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기시감>이 우주 탐사물이 될 수 있는가 본문
많은 사람들은 '중세 유럽 판타지'와 '던전 탐험'이 동일어라고 생각합니다. 던전 탐험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소설 <반지 원정대>가 카잣 둠, 모리아를 묘사했을 때, 이미 중세 유럽 판타지는 던전 탐험과 동일어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숱한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던전 탐험은 그저 일부에 불과하나, 많은 사람들은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던전 탐험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울티마 언더월드> 같은 중세 유럽 판타지는 던전 탐험입니다.
<울티마 언더월드>에서 던전 탐험은 일부가 아니라 시작이고 동시에 끝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던전 탐험이 필수적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에서 우주 항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사람들은 우주 항해를 상징적으로 간주합니다. 사실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은 우주 항해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변 소설들은 훨씬 그렇습니다. 주류 문학 작가들은 장르를 넘고 경계를 흐리나, 이런 사변 소설들은 우주로 날아가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쓰기 위해 주제 사라마구는 우주 항해를 도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주 항해는 로망입니다.
이재창 작가가 쓴 <기시감>에서 우주 탐사는 꽤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소설 주인공 석아찬은 게이트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납니다. 우주 항해 동안 게이트 우주선은 디비딥 디비딥~~♬ 외계인을 만나…지 않고 어떤 사고를 겪습니다. 게이트 우주선은 정체 불명의 외계 행성에 추락합니다. 그래서 <기시감>의 전반부는 우주 항해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외계 행성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기시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등장인물은 로가디아입니다. 로가디아는 우주선 인공 지능입니다. 전체적으로 <기시감>은 인공 지능에 상당한 공을 들입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인간과 비슷한 인공 지능이 존재하고, 왜 인공 지능에게 육체가 필요하고, 인공 지능이 무엇을 느끼는지 열심히 설명하고 묘사하고 표현합니다. 결국 <기시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우주 항해보다 인공 지능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시감>에서 우주 항해는 작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로가디아가 우주선 인공 지능이기 때문에, 우주 항해가 부차적이라고 해도, 우주 항해는 쉽게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습니다. 우주선 게이트 역시 계속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아무리 게이트가 외계 행성에 추락했다고 해도, 결국 석아찬은 우주선을 떠나지 않습니다. 독자가 우주 항해를 좋아한다면, <기시감>은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겁니다.
소설 <기시감>이 보여주는 것처럼, SF 소설에서 우주 항해가 부차적이라고 해도, 우주 항해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제대로 우주에 진출하고 못했고, 우주는 광대합니다. 당연히 숱한 SF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우주 항해가 최고의 로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SF 세상에서 <기시감>처럼 우주 항해 이야기들은 넘쳐납니다. SF 독자들이 구태여 일일이 세지 않는다고 해도, 잠시 동안 SF 독자들이 인터넷 서점을 둘러본다면, SF 독자들은 숱한 우주 항해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화성 개척 사업이 가속화한다면, 우주 항해 이야기들은 훨씬 늘어날지 모릅니다.
고장원님은 남한 SF 소설들이 우주 항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남한이 우주 항해라는 로망에 끼어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동안 남한은 식민지 수탈과 군사 독재를 겪었고, 그래서 남한 SF 작가들은 우주 항해보다 암울한 사회 구조를 묘사하고 싶어합니다. 고장원님은 이런 이유 때문에 남한 SF 소설들에서 우주 항해가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기시감>을 쓴 이재창 작가 역시 비슷하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과 러시아가 우주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미국 사이언스 픽션들과 유럽 사이언스 픽션들과 러시아 사이언스 픽션들은 우주 항해를 로망스럽게 묘사합니다.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SF 게임들 역시 그렇습니다. <엔들리스 스카이>와 <FTL: 패스터 댄 라이트> 같은 간단한 게임들부터 <엘리트> 시리즈, <이브 온라인>, <스타 시티즌> 같은 거대 게임들까지, 비디오 게임들은 우주 항해를 환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만약 SF 팬들이 <기시감>, <엔들리스 스카이>, <스타 시티즌> 같은 이야기들을 '우주 항해 (space voyage)'로 묶는다면, 이건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습니다. <기시감>과 <엔들리스 스카이>와 <스타 시티즌>은 똑같이 우주 항해 장르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기시감>이 인공 지능에 치중한다고 해도, <엔들리스 스카이>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해도, <스타 시티즌>이 작은 우주 전투기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기시감>, <엔들리스 스카이>, <스타 시티즌>은 똑같이 우주 항해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시감>, <엔들리스 스카이>, <스타 시티즌>은 똑같이 '우주 항해 장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SF 컨벤션에서 SF 독자들이 세 가지를 이용해 우주 항해 장르를 떠든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SF 컨벤션에서 SF 독자들은 얼마든지 우주 항해 장르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Worlds Without End 사이트가 우주 탐험(space exploration)을 말하는 것처럼, SF 독자들은 우주 항해보다 우주 탐사(space expedition)나 우주 여정(space journey)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재창 작가가 쓴 <기시감>은 장거리 우주선이 머나먼 외계로 떠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시감>은 우주 항해, 우주 탐사, 우주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SF 독자들이 <기시감>을 우주 항해나 우주 여정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건 틀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SF 독자들은 <기시감>이 기술적 특이점을 이야기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기시감>은 우주선 인공 지능 로가디아를 이용해 기술적 특이점을 고민합니다. 