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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발전기의 왕>과 몇몇 단편 소설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발전기의 왕>과 몇몇 단편 소설들

OneTiger 2017. 12. 2. 21:52

허버트 웰즈는 우리나라에서 <우주 전쟁>과 <타임 머신>, <투명 인간>, <모로 박사의 섬>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네 소설들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웰즈가 다른 소설들을 썼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묻히는 듯합니다. 웰즈는 저런 암울하고 기이한 소설들 외에 유토피아 소설이나 비경 탐험 소설에도 손을 댔습니다. 비슷하게 쥘 베른 역시 <해저 2만리>나 <지구 속 여행>, <지구에서 달까지> 같은 소설들 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어요.


하지만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만약 어떤 작가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 작가가 쓴 다양한 소설들을 탐구해야 할 겁니다. 특히, 단편 소설들은 양이 꽤나 많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히 알려줄 수 있겠죠. 그런 관점에서 <세계 문학 단편선 - 허버트 조지 웰즈>는 참으로 반가운 책입니다. 이 책은 허버트 웰즈가 쓴 여러 단편들과 중편들을 담았고, 장르들도 여러 가지입니다. 비경 탐험이나 괴물 소설부터 풍자 소설이나 우주 탐험까지 들어있습니다. 이런 소설 모음집에서 독자는 허버트 웰즈의 다양한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겠죠.



<세계 문학 단편선 - 허버트 조지 웰즈>는 모두 33개의 소설들을 담았습니다. 어떤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어떤 소설은 판타지처럼 보입니다. 어떤 소설은 독특한 재치가 빛을 발하고, 어떤 소설은 아주 전형적입니다. 어떤 소설은 환상 소설이 아닙니다. 아울러 모든 소설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하기가 좀 그렇군요. 하지만 허버트 웰즈가 누구인지 더욱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가 없는 참고가 될 겁니다. 아울러 19세기 유럽 작가가 쓴 환상 소설들을 마음껏 즐길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 비경 탐험이나 괴물 소설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19세기 유럽의 비경 탐험이나 괴물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습니다. 뭐, 허버트 웰즈 역시 유럽 백인 남자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하층 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였고, 그래서 나름대로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주의 사상에는 문제가 좀 있었고, 그것과 별개로 허버트 웰즈 역시 유럽 백인 남자라는 굴레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어요. 특히 비경 탐험 소설이나 괴물 소설은 문명을 벗어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한계가 엿보이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 중 하나는 <원뿔>입니다. 산업 혁명을 이용해 심리 묘사를 비유하는 소설처럼 보입니다. 겉보기는 단순한 연애 소설 같습니다.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있습니다. 두 남자는 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당연히 두 남자는 상대를 미워하고, 그래서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으르렁거립니다. 희한하게도 하필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는 장소는 제철 공장입니다. 두 사람들은 제철 공장 속을 휘젓는 동시에 계속 말다툼을 벌입니다.


작가는 두 남자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속마음과 제철 공장 곳곳을 병렬합니다. 마치 뜨겁고 부글거리는 용광로와 다른 공장 기계들이 두 남자의 뜨겁고 부글거리는 속마음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원뿔>은 어떻게 노동자들이 산업 혁명 시대를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한편으로 기계들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어쩐지 기계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풍기는군요. SF 소설이 아니나, 흥미로웠습니다. <발전기의 왕>은 <원뿔>과 비슷합니다. 이 소설 역시 노동자와 산업 시대를 이야기하나, <원뿔>과 달리 산업 기계들과 인간의 심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풍자적으로 그립니다.



