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떻게 <상흔>과 <서브노티카>가 한 묶음이 되는가 본문
[이질적인 해양 생태계와 생태적인 상상력은 스팀펑크 판타지와 스페이스 오페라를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소설 <상흔>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상흔>은 19세기 산업 문명에 기이한 과학 기술들을 덧붙입니다. 19세기 산업 문명에는 인공 지능 기계와 뱀파이어와 악마와 커다란 보행 로봇들이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They are billions> 역시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상흔>처럼, <They are billions>은 19세기 산업 문명에 기이한 과학 기술들을 덧붙입니다. 19세기 산업 문명에는 강화복과 어마어마한 좀비들과 커다란 보행 로봇들이 있습니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에는 모두 기이한 과학 실험들과 괴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화복을 입거나 보행 기계를 타고 괴물들에게 총알들을 쏟아붓습니다. 보행 기계가 증기 기관을 돌리고,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푹푹 뿜고, 쿵쿵거리며 걷고, 19세기 건물들 사이를 누비고, 괴물들에게 총알들을 쏟아붓기 때문에, <상흔>과 <They are billions>는 비슷합니다. SF 평론가가 두 가지를 함께 스팀펑크 판타지라고 분류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스팀펑크 판타지 안에서 <상흔>과 <They are billions>는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가 19세기 산업 문명과 강화복과 보행 기계를 말하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 <They are billions>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강화복, 기이한 실험과 괴물들, 보행 병기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에게 이런 것들은 낯선 소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너무 진부한 소재입니다. 인터넷 팬 픽션부터 전문적인 소설 작가까지, 인디 게임부터 AAA 타이틀 게임까지,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강화복, 기이한 실험과 괴물들, 보행 병기를 이야기합니다. <워해머 40K>에서 스페이스 마린 부대가 어마어마한 타이라니드 떼를 물리친다면, 이런 장면은 <They are billions>와 비슷할 겁니다. 오히려 이런 소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훨씬 잘 어울립니다. 아직 21세기 초반 과학 기술들은 보행 병기를 널리 퍼뜨리지 못했습니다.
보행 병기는 미래 전망입니다. <They are billions>처럼, 일반적으로 스팀펑크는 19세기에 기반하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머나먼 미래에 기반합니다. 보행 병기가 미래 전망이라면, 보행 병기는 스팀펑크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어떤 SF 팬들은 <워해머 40K>보다 <They are billions>가 흥미롭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머나먼 미래를 전망한다고 해도, 결국 스페이스 오페라는 근대 과학에 기반합니다.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가 머나먼 미래를 전망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새로운 역사, 새로운 문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근대 과학을 미래로 연장합니다. 미래 전망은 새로운 뭔가보다 근대 과학의 연장선입니다.
SF 장르는 근대 과학을 미래로 연장하고, 이런 연장 위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여러 SF 하위 장르들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머나먼 미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근대 과학에 기반합니다. 만약 여러 SF 하위 장르들이 근대 과학에 기반한다면, SF 장르를 논의하기 위해 SF 팬들은 어떻게 이런 근대 과학이 나타났는지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근대 과학이 나타났나요? 갑자기 하늘에서 근대 과학이 뚝 떨어졌나요? 그건 아닙니다. 근대 과학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17~19세기에서 서구 근대화가 발달하는 동안, 근대 과학 역시 발달했습니다.
