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장르 논의와 보수적인 장르 물신주의 본문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이런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종종 사이언스 픽션은 여러 오해들에 휘말립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오해들은 대립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거나 어려운 자연 과학 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황당무계하고 유치합니다. 동시에 사이언스 픽션은 어려운 과학 논문입니다. 황당무계한 유치함 대 어려운 과학 논문. 두 가지는 대립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SF 소설은 현실 도피적인 수단이고, 어떤 사람에게 SF 소설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논문입니다. 분명히 SF 소설은 현실 도피적인 수단이 되거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텍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특징은 사이언스 픽션을 폭넓게 규정하지 못합니다. 비록 아무도 사이언스 픽션을 완전하게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언급해야 한다면,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훨씬 폭넓게 규정해야 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이용해 시대적인 격차를 드러내고 짜릿함(센스 오브 원더)을 연출합니다. 특히, 19세기 서구적인 근대화가 자본주의 체계와 산업 혁명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두 가지를 크게 강조합니다. 이런 특징은 사이언스 픽션을 폭넓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SF 소설들, 만화들, 연극들, 영화들, 게임들은 이런 특징에 들어맞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솔라리스>는 전형적인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여기에는 우주선, 외계 행성, 첨단 과학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근대 과학(서구적인 근대화)에 기반합니다. 산업 혁명, 과학 혁명, 서구적인 근대화가 우주선을 만들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들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20세기 인류 문명이 머나먼 외계 행성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솔라리스>에는 시대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플라즈마 바다가 인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솔라리스>에는 거대한 충격이 있습니다. <솔라리스>에는 서구적인 근대화와 시대적인 격차와 거대한 충격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독자들은 SF 소설들을 읽을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이런 특징에 들어맞는다고 해도, 이런 특징은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규정하지 못합니다. SF 세상에는 훨씬 전형적이지 않은 소설들, 만화들, 연극들, 영화들, 게임들이 있습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쓴 <방랑자의 시>는 사이언스 픽션보다 중세 판타지 같습니다. <방랑자의 시>는 SF 소설 모음집보다 판타지 소설 모음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언뜻) 이 단편 소설에는 근대 과학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 되나요? 어떤 독자들은 <방랑자의 시>가 SF 소설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게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속한다고 반박할 겁니다. 독자들은 무엇이 SF 소설인지 설전을 벌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SF 소설이 반드시 신나는 우주 모험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진지하게 성 차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방랑자의 시>가 SF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반드시 우주 함대 전투, 외계인 침략, 거대 괴수 난동, 초인 대전을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안나 러스는 SF 작가가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조안나 러스가 너무 전투적으로 성 해방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성 해방 운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조안나 러스가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한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독자들은 조안나 러스에게 우선 순위가 사이언스 픽션보다 성 해방 사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조안나 러스는 SF 작가보다 페미니즘 작가가 됩니다. 이런 평가가 옳은가요? 아무리 조안나 러스가 성 해방 사상을 '전투적으로' 주장한다고 해도, 조안나 러스가 SF 작가보다 페미니즘 작가가 되어야 하나요? 조안나 러스가 SF 작가가 되고 동시에 페미니즘 작가가 되지 못하나요? 성 해방 사상이 두드러진다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특징이 희미해지나요? 예전에 JoySF 회원들은 윤대녕이 쓴 <사슴벌레 여자>가 SF 소설인지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 <기시감>을 쓴 이재창 작가는 <사슴벌레 여자>가 SF 소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하드 SF 작가가 <사슴벌레 여자>를 SF 장르에 집어넣나요? 독자들이 이재창 작가를 믿어야 하나요?