<원뿔>에서 기계들이 단순한 상징이었다면, <발전기의 왕>에서 기계는 인간을 압도합니다. 인간은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기계에게 감탄하고, 기계가 엄청난 힘을 생산한다고 믿습니다. 결국 인간은 기계를 숭배합니다. 아마 항공기를 신으로 모시는 원주민들과 비슷한 상황 같습니다. 발전기를 숭배하는 이 노동자는 단순한 신도가 아니라 광신도로 발전합니다. 광신은 모든 상황을 제멋대로 해석하곤 하고, 이 노동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발전기가 웅웅거릴 때마다, 광신도는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고 신이 계시를 내린다고 믿습니다. 기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맹목적인 광신과 결합했죠. (하필 이 광신도가 유럽 백인이 아니라 인도인이라는 사실은 좀 그렇군요.) <데이비슨의 눈 사건>은 비경 탐험 소설입니다. 아니, 비경 관측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어떤 남자가 있고, 이 남자는 다른 차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주선이 웜홀을 통과하듯 이 남자는 공간을 통해 다른 차원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종이의 앞뒤에 두 점을 찍고, 그 종이를 접으면, 두 점은 만납니다. 흔한 비유죠. 이 소설은 그런 비유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기이한 세계를 볼 수 있죠.



물론 아주 자세한 원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원을 통과하는 시선과 그 시선을 설명하는 과정은 뭔가 과학적인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합니다. <수정알>도 비슷한 소설입니다. <데이비슨의 눈 사건>이 신체를 이용해 다른 차원을 바라본다면, <수정알>에서는 어떤 희한한 수정알을 이용해 다른 차원을 바라봅니다. 이 단편 소설 모음집에서는 이렇게 다른 차원을 바라보는 이야기들이 더러 나옵니다. 사실 이런 형식은 유토피아 소설이나 고전적인 환상 소설이 자주 써먹는 방법이죠. 허버트 웰즈는 거기에 좀 더 과학적인 상상력을 덧붙입니다.


<수정알>은 다른 차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공들여 묘사합니다. 자연 환경은 낯설고, 신비롭고 이상한 생명체들이 돌아다닙니다. 비록 인류는 탐사대를 꾸리지 못하나, 이 정도면 환상적인 비경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탐사대가 직접 그 환경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에 어드벤처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분위기는 관조적이고 몽상적입니다. <플래트너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나, 여기에서 소설 주인공은 화학 실험을 이용해 직접 다른 차원(이나 다른 세계, 다른 우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몸살이 나도록 고생하죠. <데이비슨의 눈 사건>이나 <수정알>과 달리 별로 몽환적이지 않아요.



<수술대에서>도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군요. 어떤 남자가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눕습니다. 수술을 받는 도중 정신은 멀고 아득한 우주로 떠납니다. 허버트 웰즈는 참으로 다양하게 다른 차원이나 우주로 떠나는 인물들을 상정했군요. (역시 19세기 작품인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이 괜히 그런 소재를 이용하지 않았겠죠. 당시 이런 설정들이 유행했나 봅니다.) 정신은 광대한 우주를 여행하고, 광대한 우주는 압도적인 풍경들을 선사합니다. 어쩌면 이 소설 모음집에서 제일 규모가 거대한 소설인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정신만 우주를 누비나, 허버트 웰즈는 자신의 천문학 지식을 이 짧은 이야기에 홍수처럼 퍼부은 듯합니다. 여느 우주 탐사물 못지않게 웅장한 이야기로군요.


