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노예 12년>, 문학과 소설과 허구 본문
솔로몬 노섭이 쓴 <노예 12년>은 문학입니다. <노예 12>년은 언어로 이루어진 책이고, 노예 제도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예 12년>을 문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은 문학과 소설이 동의어라고 생각합니다. 조지 엘리엇(메리 에반스)이 쓴 <미들마치>는 문학이고 동시에 소설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은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업튼 싱클레이어가 쓴 <정글>은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노예 12년>처럼,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킨>은 끔찍한 노예 제도를 생생하게 묘사했고, <킨> 역시 문학이고 소설입니다. 그래서 <노예 12년>이 문학이고 동시에 소설이 될 수 있나요? 비평가들이 어떤 문학을 소설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소설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솔로몬 노섭은 실존 인물입니다. 솔로몬 노섭은 정말 자유민 흑인이었고, 납치를 당했고, 노예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습니다. <노예 12년>은 허구보다 실화입니다. <미들마치>, <레 미제라블>, <정글>, <킨>과 달리, <노예 12년>은 소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노예 12년>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용어는 실화를 가리킵니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 상황을 직접 겪었고, 이걸 알리기 위해 솔로몬 노섭은 <노예 12년>을 썼습니다. 이건 창작물(픽션)보다 보고서, 기사, 수기(논픽션)에 가깝습니다. <노예 12년>은 업튼 싱클레이어가 쓴 <정글>보다 잭 런던이 쓴 <밑바닥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영국에서 잭 런던은 직접 빈민이 된 적이 있습니다. 잭 런던은 의도적으로 영국 빈민 생활을 겪습니다.
그리고 잭 런던은 얼마나 빈민들이 비참하고 끔찍하게 살아가는지 썼습니다. 그래서 <밑바닥 사람들>은 허구가 아니고 소설이 아닙니다. <밑바닥 사람들>은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밑바닥 사람들>이 언어로 이루어진 책이고, 구빈법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밑바닥 사람들>은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문학이 소설이 아닌 것처럼, <밑바닥 사람들>은 소설이 아닙니다. <야생의 부름>과 <강철 군화>는 허구이고, 양쪽은 문학이고 동시에 소설이나, <밑바닥 사람들>에는 허구가 없어요.
이건 <노예 12년>에 허구적인 장치가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미들마치>, <레 미제라블>, <정글>, <킨>처럼, 실화 <노예 12년>에는 허구적인 장치가 있습니다. 소설 <미들마치>는 언어를 이용해 등장인물들을 묘사합니다. 소설 <미들마치>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언어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은 언어가 아닙니다. <미들마치> 속에서 인간은 언어이나, 현실 속에서 인간은 살과 피와 뼈가 있는 유기체 동물입니다. 현실 속에서 의사는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도로시아 브룩의 피를 검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유능한 의사이고 비싼 첨단 의료 장비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절대 도로시아 브룩의 피를 검사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속에서 언어로서 도로시아 브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노예 12년>에서도 언어로서 화자 '나' 솔로몬 노섭은 존재합니다. 화자 '나'는 언어입니다. 독자는 솔로몬 노섭의 피를 검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독자가 비싼 의료 장비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솔로몬 노섭을 건강 검진하지 못합니다. 의료 장비는 언어(글자)를 건강 검진하지 못합니다. <미들마치>와 <노예 12년>에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단 이것만 아니라 <미들마치>와 <노예 12년>에는 여러 허구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들마치>와 <노예 12년>이 똑같이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도로시아 브룩과 솔로몬 노섭은 다릅니다. 오직 <미들마치> 속에서만 도로시아 브룩은 존재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어떻게 도로시아 브룩이 살아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조지 엘리엇이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도로시아 브룩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조지 엘리엇은 조지 엘리엇이 아닙니다. 조지 엘리엇은 필명이고, 조지 엘리엇의 진짜 이름은 메리 에반스입니다. 메리 에반스가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출판했기 때문에, 도로시아 브룩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로시아 브룩은 허구입니다.
반면, 현실 속에서 독자는 어떻게 솔로몬 노섭이 살아갔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1807년이나 1808년에 솔로몬 노섭은 태어났습니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언제 솔로몬 노섭이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솔로몬 노섭은 실존 인물입니다. 물론 <노예 12년>처럼, 역사 소설들 역시 실존 인물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웹소설 <뜨거운 동토>는 역사 소설입니다. <뜨거운 동토>에서 핀란드 사회 민주당 미나 실란패는 실존 인물입니다. 미나 실란패는 핀란드 사회 민주주의 노동자 동맹을 결성하고 의장이 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핀란드 사회 민주주의 노동자 동맹이 활약했는지 파악할 수 있고 어떻게 미나 실란패가 살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노예 12년>이 솔로몬 노섭이라는 실존 인물을 다루는 것처럼, <뜨거운 동토>는 미나 실란패라는 실존 인물을 다릅니다. 그래서 <노예 12년>과 <뜨거운 동토>가 똑같나요? <노예 12년>과 숱한 역사 소설들이 똑같나요? 그건 아닙니다. 솔로몬 노섭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을 썼습니다. 역사 소설 작가들은 직접 역사적인 사건들을 겪지 않습니다. 아무리 역사 소설 작가들이 실존 인물들을 묘사한다고 해도, 역사 소설 작가들은 직접 실존 인물들이 되지 않습니다. 소설 <뜨거운 동토> 작가 샐러맨더는 미나 실란패가 아닙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샐러맨더 작가는 핀란드 사회 민주당을 찾아간 적이 없을 겁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핀란드 사회 민주당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뜨거운 동토>가 핀란드 사회 민주당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허구입니다. 현실 속의 1905년 핀란드 사회 민주당과 소설 속의 1905년 핀란드 사회 민주당은 다릅니다. 반면, 현실 속의 솔로몬 노섭과 <노예 12년> 속의 솔로몬 노섭은 아주 비슷합니다. 현실 속의 솔로몬 노섭과 <노예 12년> 속의 솔로몬 노섭은 동일 인물에 거의 가깝습니다. 그래서 <노예 12년>은 소설이 아니고 허구가 아닙니다. 문학 비평가는 <노예 12년>이 <미들마치> 같은 허구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스티브 맥퀸은 영화 <노예 12년>을 촬영했습니다. 실화 <노예 12년>이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노예 12년> 역시 허구가 아닌가요? 영화 <노예 12년>이 영화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가요? 그건 아닙니다. 영화 <노예 12년>은 자전적인 창작물이 아닙니다. 스티븐 맥퀸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어떤 다큐멘터리 형식을 느낀다고 해도,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와 <노예 12년>은 다릅니다. 이 영화는 자신이 실화에 기반한다고 말하나, 실화에 기반하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는 다릅니다. 서적 <노예 12년>과 영화 <노예 12년>은 다른 속성을 보여줍니다. 서적 <노예 12년>은 소설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나, 영화 <노예 12년>은 허구입니다.