갑자기 근대 과학은 뚝딱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근대 과학은 과도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근대 과학은 19세기 산업 문명을 거쳐야 했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에서 전형적인 근대 과학은 모습을 갖춥니다. 진화 이론은 이런 전형적인 근대 과학을 대표합니다. 물론 근대 과학이 속하는 서구 근대화는 절대 평화롭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서구 근대화가 발달하는 동안, 식민지 수탈은 서구 근대화를 크게 뒷받침합니다. 사실 서구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못했다면, 서구 문명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지 못했을 테고, 서구 근대화는 발달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서구 근대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면, 근대 과학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제임스 쿡, 알프레드 월리스, 찰스 다윈은 유명한 탐험가들이고 박물학자들입니다. 하지만 서구 문명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를 마음대로 들락거리지 못했다면, 알렉산더 폰 훔볼트, 제임스 쿡, 알프레드 월리스, 찰스 다윈은 탐험을 대표하지 못했을 겁니다. 탐험은 정복을 동반합니다. 근대 과학은 식민지 수탈을 동반합니다. 열대 밀림 파괴와 노예 착취는 서구 근대화를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식민지 수탈을 멈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오늘날,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폭력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고 해도, 이게 자본의 시초 축적이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어느 날 서구 백인 남자들이 자본주의를 뚝딱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수두룩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식민지 수탈을 떠들지 않습니다. 식민지에서 열대 밀림이 쓰러지든, 빈민들이 죽어나가든, 이건 문제가 아닙니다. 열대 밀림과 깜둥이 계집년들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짖습니다. 어느 날 자본주의가 뚝딱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은 근대 과학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근대 과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대 과학, 자본주의 시장 경제, 서구 근대화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 역시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서구 근대화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근대 과학만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 역시 19세기 과도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19세기 산업 과도기는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낳았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과학적인 사립 탐정 셜록 홈즈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서 코난 도일은 요정을 믿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브람 스토커와 교류했습니다. 브람 스토커는 <드라큐라>를 썼습니다.
혼란스러운 19세기 유럽 산업 도시는 가장 유명한 과학적인 탐정과 가장 유명한 고딕 호러 악마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허버트 웰즈는 각종 사이언티픽 로망스들과 판타지 소설들과 고딕 호러 소설들을 썼습니다. 아니, 아서 코난 도일과 브람 스토커와 허버트 웰즈 이전에,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이미 여기에는 근대 과학과 고딕 호러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19세기 산업 과도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스팀펑크는 19세기 산업 과도기를 들여다봅니다. 여러 SF 하위 장르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스팀펑크는 기원(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났는가?)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스팀펑크는 재미있습니다. SF 팬들이 이것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SF 팬들이 19세기 산업 도시와 거대 공장과 비행선과 마법사 연구소와 기계 골렘과 구식 잠수함과 인어와 바다 괴수를 바라보는 동안, SF 팬들은 왜 스팀펑크가 재미있는지 느낄 겁니다. 우리가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강화복과 기이한 실험과 괴물들, 보행 병기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스팀펑크 판타지는 훨씬 재미있습니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에는 19세기 산업 과도기와 괴물들과 구시대적인 첨단 과학들이 함께 있습니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은 비슷합니다. 스팀펑크 판타지 안에서 <상흔>과 <They are billions>은 함께 어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흔>이 반드시 스팀펑크 장르에 들어가야 하나요? <상흔>이 반드시 스팀펑크 창작물들과 어울려야 하나요? 어떤 SF 팬들은 <상흔>이 <They are billions>보다 <서브노티카>에 가깝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서브노티카>는 스팀펑크가 아닙니다. <서브노티카>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어떻게 <상흔>이 스팀펑크보다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울 수 있나요? 만약 어떤 SF 팬들이 <상흔>이 <They are billions>보다 <서브노티카>에 가깝다고 느낀다면, 이런 느낌이 이상한가요? 이런 느낌이 잘못이거나 오류인가요?