그래서 올라프 스태플던이나 아서 클라크 같은 느낌을 살짝 풍깁니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차원을 여행해요. 당연히 꿈도 등장해야죠. <아마겟돈의 꿈>에서 소설 주인공은 꿈을 꾸고 다른 차원으로 건너갑니다. 하지만 단순히 다른 차원이 아니라 암울한 미래 같습니다. 원래 이 세계는 굉장히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이고, (비극적인 전쟁을 강조하기 전에)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은 폭풍의 눈과 같죠. 이내 참담한 전쟁은 터지고, 피난민들은 사방에서 울부짖고, 전투 병기들이 하늘을 가득 채웁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하늘을 가득 채우는 전투 병기들이 독특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스팀펑크 비행선이나 공중 전함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사실 허버트 웰즈는 화성 삼발이나 육상 전함 같은 병기들을 상상했죠. <아마겟돈의 꿈> 같은 소설은 밀리터리 스팀펑크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르죠. 어쨌든 다양한 소설들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은 다양하게 다른 차원들로 건너가는군요. 이것들을 비교해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차원에 커다란 괴수는 살지 않고, 이 점은 약간 아쉬웠습니다. <잃어버린 세계>나 <해저 2만리>가 보여주듯 비경 탐험은 괴수물로 이어질 수 있어요. 다행히(?) 이 소설 모음집에는 괴수들도 등장합니다. <기묘한 난초의 개화>는 식인 식물을 이야기하고, <아부 천문대에서>는 정체 모를 날짐승을 소개합니다. <바다의 침입자>는 제목처럼 아주 전형적인 바다 괴수 이야기입니다. <거미 계곡>은 그야말로 괴물 거미들이 인간들을 습격하는 끔찍한 이야기고요. 그 중에서 제일은 <개미들의 제국> 같습니다. 이걸 괴물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미들이 인간들을 습격한다는 줄거리는 괴물 소설처럼 보이죠.



<개미들의 제국>은 인류가 지구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개미들은 단순한 괴물이나 동물이 아니라 또 다른 지적 문명처럼 보입니다. 영국 해군은 개미 제국을 퇴치하기 원하나, 해군은 실패하고 마치 개미 제국이 인류 문명을 뒤엎을 것 같습니다. 그저 괴물 소설에 머물지 않고, 우주적 공포까지 설파하는 듯합니다. <우주 전쟁>에서 화성 삼발이들이 등장했다면, 이 소설에서 개미 제국이 그 역할을 대신하죠. 초라한 인류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별>에서도 등장합니다.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거대한 혜성은 지구를 스치고, 그래서 인류 문명은 아비규환에 빠집니다. 자연 재난(혜성)을 이용한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나, 허버트 웰즈는 냉철하게 아비규환을 바라봅니다. 딱히 주인공은 없고, 작가는 누구에게도 감정을 이입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류 문명이 혼란 속에 빠졌다고 기계적으로 서술할 뿐입니다. 인류는 이 우주의 주인이 아닙니다. 혜성이 지구를 뽀개든 인류 문명이 무너지든, 그건 자연 현상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해도 이 우주가 그걸 위해 슬퍼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냉철하고 암울한 소설이 웰즈다울 듯하나, 유쾌하고 해학적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사나이>는 그런 소설들 중 하나입니다. 어떤 남자가 초능력을 발휘하나, 문제는 이걸 제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비극들이 연이어 터지고, 심지어 행성 자체가 멸망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걷잡지 못하는 비극들은 미소를 짓게 하는 결말로 흘러갑니다. 이와 반대로 <고 엘브스햄씨 이야기>는 좀 더 오싹한 소설입니다.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까워요. 아마 이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는 대충 결말을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결말을 눈치챌 수 있다고 해도 이야기 자체는 여전히 음울하고 섬찟한 분위기를 풍기는군요. 아, 그리고 <눈 먼 자들의 나라> 역시 빼놓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이 소설에서 제목을 빌렸을지 모르겠어요. 콜린 윌슨은 대작 <아웃사이더>에서 이 소설로 포문을 열었고, 덕분에 <눈 먼 자들의 나라>는 아웃사이더를 상징하는 소설로 유명하죠. 윌슨이 주목한 것처럼 소설은 어떻게 이방인이 고통을 느끼는지 자세히 묘사합니다. 눈 먼 자들이 사는 나라에서 눈을 뜬 사람은 이방인이죠. 저는 이 소설이 그야말로 엄청난 상징과 함의를 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모두 이 소설에 연민과 동정을 느끼겠죠. 이 세상에는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테고요.



비록 모든 소설을 소개하지 못하겠으나, 개인적으로 저런 소설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흠, 나중에 비경 탐험 소설이나 괴물 소설들만 따로 이야기해도 좋겠군요. 만약 허버트 웰즈를 더욱 자세히 알고 싶거나 19세기 환상 소설들을 즐기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세계 문학 단편선 - 허버트 조지 웰즈>는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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