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생체 실험 소설들 본문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러니까 미치광이 과학자는 SF 소설 속에서 흔한 소재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무조건 미친 과학자라고 번역한다면, 그건 오류일 겁니다. 종종 미친 과학자보다 사악한 과학가 더 어울리는 번역 같습니다. 아니면 외골수에 빠진 과학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 방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조인간의 이름이라고 오해하는, 그 이름으로 불리는 인물이죠.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프랑켄슈타인은 너무 한 가지 길에 빠졌고, 그래서 주변을 둘러볼 수 없었죠. 그런 외골수는 결국 프랑켄슈타인을 파멸로 이끌었고요.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를 최초의 본격적인 SF 소설가라고 평가하고, 이는 최초의 본격적인 SF 소설이 미치광이 과학자를 소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시도한 과학 실험 분야는 다른 분야가 아니라 생체 실험이었습니다.
사실 19세기 SF 소설에서 생체 실험 기술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19세기 SF 소설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만큼 유명한 과학자가 있죠. 바로 모로 박사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들었다면, 모로는 반인반수를 만들었죠. 모로는 동물들을 자르고, 꺾고, 베고, 붙였습니다. 소설 화자는 그 과정이 정말 끔찍했다고 표현합니다. 사방에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피와 살점과 부러진 뼈들이 널린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군요. 허버트 웰즈는 유전자 조작 기술을 알지 못했고, 모로 박사 역시 유전자를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구시대적으로 해부용 칼을 들이댔을 뿐이죠.
메리 셸리는 어떻게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드는지 간접적으로 묘사했으나, 허버트 웰즈는 좀 더 고어하게 표현합니다. 솔직히 인조인간을 만드는 과정은 으스스하고, 동물을 개조하는 과정은 끔찍하죠.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고어입니다. 양쪽 모두 부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고요. 허버트 웰즈는 이 소설만 아니라 <투명 인간>에서 역시 생체 실험을 이야기합니다. 본격적인 실험 대상은 인간이고, 프랑켄슈타인이나 모로와 달리 그리핀은 자신에게 생체 기술을 실험했습니다.
이는 약물 실험이었기 때문에 인조인간이나 반인반수와 달리 으스스하거나 고어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조인간이나 반인반수와 달리 투명 인간은 놀라운 결과물입니다. 투명 인간은 깊고 깊은 탐욕을 건드리는 소재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들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농락하거나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다면…. 하지만 소설 속의 투명 인간은 이내 한계에 부딪혔고, 공황 속을 헤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자신에게 실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지 모르죠. 만약 이 사람이 어떤 기계를 만들었다면, 자신에게 실험하지 않았을 테고, 좀 더 다른 상황에 부딪혔겠죠.
비단 투명 인간만 아니라 수많은 생체 기술자들은 자신의 몸뚱이에게 실험했고, 그래서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마주합니다. 그래서 생체 실험은 다른 실험들보다 끔찍할지 모릅니다. 자신이 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다른 것으로 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괴물이 되거나 위험한 기계가 돌아다니는 상황 역시 부정적이겠으나, 그것들은 자신이 뭔가 이상한 것으로 변하는 것만큼 부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생체 실험이 품은 원초적인 공포들 중 하나겠죠.
허버트 웰즈가 쓴 소설들을 찾아본다면, 생체 실험들을 좀 더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세기에는 투명 인간만큼 불운한 생체 실험이 하나 더 있죠.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입니다. (흠, 사실 이 소설은 대단히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나, 그걸 구태여 내용 누설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겠죠.) 지킬 박사 역시 약물을 이용했고, 하필 자신이 그걸 마셨습니다. 다른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지킬 박사는 생체를 실험했고, 인간 그 자체가 생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문자 그대로)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했고, 이는 불상사로 이어졌죠.
