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더라 본문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작품들의 중요한 줄거리를 설명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로봇 비전>, 존 스칼지의 소설 <유령 여단>, 피에르 불의 소설 <혹성 탈출>, 길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미믹>. 이런 작품들의 내용 누설을 피하고 싶으신 분께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소설 <스타타이드 라이징>은 외계인들에게 쫓기는 어느 지구 우주선을 이야기합니다. 이 우주선은 지구 소속이나, 재미있게도 우주선을 지휘하는 선장은 인간이 아닙니다. 돌고래죠. 유전자 조작을 거치고 인간만큼 똑똑한 신종 돌고래입니다. 이 우주선에서 신종 돌고래는 비단 선장만이 아닙니다. 각종 승무원들과 탐사 대원들과 과학자들 역시 신종 돌고래들이고, 게다가 지질학자 신종 침팬지까지 끼어있습니다. 인간 승무원들도 있으나, 인간들은 우주선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뭐, 결국 신종 돌고래들은 인간들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나, 어쨌든 겉보기에 신종 돌고래들이 인간들보다 훨씬 주도적입니다. 아마 독자들은 이런 설정에 신선함이나 놀라움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지구 소속 우주선이 SF 소설에 등장한다면, 대부분 독자들은 선장이나 항해사들이나 승무원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이죠. 심지어 수많은 SF 소설들도 결국 인간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아무리 SF 소설들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해도 작가는 인간이고 독자 역시 인간입니다. 그래서 다들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이 주역이 됩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작가들은 이런 상황을 비틉니다. 인간이 고정 관념으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비인간을 내보내고, 독자들의 선입견을 찌를 수 있죠. <스타타이드 라이징>에서 신종 돌고래가 우주선 선장이라는 사실은 반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어떤 작가들은 이런 설정을 반전 요소로 사용합니다. 이런 기법은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 소설의 첫머리와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여러 군데에서 쓰입니다. 가령,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로봇 비전>과 존 스칼지가 쓴 <유령 여단>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단편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장편 소설입니다. 하나는 마지막에서 반전을 시도하고, 다른 하나는 첫머리에서 반전을 시도하죠. 우선 <로봇 비전>은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일련의 과학자들은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선뜻 장치에 올라타지 않습니다. 아직 성능을 완벽하게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미스러운 사고가 터질지 모르죠. 미래로 떠난 여행자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고요. 누가 시간 여행 장치에 올라타야 할까요? 누가 떠나야 할까요? 과학자들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소설 화자이자 주인공은 과학자들에게 떠나겠다고 제안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요청을 거절하나,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소설 주인공은 미래로 떠나고 미래에서 유토피아를 만납니다. 미래 사람들은 환경 오염, 전쟁, 빈곤, 차별을 몰아내고 살기 좋은 세상을 이룩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미래 사람들과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둘러보고, 다시 과거로 돌아옵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학자들에게 미래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달성했다고 보고하고, 모두 만족합니다. 해피 엔딩이죠.
시간 여행 장치는 무사히 작동했고, 과학자들은 희망을 봤고, 미래 인류는 유토피아에서 살아갈 겁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과학자들에게, 심지어 독자들에게 밝히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이 로봇이라는 점입니다. 미래 사람들은 로봇이었고, 인간 없는 세상에서 로봇들은 유토피아를 달성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이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그 사실을 밝힌다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대대적으로 난리법석을 일으키겠죠. 평화롭게 끝날 것 같은 <로봇 비전>은 막판에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는 인식을 뒤집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처음에 밝혔다면, 감흥은 많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적어도 소설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겠죠. <로봇 비전>은 섬뜩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인류가 사라져야 로봇들이 유토피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죠. 주인공은 마지막에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오직 독자에게만) 밝힘으로써 그런 섬뜩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처음에 알았다면? 소설의 결말을 씁쓸하게 바라볼 수 있겠으나,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주인공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처음에 알았다면, 섬뜩함 대신 씁쓸함을 느꼈겠죠.
'사실 그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반전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뿐만 아니라 소설을 지배하는 분위기조차 바꿉니다. 존 스칼지가 쓴 <유령 여단> 역시 비슷한 기법을 사용하나, 사용 방법은 다릅니다. 이 소설은 첫머리에서 어떤 연구원을 보여줍니다. 이 연구원은 비밀 실험실에 숨었으나, 적대적인 종족의 침입자들은 비밀 실험실을 발견합니다. 침입자들은 비밀 실험실을 침략하고, 연구원은 열심히 도망치나 마침내 붙들립니다. 당연히 독자는 연구원이 인간이고, 적대적인 침입자들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대부분 SF 소설에서 외계인들이 인간 세계를 침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SF 소설들도 많으나, 고정 관념은 그겁니다.
하지만 <유령 여단>의 첫머리에서 침입자는 외계인이 아닙니다.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비밀 실험실을 침략하고, 외계인 연구원을 생포합니다. <로봇 비전>처럼 이것 역시 '사실 그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반전이죠. 존 스칼지가 이런 반전을 시도한 이유는 아마 독자가 외계인에게 주목하기 바랐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유령 여단>에서 유일한 비인간 주연 인물은 이 외계인뿐이고, 그래서 작가는 이 외계인 연구원을 부각할 필요가 있겠죠. 게다가 이 소설은 또 다른 반전을 사용합니다.
