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이언스 픽션과 소격 효과 본문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소설 주인공은 이사벨라 스완입니다. 이사벨라 스완은 이야기를 이끕니다. 동시에 이사벨라 스완은 소설 화자입니다. 벨라는 소설 주인공이고 동시에 소설 화자 '나'로서 이야기를 이끕니다. 그래서 독자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읽는 동안, 독자는 이사벨라 스완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합니다. 적어도 독자는 이사벨라 스완과 가상의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이사벨라의 시선을 이용해 소설 속의 세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벨라는 <트와일라잇> 속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한 창문입니다. 독자가 이사벨라라는 창문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트와일라잇> 속의 세계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건 독자가 반드시 이사벨라 스완에게 매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독자가 1인칭 시점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화자 '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 화자 '나'를 비판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치숙> 같은 풍자 소설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독자는 이사벨라 스완이 편파적이거나 어리숙하거나 무지하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가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읽는 동안, 독자는 이사벨라 스완의 시점을 이용해야 합니다. 이사벨라 스완의 시점은 소설 속의 세계를 구성합니다.
독자가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읽는 동안, 독자는 계속 벨라의 시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사벨라가 에드워드 컬렌이 이 세상 최고의 훈남이라고 묘사할 때, 이건 너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견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에드워드 컬렌은 별로 멋지지 않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에드워드 컬렌은 꽤나 평범한지 모릅니다. 에드워드가 별로 멋지지 않음에도, 이사벨라가 콩깍지를 썼기 때문에, 이사벨라는 에드워드가 이 세상 최고의 훈남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사랑은 장님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단점들을 덮을 수 있고 아무 조건 없이 뭔가를 주고 싶어합니다.
에드워드 컬렌이 별로 멋지지 않다고 해도, 사랑은 그걸 덮고 에드워드를 이 세상 최고의 훈남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드워드 컬렌이 이사벨라 스완을 거부한다고 해도, 아무 조건 없이 벨라는 찬사를 바치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사벨라가 묘사한 것과 달리, 에드워드 컬렌은 지상 최고의 훈남이 아닌지 모릅니다. "아이고, 이 아가씨는 정말 콩깍지를 단단히 뒤집어썼어." 이렇게 독자는 이사벨라 스완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에드워드 컬렌이 별로 멋지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사실 에드워드 컬렌은 흡혈귀이고, 그래서 어떤 등장인물들은 에드워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흡혈귀 에드워드 컬렌과 달리, 제이콥 블랙은 늑대인간입니다. 흡혈귀 에드워드 컬렌은 언데드이고, 피를 마셔야 하고, 자연의 섭리를 거부합니다. 반면, 늑대인간 제이콥 블랙은 아주 강력한 생명체이고, 흡혈귀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웅장한 대자연에 속합니다. 당연히 제이콥은 에드워드를 꽤나 싫어합니다. 만약 컬렌 가족이 살인을 금기시하지 않았다면, 제이콥 블랙을 비롯해 늑대인간들은 컬렌 가족을 처치했을지 모릅니다. 컬렌 가족은 절대 살인하지 않습니다. 에드워드 컬렌을 비롯해 컬렌 가족은 오직 동물들만 죽입니다. 오히려 다른 흡혈귀들이 사람들을 해칠 때, 컬렌 가족은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컬렌 가족 역시 인간의 피를 마시고 싶어하나, 그들은 살인이 죄악이라고 간주하고 욕구를 참습니다. 그래서 제이콥 블랙을 비롯해 늑대인간들 역시 컬렌 가족에게 덤비지 않습니다. 이사벨라 스완이 위기에 빠질 때, 에드워드 컬렌과 제이콥 블랙은 함께 이사벨라를 지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이콥은 에드워드를 절대 좋게 봐주지 않습니다.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잠시 동안 제이콥 블랙이 소설 화자 '나'가 된다고 해도, 소설 화자로서 제이콥 블랙은 에드워드 컬렌을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제이콥이 에드워드를 인정한다고 해도, 제이콥은 툴툴거립니다.