이재창 작가가 <기시감>을 썼기 때문에, 이재창이 옳은가요? 만약 이런 사변 문학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국내에는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있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국내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비주류라고 생각하나, 사실 국내에는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국내 사이언스 픽션들은 그저 전형적인 하드 SF 소설들과 다를 뿐입니다. 만약 <사슴벌레 여자>가 SF 소설이라면,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SF 소설인가요? 문학 평론가들은 <멋진 신세계>가 SF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에는 서구적인 근대화, 시대적인 격차, (부정적인) 충격이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는 사이언스 픽션이 되기 위한 3종 세트를 갖추었습니다. 왜 이게 SF 소설이 되지 못하나요? 며칠 전에 8월 15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소설 <상흔>에는 둔클레오스테우스와 구식 잠수함과 뱀파이어와 마법 주문과 주문 프로그램 장치가 있습니다. 둔클레오스테우스와 뱀파이어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나요, 아니면 판타지에 속하나요? 사람들이 투구 같은 둔클레오스테우스 머리뼈 화석을 바라보는 동안, 사람들은 고생물학과 진화 이론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고생물학과 진화 이론은 근대 과학입니다. 반면, 뱀파이어는 전설과 민담에 속합니다.
둔클레오스테우스와 뱀파이어가 똑같은 설정에 기반할 수 있나요? 마법 주문과 주문 프로그램 장치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비디오 게임 <압주>에서 고대 신전이 판타지인가요? 거대한 기계 공장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백상아리가 고대 수호신인가요, 아니면 개조 생명체인가요? 대답들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어스텅>에서 <어스우드 프리저브> 모드는 일반적인 지구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배경 설정은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주장합니다. <어스우드 프리저브>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놀라운 과학 기술들을 이용해 지구 자연 생태계를 복원해야 합니다.
지구가 아닌 곳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고 생태 보호 구역을 조성합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서구적인 근대화, 시대적인 격차, 경이로운 충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 모드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언뜻 이 게임 모드는 그저 지구 자연 생태계를 묘사할 뿐인 것 같습니다. 외관에서 <심파크>와 <어스우드 프리저브>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토 에콜로지>는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을 보여줍니다. 바이오스피어 건물에는 생태계 관리 로봇(타이토 로봇)이 있습니다.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물과 생태계 관리 로봇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하지만 외관에서 <어스우드 프리저브>와 <심파크>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처럼, <타이토 에콜로지> 역시 <심파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타이토 에콜로지>와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심파크>와 비슷한다면, 두 생태계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독자들이 <방랑자의 시>를 이용해 설전을 벌이는 것처럼,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어스우드 프리저브>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박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설전을 벌일 겁니다.
솔직히 <어스우드 프리저브>와 <타이토 에콜로지>는 '무늬만 SF'입니다. 알맹이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무늬만 SF'라고 깠습니다. '무늬만 SF'인 사이언스 픽션들이 SF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하나요? <타이토 에콜로지>가 '무늬만 SF'라면, <니치>는 어떤가요? <니치>를 비롯해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새로운 진화 역사를 다룹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생물종을 조합하고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이런 생태계 게임들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새로운 생물종과 새로운 자연 생태계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나요?
<솔라리스>는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으나, <방랑자의 시>와 <어스우드 프리저브>와 <상흔>은 반박들과 토론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방랑자의 시>와 <어스우드 프리저브>와 <상흔> 이외에 SF 세상에는 수많은 반박들과 토론들과 논의들이 있습니다. 쥘 베른은 <해저 2만리>를 썼습니다. 소설 <해저 2만리>는 많은 스팀펑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쥘 베른은 자신이 스팀펑크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서구 사회에는 스팀펑크가 없었습니다. 이건 20세기 후반 용어입니다. 쥘 베른은 자신이 스팀펑크 작가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이 스팀펑크인 것처럼, <해저 2만리>는 스팀펑크가 됩니다. 이렇게 SF 소설보다 SF 장르는 먼저 나타납니다. SF 소설은 후천적으로 SF 장르에 들어갑니다. SF 소설이 후천적으로 SF 장르에 들어가기 때문에, <방랑자의 시>와 <사슴벌레 여자>와 <멋진 신세계>는 반박들과 논란들에 부딪혀야 합니다. 사람들이 토론하고 논의하고 합의하기 때문에, <어스우드 프리저브>와 <타이토 에콜로지>와 <니치>는 사이언스 픽션이 되거나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반박들과 논란들, 토론들, 논의들, 합의들입니다. 끊임없는 반박들과 논란들, 토론들, 논의들, 합의들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SF 팬들이 SF 장르를 규정할 때, SF 팬들은 끊임없는 반박들과 논란들, 토론들, 논의들, 합의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이것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SF 팬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진다고 믿는지 모릅니다. SF 팬들은 SF 장르라는 고정적인 것이 스스로 나타난다고 믿는지 모릅니다. 이건 물신주의입니다. SF 팬들은 SF 장르보다 장르 논의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SF 팬들이 장르 논의들보다 SF 장르를 바라본다면, SF 팬들이 SF 장르가 고정적이라고 간주한다면, 이건 물신주의가 될 겁니다.