이 소설은 지성과 육체, 인식과 체험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독자들이 <기시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기시감>에서 인식론 문제와 기술적 특이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우주 탐사와 기술적 특이점이 함께 있습니다. <기시감>이 우주 탐사물과 기술적 특이점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SF 소설에게 반드시 오직 특정한 장르 하나에만 속하기 위한 의무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장르는 일정하거나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장르는 후천적으로 나타나거나 바뀌거나 넓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장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SF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점진적으로 장르를 형성합니다. SF 장르 안에는 비단 <기시감>만이 아니라 다른 수두룩한 비슷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SF 소설은 SF 장르를 넘고 다른 것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 이미 장르는 고정적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원형적인 SF 소설입니다. 이건 사이언티픽 로망스이고, 19세기 스팀펑크이고, 고전 바이오펑크입니다. 과학자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생각보다 너무 싱싱해> 같은 바이오펑크 소설과 가깝습니다. 동시에 <프랑켄슈타인>은 고딕 호러 소설입니다. 아무리 <프랑켄슈타인>이 고전 바이오펑크 소설이라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이 <드라큐라> 같은 고딕 호러 소설에 가깝다고 생각할 겁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프랑켄슈타인>이 <생각보다 너무 싱싱해>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옆동네 철수가 <프랑켄슈타인>이 <드라큐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옳은가요? 이웃집 영희가 옳은가요, 아니면 옆동네 철수가 옳은가요? 아니면 양쪽 모두 옳은가요? 무르 래퍼티가 쓴 <식스 웨이크>는 우주 탐사 소설이고 바이오펑크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는 우주 탐사와 바이오펑크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밀실 살인 추리가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가 <식스 웨이크>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분류가 틀리나요?
이웃집 영희는 <식스 웨이크>가 소설 <전갈의 아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식스 웨이크>와 <기시감>을 비교하고 우주선 인공 지능을 이야기합니다. <식스 웨이크>에서 복제 인간 문제가 가장 중점이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옳을 겁니다. 하지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말자 할머니가 <식스 웨이크>와 <기시감>을 함께 논의할 수 있나요? <기시감>에서 복제 인간 문제가 중점이 아님에도, 말자 할머니가 두 소설 속의 두 우주선 인공 지능을 함께 논의할 수 있나요? 이런 논의가 옳은가요? <식스 웨이크>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전갈의 아이>와 <기시감>과 함께 어울릴 수 있나요?
만약 옆동네 철수가 <식스 웨이크>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강철 도시>는 어떤가요? <강철 도시>가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들과 어울릴 수 있나요? 옆동네 철수가 로렌스 블록과 아이작 아시모프를 함께 비교한다면, 이런 비교가 틀리나요? 21세기 SF 독자들은 <프랑켄슈타인>을 이용해 유전자 조작 작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유전자 조작 작물을 알지 못했습니다. 21세기 SF 독자들이 <프랑켄슈타인>과 유전자 조작 작물들을 함께 언급한다면, 이게 옳은가요?
심지어 SF 작가들은 자신들이 장르를 만든다고 의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가 장르를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21세기 SF 독자들이 <프랑켄슈타인>과 유전자 조작 작물들을 함께 언급하는 것처럼,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후천적으로 장르를 만들거나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장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장르는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후천적으로 장르를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르를 다른 것들과 얼마든지 연결하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종합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팬들이 테라포밍 게임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을 연결한다고 해도, 이건 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테라포밍 마스> 같은 사이언스 픽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테라포밍 과정에서 자연 생태계 조성, 야생 보호 구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직접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고 생물 다양성을 배치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기후와 지형과 진화를 조절합니다. 이건 테라포밍인지 모릅니다. 사실 수많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테라포밍 게임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프롬 더스트> 같은 신 게임(god game)에 테라포밍 요소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틀리나요?
[이런 게임에는 이른바 '테라포밍'이 있습니다. 분명히 이런 게임은 장기적인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어떻게 기후 변화와 지형 변화가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프롬 더스트>가 신 게임인 것처럼, 여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작은 신이 됩니다. 그래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속의 테라포밍과 테라포밍 게임 속의 테라포밍은 다릅니다. 하지만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두 가지가 똑같이 거대한 환경 변화라고 감탄할지 모릅니다. 문학 비평 서적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에서 피에르 마슈레가 지적한 것처럼, 왜 우리가 원(동그라미)을 말하나요? 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원이라는 개념을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원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원은 선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이라는 개념을 후천적으로 정의했습니다. 고대 혈거인들이 원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원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건 다소 무모한 비유입니다. 인간이 수학 공식을 발견했는지, 아니면 수학이 원초적으로 존재하는지,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논의를 벌이는 중입니다. 피에르 마슈레는 인간이 원을 의도적으로 정의했다고 말하나, 이건 다소 성급한 비유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장르는 후천적입니다. 그래서 장르를 평가할 때, 독자들은 어떻게 SF 소설들이 나타났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SF 소설들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SF 소설들이 나타났는지 독자들은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