하지만 영화 <노예 12년>이 허구이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서적 <노예 12년> 역시 허구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만약 관객들이 솔로몬 노섭이 실존 인물이라고 알지 못한다면, 관객들은 영화 <노예 12년>이 허구인 것처럼 서적 <노예 12년>이 허구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 자체로서 서적 <노예 12년>은 소설과 비슷합니다. 자신이 겪은 끔찍한 상황을 이야기하기 위해 솔로몬 노섭은 소설 형식과 비슷하게 <노예 12년>을 썼습니다. 만약 독자가 솔로몬 노섭이 실존 인물이라고 알지 못한다면, 독자는 서적 <노예 12년>이 소설(허구)이라고 믿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소설 형식입니다. 셋째 문단이 지적하는 것처럼, <미들마치>와 <노예 12년>은 비슷하게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실존 인물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서적 <노예 12년>이 소설이고 허구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사실 소설을 읽는 것처럼, 많은 독자들은 <노예 12년>을 읽습니다. 독자가 <노예 12년>이 소설(허구)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독서 감상은 별로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서적 <노예 12년>이 허구이든 실화이든, <노예 12년>은 문학적인 장치들을 이용해 진리, 선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노예 12년>처럼, 수많은 소설들은 문학적인 장치들을 이용해 진리, 선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노예 12년>과 수많은 소설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엄중하고 치밀한 역사학자는 <노예 12년>이 실화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예 12년>이 허구이든 실화이든, 일반적인 독자에게 이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서적 <노예 12년>은 소설이 아니나, 독자는 이걸 소설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노예 12년>을 소설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독자가 소설 <킨>을 읽고 분노를 느끼는 것처럼, 독자는 솔로몬 노섭에게 공감하고 노예 제도를 향해 격렬한 분통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소설과 실화가 뒤섞일 수 있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어떨까요? 물론 사이언스 픽션은 '사실인 척'하지 못합니다.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사실인 척하나, 독자가 미지의 존재를 마주치는 순간, 독자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간주할 겁니다. <노예 12년>과 <킨>이 비슷하다고 해도, <킨>이 타임 슬립을 묘사하기 때문에, 독자는 <킨>이 허구라고 훨씬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셜록 홈즈가 외계인들을 만났다면, 아무리 셜로키언들이 열정적인 덕후들이라고 해도, 셜로키언들은 존 왓슨이 실존 인물이라고 우기지 못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이것이 속하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현실에는 도로시아 브룩이라는 개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도로시아 브룩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범주에 속하고, 현실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있습니다. 소설 <킨>에서 소설 주인공은 호모 사피엔스이고 동시에 시간 여행자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시간 여행자라는 범주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들마치>와 <킨>이 똑같이 소설이라고 해도, <킨>은 사변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 역시 현실적인 범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허버트 웰즈가 쓴 소설 <우주 전쟁>은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화성인은 외계인이라는 범주에 속합니다. 현실에는 외계인이 없고, 그래서 독자는 <우주 전쟁>이 허구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화성인에게는 비단 외계인이라는 범주만 아니라 '침략자라는 범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는 침략자라는 범주가 있습니다. 유럽 강대국들이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할 때, 유럽은 잔인하고 끔찍한 침략자입니다. 유럽 강대국들이 열대 밀림을 파괴하고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늘어놓을 때, 붉은 화성 식물이 녹색 지구 식물을 파괴하는 것처럼, 이건 생태계 교란이 됩니다.
현실 속에는 외계 식생이 없으나, 현실 속에는 분명히 생태계 교란이 있습니다. 붉은 화성 식물은 생태계 교란이라는 현실적인 범주에 속합니다. 적어도 붉은 화성 식물과 현실적인 범주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만약 사변 소설과 현실적인 범주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면, 독자가 사변 소설이 100% 앱솔루틀리하게 허구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독자가 주류 문학보다 사변 소설이 훨씬 허구라고 완전하게 장담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소설과 실화가 뒤섞일 수 있는 것처럼, 사변 소설은 허구로 완전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