정치 경제학 비판 서적 <자본론>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상품이 물신주의라고 말합니다. 상품이 생산 관계들을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상품을 볼 때, 사람들은 생산 관계보다 가격을 인식합니다. 상품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만들고 팔기 때문에, 상품은 상품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산 관계를 절대 생각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아이패드를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 없이, 아이패드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너무 우스꽝스러운 사고 방식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혼자 공장을 세웠나요?
스티브 잡스가 혼자 원자재들을 구했고, 혼자 수많은 아이패드들을 조립했고, 혼자 A/S 센터들을 운영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수많은 노동자들 없이, 스티브 잡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산 관계를 절대 생각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엄청난 가치(수많은 아이패드들)를 만들었음에도, 그들은 이득을 별로 얻지 못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스티브 잡스를 비롯해 자본가들은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착한 자본가와 나쁜 자본가 모두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착한 자본가가 착취를 싫어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자본가는 반드시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착취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엄청난 이득을 챙긴다고 해도, 우리는 이게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품을 볼 때, 우리는 생산 관계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가격만 봅니다. 우리가 생산 관계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가치가 가격으로 전환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가격을 떠드나, 가격은 공허합니다. 우리는 공허한 것들을 떠듭니다. 우리가 생산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허를 떠들어야 합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옥수수는 식량이 되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옥수수는 상품이 됩니다. 아무리 빈민들이 굶주린다고 해도, 빈민들에게는 돈이 없고, 빈민들은 절대 옥수수를 먹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게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품을 볼 때, 우리가 오직 가격만 머릿속에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회 구조와 생산 관계를 바꾼다면, 옥수수는 상품보다 식량이 될 겁니다. 굶주린 빈민들은 옥수수를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식량은 먹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절대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회 구조, 생산 관계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자본론>은 이게 상품 물신주의라고 지적합니다. <자본론>이 상품 물신주의를 지적하는 것처럼, SF 팬들은 장르 물신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상품이 '만들어지는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 SF 팬들은 어떻게 장르가 '만들어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SF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논의들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사회적인 관계들 속에서 우리가 논의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 속에서 SF 장르는 존재합니다. SF 팬들이 SF 장르를 규정하기 전에, SF 팬들은 사회 구조, 사회적인 관계들, 끊임없는 논의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SF 팬들이 SF 장르가 고정적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회 구조, 사회적인 관계들, 끊임없는 논의들은 사라집니다. SF 장르보다 사회 구조, 사회적인 관계들, 끊임없는 논의들이 훨씬 선천적임에도, SF 팬들은 오직 결과적인 것(SF 장르)만 중시합니다. SF 팬들은 오직 결과만 따집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보수적인 실증주의와 비슷합니다. 보수적인 실증주의는 오직 결과적인 것만 따집니다. 보수적인 실증주의는 원인, 과정, 흐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보수적인 실증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자유주의가 뚝 떨어졌다고 가정합니다.
오직 모든 것의 결과에서만 실증주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건 헛소리입니다. SF 팬들이 오직 결과적인 것만 따진다면, 보수적인 실증주의가 무식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헛소리인 것처럼, SF 팬들은 헛소리를 떠들어야 합니다. SF 팬들은 결과보다 원인, 과정, 흐름에 주목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