그건 외계인 연구원과 달리 '사실 그 대상은 인간이다'라는 반전이죠. 이것 역시 선입견을 비트는 기법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인간 형체'로서 기억합니다. 두 발로 걷고, 팔다리가 있고, 제일 위에 머리가 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생긴 형상을 인간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물에게 인간 형체를 투영하죠. 동물 인형이나 인간형 로봇은 그런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는 마치 바위처럼 생긴 개조 인간이 등장합니다. 가메란이라고 불리는 개조 인간입니다. 이들은 정말 바위처럼 생겼기 때문에 운석 지대에서 잠입하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하나의 인간입니다.
이 가메란을 처음 만났을 때, 소설 주인공은 상대가 당연히 인간 형체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머리와 팔다리가 달린 돌덩이가 날아왔고, 주인공은 상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죠. 주인공은 가메란에게 인간 같지 않다고 말하나, 가메란은 기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신이 엄연히 인간이라고 반문해요. 외계인 연구원과 가메란은 서로 다른 반전 기법이죠. 하나는 인간처럼 보였으나 인간이 아니었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인간이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환상 장르 창작물)이 선사할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인간 형체(2족 보행, 팔다리, 제일 위에 붙은 머리)를 이용해 반전을 시도하는 영화들 중 하나가 <미믹>입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가 만들었죠. 이 영화에는 커다란 바퀴벌레 괴물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언뜻 보면, 이 바퀴벌레 괴물은 인간 체형과 비슷합니다. 유다라고 불리는 이 괴생명체는 중간 다리와 뒷다리를 이용해 2족 보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완전한 2족 보행이 아니나, 2족 보행과 비슷하게 보이죠. 유다는 크고 길다란 두 날개로 몸뚱이를 가릴 수 있고, 인간의 안면과 비슷한 껍질로 자신의 머리를 덮을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서고, 두 날개로 몸뚱이를 가리고, 껍질로 머리를 가렸을 때, 유다는 인간처럼 보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두운 밤거리에서 유다를 본다면, 그 사람은 행인이 길다란 외투를 입고 어둠 속에서 걷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유다는 인간을 속이고 몰래 접근하고 잡아먹어요. 관객들 역시 유다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어두운 곳에 서있는 유다는 추레한 외투를 입은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마침내 유다가 괴이한 절지류 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관객들은 '그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죠. 하지만 <로봇 비전> 같은 소설과 달리 <미믹>은 이런 설정을 그저 공포 분위기 조성에만 이용합니다.
아시모프는 동일한 기법을 이용해 인류 문명을 비판했으나, 길예르모 델 토로는 좀 더 넓은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어요. 사이언스 픽션은 비인간적인 요소에 집중하는 장르이고, 그래서 저는 <미믹>이 꽤나 아쉬웠습니다. 멋진 설정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다니…. 이건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설정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인간 위주로 생각하나, 이런 설정은 그런 고정 관념을 산산히 깨뜨릴 수 있어요. 뭐, 저는 거대 배급사가 저예산 남미 감독에게 많이 간섭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믹>이 그런 무난한 괴기 영화가 되었을지 모르죠. 어쨌든 결과를 떠나서, 소재 자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편, <혹성 탈출> 같은 소설은 <로봇 비전>만큼 통렬하게 인간을 풍자합니다. <혹성 탈출>의 첫머리에서 어떤 두 인물은 우연히 주운 편지를 읽습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이한 사건을 겪었는지 서술해요. 편지를 쓴 사람은 자신이 유인원 세상에서 탈출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인간처럼 똑똑한 유인원들을 만났고, 유인원들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어쩐지 위에서 언급한 <스타타이드 라이징>이 떠오르는군요.) 그 사람은 인간들이 동물처럼 유인원들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상황에 경악합니다.
그 사람은 간신히 유인원들의 세상에서 탈출하고, 자신이 겪은 사건을 편지에 적습니다. 누군가가 그 편지를 읽기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날려보내죠. 그래서 우연히 어떤 두 인물이 편지를 주웠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인물 역시 지성적인 유인원이었습니다. 두 유인원은 웬 허풍선이가 편지를 적었다고 비웃죠. 아마 독자는 편지를 읽는 두 인물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겠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인물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인식은 완전히 뒤집어지고, 인간은 지성적인 왕좌에서 사정없이 미끄러집니다. 사이언스 픽션 속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주인이 아닙니다. 수많은 종족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 수많은 소설들이 비슷한 기법을 사용합니다. <별의 계승자>에서 인류 탐사대는 우주에서 죽은 인간을 발견합니다. 그 인간은 인류가 지구 밖으로 진출하기 전에 이미 우주에서 죽었죠. 도대체 그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거기에서 죽었을까요?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주인공 인간과 연애하는 연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가 뭐라고 언급하기 전까지 독자는 아마 그 대상이 인간 형체라고 막연히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연인은 벌레와 비슷한 유사 인간 종족입니다.
아마 우리가 그 종족이 벌레와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 종족은 인간이 원숭이와 비슷한 종족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휴머노이드, 그러니까 '유사 인간'이라는 명칭은 상대적입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삼은 용어죠.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쓴 <아웃사이더>는 제목부터 뭔가 요상한 기운을 풍깁니다. 한편, <빛의 세계> 같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 괴수에게 입장을 부여하는 소설 역시 존재합니다. 아니, 이 소설에서 그 거대한 바다 괴수를 그저 바다 괴수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군요. <빛의 세계>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죠.
독자들은 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런 소설들은 우리에게 입장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중점이라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해요. 솔직히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인류는 중점이 아니죠. 우리는 수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 SF 소설 속이든 현실 속이든,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생명체들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