소설 화자가 바뀔 때,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사벨라 스완과 제이콥 블랙은 다르게 소설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사벨라에게 에드워드는 지상 최고의 훈남이고, 소설 분위기 역시 화사하고 애잔하고 두근거립니다. 벨라가 '약혼'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벨라는 아주 좋아 죽습니다. 반면, 제이콥 블랙이 소설 화자가 될 때, 소설 분위기는 다소 시건방지고 투덜거리고 불만을 품습니다. 흡혈귀 컬렌 가족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제이콥 블랙은 성깔을 참는 중이고, 그래서 소설 화자 제이콥 블랙은 화사하고 두근거리는 분위기를 연출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소설 화자는 소설 분위기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소설이 글자들을 이용해 추상적인 요소들을 서술하기 때문에, 소설 화자 시점은 중요합니다. 소설의 가장 커다란 특징들 중에서 하나는 소설이 추상적인 것을 서술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상, 철학, 세계관, 감성, 설명(개념화), 비유 같은 것들은 추상적입니다. 영화 같은 영상 매체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 같은 장마' 같은 비유와 언어 유희를 절대 연출하지 못합니다. 감성은 시각적이지 않고, 영상 매체는 감성을 절대 서술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할 겁니다. 문제는 '생각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소설은 언어를 이용하는 예술입니다.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은 언어를 훨씬 많이 이용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인간,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존재를 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독자는 만화, 영화, 연극, 게임이 가볍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술 영화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해도, 영상 매체로서 예술 영화는 추상적인 요소들을 직접 서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예술 영화가 황금 종려상과 황금 사자상과 황금 곰상을 비롯해 수두룩한 수상 내역들을 자랑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예술 영화보다 평범한 10대 연애 소설이 훨씬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독자가 (밀도가 높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 화자와 밀접한 사회 관계를 맺어야 하고, 소설 분위기는 독자에게 영향을 미칠 겁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 화자에게 너무 감정을 깊이 이입한다면, 독자는 소설 화자와 거리를 벌리지 못하고 소설을 너무 깊이 믿을 겁니다. 물론 영화가 엉성한 밀도를 보여준다고 해도, 영화 역시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합니다. 관객들이 영화 <어벤져스> 같은 초인 영웅 이야기를 본다면, 관객들은 일반 시민보다 초인 영웅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관객들은 초인 영웅의 시점으로 세계를 바라볼 겁니다. 아무리 <어벤져스>가 일반 시민을 고려한다고 해도, 영화 속에서 초인 영웅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관객들은 초인 영웅의 시점을 이용할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창작물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창작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창작물 속에서 사람들은 등장인물들과 사회 관계들을 맺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만약 등장인물들이 초인 영웅들이라면, 사람들은 초인 영웅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초인 영웅이 될지 모릅니다. 만약 등장인물들이 훈녀들과 훈남들이라면, 사람들은 훈녀들 및 훈남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멋진 외모들을 뽐낼지 모릅니다. 연애 만화가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독자는 이 세상에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이건 편견을 조장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매체를 소비할 때, 매체가 어떤 특정한 것을 강조한다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어떤 특정한 것이 가득하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회에서 숱한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남한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믿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가 폭력적이라고 의심하지 못합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이 계속 가부장 문화가 옳다고 주입하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총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오직 워마드를 물어뜯을 뿐입니다. 워마드보다 가부장 문화가 훨씬 폭력적임에도, 사람들은 강자의 폭력에 관대하고 약자의 폭력에 지랄염병합니다. 창작물 속에서 사람들이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기 때문에, 창작물 역시 편견을 조장할지 모릅니다.
