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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김탁환의 쉐이크>와 작가의 직접 경험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김탁환의 쉐이크>와 작가의 직접 경험

OneTiger 2019. 5. 23. 18:07

[SF 작가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직접 겪지 못합니다. 작가가 외계 버섯 생태계를 상상하지 말아야 하나요?]

 

 

<김탁환의 쉐이크>는 소설 창작 안내 서적입니다. <김탁환의 쉐이크>에서 작가 김탁환은 어떻게 작가가 소설을 쓰는지 소개합니다. 김탁환은 소설 창작 과정을 크게 네 부분들로 나눕니다. 첫째 부분에서 김탁환은 소설과 이야기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소설을 쓰기 전에, 작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느껴야 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판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자료들을 모르고, 답사를 떠나고, 초고를 준비합니다. 둘째 부분에서 작가는 아직 소설을 제대로 쓰지 않으나, 본격적인 소설 쓰기처럼 이런 준비 과정은 중요합니다.

 

준비 과정이 어긋난다면, 작가는 돌이키지 못하는 강을 건널지 모릅니다. 심지어 작가는 소설을 통째로 고치거나 아예 버려야 할지 모릅니다. 좋은 준비 과정 없이, 좋은 소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셋째 부분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셋째 부분이 소설 창작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둘째 과정(준비 과정)이 어긋난다면, 셋째 과정(집필 과정) 역시 어긋날 겁니다. 넷째 과정은 퇴고입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퇴고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농담했으나, 어쩌면 집필보다 퇴고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특히, 저처럼 수두룩한 오타들을 내는 사람에게 퇴고는 정말 중요해요. 아이고….)

 

 

김탁환은 소설 창작 과정을 네 부분들로 나누었고, 네 부분 모두 중요합니다. 흔히 작가 지망생들은 둘째 부분(준비)과 넷째 부분(퇴고)을 간과할지 모르나, 이건 뼈저린 실패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김탁환은 자신이 그런 실패를 겪었다고 말합니다. 김탁환 작가가 소설 <나, 황진이>를 썼을 때, 김탁환 작가는 숱한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김탁환은 16세기에 시를 쓰기 위한 필독 도서들, 16세기에서 유행하는 시풍, 개성 중심의 노래와 춤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이후, 김탁환은 한 문장 한 문장에 정성을 쏟았고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결과가 무엇이었을까요? 김탁환은 소설을 몇몇 여자 대학생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비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여자는 느끼고 말하지 않아요. 이건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자들은 아마 이럴 거야, 추측한 문장들이에요." 네,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김탁환 작가는 초고의 70%를 버렸고 크게 절망했습니다. 반년 동안 김탁환은 처음부터 소설을 다시 써야 했어요. 김탁환 작가는 자신이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소설을 쉽게 쓰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작가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창작해야 하나, 이건 절대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비단 김탁환 이외에 많은 작가들은 비슷한 고초들을 겪을 겁니다. 소설 <조이 이야기>를 쓴 이후, 존 스칼지는 자신이 10대 소녀 말투를 쉽게 흉내내지 못했다고 토로했어요.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김탁환 작가는 잘못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김탁환 작가는 몇몇 여대생에게 <나, 황진이> 초고를 보여줬습니다. 황진이는 조선 시대 여자입니다. 여자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합니다. 황진이는 과거(조선 시대) 여자이고, 여자 대학생들은 현재(20~21세기)를 살아갑니다.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들이 똑같이 여자라고 해도,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들은 크게 다릅니다. 황진이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황진이는 여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노동하거나 투표하거나 가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황진이는 여자들이 기계를 이용해 중노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거대한 기중기를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으나, 황진이는 이걸 알지 못했습니다. 21세기 남한에서 메갈리아는 한남충들 자지를 잘라야 한다고 외치나, 황진이는 이런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자 대학생들은 페미니즘 시위를 볼 수 있고, 메갈리아 사태를 겪을 수 있고, 성 소수자 행진을 지지할 수 있고, 시민 배당 정책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는 시민 배당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장애인 단체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주장할 때, 여자 대학생들은 그걸 응원할 수 있습니다. 여자 대학생들은 임신 중절 권리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들은 다릅니다. 따라서 여자 대학생들은 황진이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여자 대학생들은 그저 20세기 이후 여자들을 말할 수 있을 뿐인지 모릅니다. 20세기 남자가 황진이를 이야기하든, 20세기 여자가 황진이를 이야기하든, 양쪽 모두 틀릴지 모릅니다. 20세기 인간은 16세기를 살아가지 못하고, 따라서 누가 이야기하든, 상상력은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만약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가 19세기 역사 소설을 쓰고 19세기 유럽 하층 노동자를 창작한다면,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가 19세기 유럽 하층 노동자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가 19세기 노동자를 쓰고 싶다면,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는 어느 정도 19세기 유럽 사회를 파악해야 합니다.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와 19세기 유럽 하층 노동자가 똑같이 고되게 노동한다고 해도,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가 19세기 하층 노동자를 표현할 때,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는 많이 틀릴지 모릅니다.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19세기 하층 노동자에게 투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가 19세기 유럽 사회를 공부하지 않는다면, 21세기 비정규직 노동자는 19세기 하층 노동자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겁니다. 정체성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해도,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부분적인 정체성은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여자입니다. 여자라는 정체성은 아주 커다란 공통점입니다. 하지만 그건 전부가 아닙니다. 모든 시대에서 여자는 보편적인 단일 개체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회들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이 고통들을 받는다고 해도, 여자들은 서로 다르게 고통들을 겪었고 서로 다르게 저항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아예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어떤 여자들은 집단적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 주부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인간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옳습니다.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은 모두 여자이고, 아기를 낳을 수 있고, 가부장 문화 속에서 고통을 겪고, 무엇보다 유기체 동물로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 대학생은 시민 배당을 지지할 수 있으나, 황진이는 시민 배당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건 꽤나 커다란 차이입니다. 만약 모든 시대에서 모든 여자가 황진이와 다르지 않다면, 성 해방 운동은 우울한 미래를 맞이할 겁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못되처먹은 가부장 문화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은 희망을 품을 수 있어요. 생물종으로서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이 똑같다고 해도, 황진이와 여자 대학생이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성 해방 운동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김탁환은 자신이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무리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작가들은 남자 등장인물이 오직 성별만 바꾸고 얼마든지 여자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과 소설 <사소한 정의>는 성별을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국 황제는 여자이거나 남자인지 모릅니다. 함선 장교는 여자이거나 남자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모두 '그녀들'입니다. 여자 대학생이 소설 <사소한 정의>를 읽는 동안, 여자 대학생은 "이건 아니야! 분명히 함선 장교는 남자야!"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에서 엄마 안얀우는 아빠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엄마 안얀우가 아빠 표범이 된다면, 안얀우가 여자(인간)인가요, 아니면 수컷(표범)인가요? 존 발리가 쓴 단편 소설들에서 사람들은 신체 개조 기술을 이용해 성별을 바꿉니다. 형이 언니가 된다고 해도, 남자처럼 언니가 말해야 하나요? 소설 속에서 형이 언니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소설 작가가 언니를 형이라고 간주해야 하나요? 아니, 구태여 우리가 언니와 형을 구분해야 하나요? 왜 우리가 성별을 고정해야 하나요? 어쩌면 16세기 황진이는 (이른바) 남자다운 여자였는지 모릅니다. 소설 <나, 황진이>에서 황진이가 다소 '남성적'이라고 해도, 왜 작가가 황진이를 여성적으로 표현해야 하나요?