지킬 박사 역시 유전자 조작이나 그런 걸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약물을 만들었고, 그걸 마셨습니다. 약물은 생체 실험을 다루는 SF 창작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죠. 마법의 물약은 비단 SF 소설에만 나오는 소품이 아니고, 게다가 약물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간단한 소도구죠. 약물 하나로 생체가 변한다는 설정은 너무 가볍게 보이나, 쓸데없는 묘사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SF 창작가들은 약물을 요긴하게 써먹는 중이죠. 수술하거나 침을 맞는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자주 사람들은 수많은 약들을 먹거나 마시고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후대 창작가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와 투명 인간 역시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지킬 박사는 훨씬 더 매력적일 겁니다. 왜냐하면 지킬 박사는 약물을 이용해 다른 존재로 '변신'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더 나은 생명체가 될 수 있는 로망을 자극하죠. 자신을 뭔가 더 대단하고 뛰어난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로망을 자극해요. 그래서 저는 뭔가 다른 존재로 변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은 지킬 박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지킬 박사 본인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만 뽑아냈으나, 이를 거꾸로 이용한다면, 헐크 같은 엄청난 존재를 불러낼 수 있겠죠. 그래서 만화 <젠틀맨 리그>는 아예 하이드를 헐크로 만들었을 겁니다. 참고로 아서 코난 도일 역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바이오펑크를 써먹은 적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는 강화 인간(!)을 붙잡은 적이 있어요. 사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나, 코난 도일은 그 단편 소설에서 너무 비약적으로 상상한 듯합니다. 코난 도일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소설은 (옛날 기준에서) 나름대로 과학적 엄밀함을 갖췄을지 모르겠군요.
1886년에 나온 <미래의 이브> 역시 빼먹지 못할 겁니다. 여러 생체 실험 소설들 중에서 <미래의 이브>는 꽤나 돋보입니다. 소설 초반~중반까지 어떻게 인조인간을 만드는지 과학자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자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건 그저 19세기 바이오펑크일 뿐입니다. 그것들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죠. 게다가 과학자는 나중에 꼼수를 동원합니다. 왜 작가가 (별로 엄중하거나 치밀하지 않은) 설정을 그렇게 자세히 풀어놨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이 <솔라리스>에서 솔라리스 학설들을 열심히 설명한 것처럼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라당은 과학 기술을 열렬히 찬양하거나 신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었는지 모르죠. 아니면 작가가 복잡한 지식과 허영을 서로 연결하고 싶었는지 모르죠. 이 소설에서 생체 실험은 나중에 부정적인 사고로 이어집니다. 아니, 생체 실험을 설명하는 과정 자체가 유럽 상류층 문화를 심하게 비꼬는 듯합니다. 상류층 사회의 미덕은 위선적인 가면에 불과하고, 인조인간은 그런 위선을 파고드는 상징입니다. 소설은 멍청한 여자 귀족이나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허영 덩어리 남자 귀족을 보여주고, 상류 사회가 얼마나 뻔뻔하게 흘러가는지 이야기해요.
19세기를 지나고, 20세기 초반을 본다고 해도, 여러 생체 기술자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선배들만큼 파탄이나 불상사로 이어지죠. 1925년에 미하일 불가코프가 쓴 <개의 심장>은 생체 개조 기술이 어마어마한 비극으로 이어지는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은 끔찍하거나 추악하거나 암울하기보다 우스꽝스럽죠. 하지만 소설에 전반적으로 드리운 먹구름이나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물과 인간을 개조한다는 기괴한 면모는 어디에나 만연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1922년에 허버트 웨스트 연작을 발표했죠.
허버트 웨스트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유지를 떠받드는 정신적인 후계자입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나름대로 자신의 업보를 인지하고 자신의 피조물과 대화했다면, 허버트 웨스트에서 그런 긍정적인 측면은 싹 날아갔습니다. 허버트 웨스트는 정말 미치광이 과학자라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오직 자신의 실험에만 몰두하고, 다른 것들은 안중에 없어요. 아울러 열심히 시체들을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를 '생체 개조 기술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애매하군요. 하지만 분명히 허버트 웨스트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시작한 SF 생체 실험을 이어가는 인물이죠.
초기 SF 소설들에서 생체 실험 기술자가 모두 부정적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알렉산드르 벨야예프가 쓴 <물고기 인간>은 19세기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은 1928년에 나왔고, 여기에서 언급해도 괜찮겠죠. <물고기 인간>은 꽤나 낭만적인 책입니다. 너무 낭만적이기 때문에 손발이 오글거릴 듯합니다. 모로 박사가 자신의 무인도에서 끔찍한 동물 왕국을 이룬 것처럼 이 책에서 생체 개조 기술은 다양한 개조 생명체들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혀 끔찍하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화기애애합니다.