<상흔>과 <They are billions>가 스팀펑크 판타지이고, <서브노티카>가 스페이스 오페라임에도, 어떻게 <상흔>이 <They are billions>보다 <서브노티카>와 비슷해질 수 있나요? <서브노티카>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생태계 묘사, 외계 동물상입니다. <서브노티카>에는 여러 특징들이 있고, 그것들 중에서 외계 동물상은 대표적입니다. <서브노티카>는 생태계 묘사에 많은 비중을 할애합니다. 이런 외계 동물상은 뻥튀기와 과장과 짬뽕입니다. 피터 왓츠 같은 하드 SF 작가는 <서브노티카>가 상투적으로 외계 생태계를 과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외계 동물상이 그저 뻥튀기와 과장과 짬뽕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런 비유에는 여러 미덕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서브노티카>는 외계 동물상을 이용해 낯선 자연 생태계를 강조합니다. <서브노티카>에서 낯선 자연 생태계는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서브노티카>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해저 기지와 첨단 잠수정과 함께 여러 해양 동물들, 부레고기, 척추고기, 부유고기, 젤리가오리, 토끼가오리, 껴안고기, 모래 상어, 리프백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서브노티카>가 외계 바다 동물상을 강조하는 것처럼, <상흔> 역시 기이한 바다 동물상을 강조합니다. 소설 초반부터, <상흔>은 기이한 야생 심해 풍경을 묘사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기이한 해양 생태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상흔>은 꾸준히 자연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상흔>은 자연 생태계가 인류 문명을 둘러쌌다고 이야기합니다. 길들여진 사냥 오징어와 온순한 바다용과 공격적인 둔클레오스테우스와 전설적인 초거대 바다 괴수 아방을 비롯해 온갖 생물 다양성은 인류 문명을 둘러쌌습니다. 자연은 '환경'입니다. <상흔>은 왜 자연이 '환경'인지 보여줍니다. <상흔>은 오직 괴수 개체 하나에만 주목하지 않습니다. 전작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자연 생태계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육상 산업 도시에 치중했기 때문에, <페르디도 기차역>은 야생 환경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상흔>은 해상 선단 도시 아르마다에 치중합니다. 아르마다는 바다를 떠돌아야 하고, 바닷속에는 온갖 야생 동물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보다 <상흔>은 야생 생태계를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과 달리, <상흔>에서 '동물학자'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주연 등장인물입니다. 독자들이 <상흔>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독자들은 오직 19세기 산업 도시와 위험한 마법만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상흔>과 <서브노티카>는 똑같이 이질적인 해양 생태계를 강조합니다. <상흔>과 <서브노티카>에서 해양 야생 생태계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습니다. 심지어 <상흔>과 <서브노티카>에서 거대 바다 괴수는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비록 <상흔>이 스팀펑크 판타지이고 <서브노티카>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두 가지는 비슷하게 이질적인 해양 야생 생태계를 보여줍니다. 반면, <They are billions>가 이질적인 야생 생태계를 보여주나요? <They are billions>에서 생태계 묘사가 필수적인가요? 이 게임이 거대 괴수와 거대 괴수를 둘러싼 자연 환경을 이야기하나요?
<They are billions>가 살아있는 상호 작용과 생물 다양성을 이야기하나요? 아니, <They are billions>에서 야생 생태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좀비 아포칼립스입니다. <They are billions>는 거대 괴수와 야생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상흔>에서 사람들은 플레시오사우루스를 보고 감탄합니다. <서브노티카>에서 게임 주인공은 장엄하고 우아한 리프백과 함께 감동적으로 헤엄칩니다. 반면, <They are billions>에는 이런 장면이 없습니다. <상흔>과 <They are billions>가 똑같이 스팀펑크 판타지라고 해도, <상흔>과 달리, <They are billions>는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흔>은 <They are billions>보다 <서브노티카>에 가깝습니다. 스팀펑크 판타지가 기준이 된다면, <상흔>은 <They are billions>에 가깝겠으나,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가 기준이 된다면, <상흔>은 <서브노티카>에 가까울 겁니다. <상흔>과 <서브노티카>에는 똑같이 생태적인 상상력이 있고, 두 가지는 함께 생태학 SF 장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공식적인 표준 하위 장르가 아니나, 평론가들이 생태학 SF 장르를 만든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