF 독서인가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가요? 독자가 하드 SF 설정을 100% 이해해야 하나요? 독자가 설정을 70% 이해한다면, 이게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나요? 독자가 하드 SF 설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독자가 그저 소설 줄거리만 따라갈 뿐이라면, 이게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나요? 만약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면, 독자가 <쿼런틴>을 읽는 동안, 어떻게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나요?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뭔가를 의도할 겁니다. SF 작가가 SF 소설을 쓰는 동안, SF 작가는 뭔가를 의도할 겁니다. 작가가 뭔가를 의도했기 때문에, 소설 속에는 작가의 의도가 있습니다. 작가는 독자가 무한하게 소설을 해석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작가는 무한한 해석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작가에게는 의도가 있을 겁니다. 독자가 이런 의도를 인식한다면, 독자가 이런 의도를 이용해 소설을 해석한다면, 이건 올바른 독서일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인식한다고 해도,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스타십 트루퍼스>를 읽는 동안, 독자가 웃지 않는 것처럼,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자본주의 군사 정책에 완강하게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겠으나,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났으나,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에, 이건 올바른 독서일 겁니다. 하지만 <스타십 트루퍼스>는 쉬운 사례일 겁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나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이렇게 독자가 느낀다면?
그렉 이건은 오직 양자 역학 연구원들만 소설 <쿼런틴>을 읽기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렉 이건은 독자들이 어느 정도 자연 과학 소양을 갖춘다면 독자들이 <쿼런틴>을 어느 정도 이해할 거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이렇게 그렉 이건이 예상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드 SF 소설들은 오직 자연 과학 연구원들만을 위한 매체가 아닙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들을 앞지르지 못한다고 해도, 하드 SF 작가들은 이른바 대중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는 <쿼런틴>을 쉽게 읽지 못할지 모르고, 심지어 독자는 그렉 이건이 무엇을 말하기 원했는지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쿼런틴>은 어려운 SF 설정들을 이야기하나,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비일상적인 상상인가요? 여기에 얼마나 많은 허구들이 있나요? 이런 설정들이 물리학과 어느 정도 들어맞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허구인가요? 독자가 허구와 과학 지식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이게 올바른 독서인가요? 일반적으로 하드 SF 작가들은 독자가 하드 SF 소설을 100% 이해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어려운 SF 설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공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장르 공식들을 이용해 설정을 유추하고 보완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어려운 SF 설정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가 SF 공식들을 이해한다면, 독자는 공식들을 이용해 어려운 설정들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SF 공식에 익숙해지고 싶다면, 독자는 여러 SF 소설들을 읽어야 합니다. 장르는 단수(單數)가 아닙니다. 장르는 복수(複數)입니다. 여러 소설들이 특정한 유사성들과 공통점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이런 특정한 유사성들과 공통점들을 이용해 여러 소설들을 똑같은 장르로 묶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용해 <쿼런틴>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여러 SF 소설들을 읽고, 여러 SF 평론들을 읽고, 다른 SF 독자들과 토론하는 동안, 독자는 SF 공식들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장르 문학에는 공식들이 있고, 독자가 공식들을 안다면, 독자는 뭐라고 작가가 의도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독자는 SF 공식들을 이용해 (작가보다) 소설이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장르 소설을 읽는 방법들 중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여러 소설들, 여러 평론들, 여러 독자들을 참고하고, 연결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때 독자는 어느 정도 사이언스 픽션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자가 하드 SF 설정을 고작 절반만 이해한다고 해도,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읽고 경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독자가 사이언스 픽션을 이해한다면, 이건 독자가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을 참고하고 연결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가리킬 겁니다.
물론 이런 참고·연결·정리 과정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독자가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을 참고하고 연결하고 정리하는 동안, 독자는 또 다른 유사성들과 공통점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과 비(非)사이언스 픽션 사이에서 독자는 유사성들과 공통점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SF 소설과 중세 판타지 소설 사이에서 독자는 유사성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SF 소설과 미래학 서적 사이에서 독자는 유사성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SF 소설과 자연 과학 게임 사이에서 독자는 유사성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칼 세이건의 말>은 천문학 및 우주 생물학 서적입니다. 이건 SF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3류 우주 탐사 소설보다 <칼 세이건의 말>이 훨씬 훌륭한 SF 소설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어설픈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스팀펑크 판타지가 훨씬 훌륭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진부한 환경 아포칼립스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훨씬 훌륭한 생태적인 상상력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