솔직히 소설 속의 생체 개조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싶습니다. 주인공 물고기 인간이 돌고래들과 함께 멋지게 헤엄치는 모습은 우아한 인어 전설에 닿을 수 있겠죠.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SF 소설들을 살펴본다면, 부정적인 생체 실험이 긍정적인 실험보다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초기 SF 소설들은 좌파적이거나 회의적이거나 문명 비판적이었습니다. (이런 SF 소설을 화려한 오버 테크놀로지 모험담으로 본격적으로 바꾼 인물은 휴고 건즈백 같습니다.) 그래서 생체 실험 역시 부정적인 결과를 우회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여러 유명한 작가들이 생체 개조 실험을 소재로 삼은 이유는 뭘까요. 왜 그 작가들은 생체 기술자를 소설 속에 집어넣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체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고, 죽은 생명은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명 윤리는 소중하죠. 동시에 우리 인간 역시 생명체이고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할 뿐만 아니라 생명체이기 때문에 소중하죠. 과연 이런 생명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어떻게 생명체가 이 지상에 나타났죠? 소설 <붉은 화성>에서 색스 러셀이라는 과학자가 말한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인 생명은 어떻게 지구상에 번성했을까요?
아무도 기원이나 시초를 알지 못합니다. 비단 생물학자만 아니라 대부분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명체가 탄생했는지 알기 원하죠. 그렇게 생명체는 신비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대상입니다. 하지만 생체 기술자들은 이런 생명체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립니다. 심지어 생명체를 창조하죠. 기계를 뚝딱뚝딱 만드는 것과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특히,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유럽 작가들은 이런 행위를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봤을 겁니다. 작가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고 해도 유럽 독자들은 생체 실험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생체 실험은 터부를 건드리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좌파적이거나 회의적이거나 문명 비판적인 작가들은 생체 실험을 이용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지금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유전자 조작 기술을 SF 소설 속에 집어넣는다면, 자본주의 문명을 아주 신나게 깔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를 만들든, 시들지 않는 작물을 만들든, 생체 나노 머신들을 만들든, 이는 자본주의 문명을 가루가 될 때까지 깔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는 정말 그러는 중이고요. 아울러 초기 SF 작가들이 생체 실험을 이용한 이유는 우리 자신이 생명체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자신이 생체이기 때문에 생체 실험을 더욱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SF 작가들은 우주선이나 로봇을 쉽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19세기 작가가 인공 지능이나 컴퓨터나 거대 로봇을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1880년대에 그런 기술을 생각하기가 쉬웠을까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쥘 베른을 비판한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어요. 쥘 베른이 너무 엉터리 방법으로 우주를 여행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초기 SF 작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몸뚱이'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사람의 몸뚱이일 수 있고, 동물의 몸뚱이일 수 있었어요.
생체 기술은 터부를 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주 적합한 소재죠. 게다가 우리 자신과 동물들이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체 개조는 비교적 쉬운 상상이었습니다. 적어도 고대나 중세나 근대에 의사는 있었으나, 컴퓨터 기술자나 우주선 기술자, 로봇 기술자는 없었죠. 그래서 19세기에도 기계보다 몸뚱이를 상상하기가 훨씬 쉬웠을 겁니다. 저는 이런 두 이유 덕분에 초기 SF 작가들이 생체 실험을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들이 밑밥을 잘 깔아줬기 때문에 후배 창작가들 역시 생체 실험을 계속 이용하는 중입니다. 생체 실험은 캡틴 아메리카나 스파이더맨이나 헐크처럼 미국 만화 속의 온갖 초인 영웅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이>나 <인간 종말 리포트>나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처럼 여전히 생체 실험은 부정적인 면모가 강합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 '생체 함선'을 좋아하나, 생체 함선 역시 생체 실험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죠. 그래서 생체 함선은 부정적인 분위기를 풍길 우려가 있고…. 물론 SF 소설 속의 생체 함선이 모두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체 함선들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SF 소설 속에서 생체 실험이 걸어온 길을 고려한다면, 생체 함선을 무조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가 쉽지 않군요. 현실 속의 사역 코끼리나 폭발물 탐지견 역시 아주 심각한 동물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에서 생체 함선은 훨씬 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