연애 만화에서 훈녀들과 훈남들이 외모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면, 독자는 이 세상에서 외모가 가장 커다란 자산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연애 만화가 계속 외모를 강조하기 때문에, 독자는 그게 정말 중요하다고 믿을지 모릅니다. 이건 창작물이 당장 독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창작물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습니다. 연애 만화에서 훈녀들과 훈남들이 외모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이건 수많은 해석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독자가 연애 만화를 보는 동안, 독자는 내용을 읽지 않고 오직 그림들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에는 소재, 주제, 세계관, 등장인물들, 시점, 연출 같은 많은 허구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허구적인 장치들이 많기 때문에, 모든 독자는 똑같은 해석을 내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연애 만화는 당장 만화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창작물 속에서 사람들이 여러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기 때문에,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에게 너무 감정을 이입할지 모릅니다. 연애 만화에서 부르주아 주인공이 프롤레타리아 등장인물을 억압한다고 해도, 프롤레타리아 독자는 프롤레타리아 등장인물보다 부르주아 주인공을 응원할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연애 만화 독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집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자신이 옳다고 거짓말들을 떠듭니다. 사람들은 거짓말들을 믿고 세뇌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계가 반드시 옳다고 숭배합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광신도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연애 만화를 본다면, 연애 만화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이 깽판을 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재벌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재벌 남자 주인공을 두둔할 겁니다. 그래서 웹툰 <치즈인더트랩>은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만화 독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재벌 남자 주인공이 깽판을 친다고 해도, 만화 독자들은 재벌 남자 주인공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가 열심히 세뇌들을 퍼뜨리기 때문에, 연애 만화가 재벌 남자의 시점으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만화 독자들은 오직 자본주의에만 몰두합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연극 작가는 이게 엉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른바 소격 효과(Verfremdungseffect)를 도입했고 관객들이 연극 무대가 허구라고 인식하기 원했습니다. 만약 만화 <치즈인더트랩>에서 갑자기 재벌 남자 주인공 유정이 "만화 독자 여러분, 만약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만화 독자들은 깜짝 놀라고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겁니다.
창작물 속에서 등장인물이 이른바 제4의 벽을 깰 때, 사람들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실험적인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격 효과가 너무 작위적이라고 간주하고 소격 효과를 싫어할 겁니다. 소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소설 작가는 독자들이 소설 속에 푹 빠지기 원할 겁니다. 소설 작가는 (소설 밖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독자가 새롭게 현실을 바라보기 원할 겁니다. 많은 창작물들은 제4의 벽을 깨지 않습니다. 많은 창작물들은 사람들이 창작물 속으로 빠지기 바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창작물 속에 빠진다면, 이건 위험할지 모릅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좋은 방법이 있나요? 창작물이 제4의 벽을 깨뜨리지 않고 동시에 현실을 뒤집을 수 있나요? 물론 예외들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예외 사례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구태여 소격 효과를 동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제4의 벽을 깰 수 있습니다. 사실 사이언스 픽션이 구태여 소격 효과를 의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소격 효과가 낯선 세계를 만들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스스로 낯선 세계를 만듭니다. 이미 사이언스 픽션은 낯선 세계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불편하다고 여기거나 사이언스 픽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타임 머신>이나 <방랑자의 시> 같은 SF 소설들을 읽는다면, 독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절대 당연하지 않다고 깨달을 겁니다.
문제는 사이언스 픽션 역시 지배적인 관념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세상을 낯설게 뒤집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히려 사이언스 픽션은 낯선 세상을 이용해 지배적인 관념을 옹호할지 모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소설 <파피용>을 보세요. 이 소설은 우주선 사회라는 낯선 세계를 제시하나, 이 소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자본주의를 옹호합니다. 낯선 우주선 사회가 나타남에도, 소설 <파피용>은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지배 계급 이데올로기를 신나게 따라갑니다.
이미 사이언스 픽션이 낯선 세계를 전제한다고 해도, 소설 <파피용>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지배적인 관념을 맹목적으로 숭배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나, 이런 잠재력은 절대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독자가 사이언스 픽션을 근본적으로 비평하고 싶다면, 독자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사이언스 픽션을 물들이고 오염시킬 때, SF 비평은 그걸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