 

 

왜 남자 작가가 여자 등장인물을 무조건 여성적으로 써야 하나요? 여자 등장인물을 쓰기 위해 남자 작가가 반드시 여자에게 퇴고를 맡겨야 하나요? 남자 작가가 여자 등장인물을 쓰지 못하나요? 남자 작가가 여자가 되지 않는다면, 남자 작가가 여자 등장인물을 쓰지 못하나요? 남자 작가가 오직 자신이 겪은 남성적인 것들만 써야 하나요? 작가에게 이런 제약, 정체성이라는 제약이 있어야 하나요? 소설 작가가 오직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정체성에만 의존해야 하나요? 흔히 사람들은 작가가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작가가 오직 자신이 겪은 것만을 써야 하나요? 이언 매큐언은 자신이 여행을 정말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행하기 위해 작가가 여러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여행을 싫어한다면, 작가는 답사를 떠나지 못할 테고, 이건 둘째 부분(준비 과정)에 충실하지 못할 겁니다. 어떤 장소를 쓰기 위해 작가가 무조건 거기를 방문해야 하나요?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마르코 폴로와 쥘 베른을 비롯해 다양한 작가들을 언급했습니다. 쥘 베른은 <해저 2만리>를 썼으나, 쥘 베른은 절대 아틀란티스를 방문한 적이 없을 겁니다.

 

 

쥘 베른은 심해로 내려간 적이 없을 겁니다. 뭐, 누가 압니까. 사실 쥘 베른은 프랑스 사람으로 가장한 아틀란티스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확실하지 않고, 우리는 쥘 베른이 19세기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상류층 백인 남자로서 쥘 베른은 아틀란티스를 써야 했습니다. 작가는 오직 자신이 겪은 것만을 쓰지 않습니다. 작가가 오직 자신이 겪은 것만 써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SF 소설들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아예 이 세상에는 SF 소설들이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작가가 고증을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증은 중요합니다.

 

작가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탐사하지 못하나, 작가가 SF 소설을 쓸 때, 적어도 작가는 어떻게 지구 자연 생태계에서 담자균류가 순환하고 번성하고 진화하는지 조사해야 할 겁니다. 작가가 에른스트 헤켈이 쓴 <자연의 예술적 형상들>을 읽거나 우주 생물학자들을 취재한다면, 이건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자연의 예술적 형상들>을 읽거나 우주 생물학자들을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도, 결국 작가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직접 탐사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겪지 못하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상상해야 합니다. 작가는 기이하고 커다란 외계 버섯을 상상해야 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여행하지 않은 곳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어요. 물론 이런 상상력은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현실 없이, 상상력은 없습니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우리는 상상력에 절대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 지구 자연 생태계가 있기 때문에, 작가는 외계 버섯 생태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작물에는 두 가지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창작물에는 현실 반영이 있고 허구와 상상력이 있습니다. 이건 창작물의 생산 조건입니다. 작가는 두 가지 생산 조건을 모두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작가는 편파적인 이분법으로 두 생산 조건을 나누기보다 두 생산 조건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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