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시리우스>, 인간 세상을 방황하는 지성적인 동물 본문
이른바 주류 소설과 장르 소설이 다른 이유들 중 하나는 비인간적인 존재일 겁니다. 주류 소설들은 인간들만 이야기합니다. 설사 <백경>이나 <숲의 왕>처럼 다른 존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현실을 넘어가지 못하죠. 사이언스 픽션은 자유롭게 현실을 벗어나고 다른 존재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인간적인 존재들은 우리 인류를 반영하는 거울이 될 수 있어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난다면, 인간을 훨씬 더 제대로 돌아볼 수 있겠죠. 인류를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외계인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인류를 외계인과 비교할 수 있고, 인류가 누구인지 훨씬 강조할 수 있겠죠. 그래서 크리스 켈빈이 솔라리스 정거장으로 날아갈 필요가 있었고요. 하지만 종종 사이언스 픽션은 외부인이나 이방인이 아니라 내부인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류는 미지를 찾아 떠나는 한편, 스스로 미지를 만듭니다. 인공 지능과 로봇, 돌연변이, 개조 생명체. 인류는 이런 존재들을 만들고, 이런 존재들은 인류가 누구인지 부각할 수 있어요. 메리 셸리는 그런 전형을 보여줬고, 올라프 스태플던이 쓴 <시리우스> 역시 그런 소설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듭니다. 사람만큼 똑똑한 목양견 시리우스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시리우스는 겉보기에 평범한 목양견들과 다르지 않으나, 사람만큼 똑똑하고 어렸을 적부터 풍부한 지성을 쌓았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시리우스가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해도 결국 겉모습은 동물이라는 점입니다. 과학자는 시리우스가 새로운 생명체라는 사실이 퍼진다면, 사람들이 시리우스를 박해하거나 공격할 거라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절대 비밀을 퍼뜨리지 않아요. 시리우스는 그저 목양견처럼 지내야 합니다.
내면에 엄청난 지성이 휘몰아치나, 시리우스는 그저 가축처럼 살아가야 하죠.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인조인간이 그랬듯 시리우스는 비극적인 천재 같습니다. 양쪽 모두 내면에 빛나는 지성을 품었으나, 겉모습은 내면을 가립니다. 인조인간은 겉모습이 너무 흉악했고, 시리우스는 겉모습이 가축에 불과했습니다. 시리우스가 개라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시리우스가 양이나 염소나 닭이나 오리나 사슴이나 돼지라고 해도 결과는 똑같을 겁니다. 겉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일부 사람들은 시리우스가 누구인지 인식하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덕분에 인조인간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게 증오를 품었어요. 그래서 창조주에게 복수하는 피조물로서 유명하죠. 시리우스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습니다. 시리우스를 만든 토마스 트렐론은 자신이 만든 생명체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저주한 것과 달리 토마스 트렐론은 시리우스를 열심히 가르치고 돌봐줍니다. 흔한 미치광이 과학자들과 달리 적어도 이 양반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하고 최대한 그걸 책임지려고 합니다.
덕분에 시리우스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 소설을 관통합니다. 시리우스는 그저 타자가 아닙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은 자신의 관점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만났을 때, 뒤늦게 자신의 관점을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시리우스>는 처음부터 시리우스의 관점을 보여주고, 꾸준히 시리우스와 함께 합니다. 덕분에 독자는 시리우스와 함께 처음부터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요. 처음부터 시리우스가 어떤 고난을 겪는지, 인간과 시리우스가 얼마나 많이 다르거나 똑같은지 알 수 있죠. 강아지 시절의 시리우스는 (강아지답게) 귀여운 한편 서글픈 미래를 암시합니다.
시리우스는 사이언스 픽션이 자주 사용하는 경계인들 중 하나입니다. 경계인. 어디에도 소속하지 못하는 등장인물이죠. 시리우스는 사람만큼 똑똑하나, 겉모습은 가축입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과 가축 양쪽에서 서로 어울리지 못합니다. 가축과 어울리기에 시리우스는 너무 똑똑합니다. 가끔 다른 평범한 개들과 어울리거나 가축처럼 행동하나, 결국 한계를 느낍니다. 시리우스는 다른 개들을 동료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다른 개들은 시리우스와 겉모습이 똑같으나, 결국 개들은 가축일 뿐입니다. 시리우스는 다른 개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거나 함께 사상을 교류하지 못해요.
시리우스가 사상을 교류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리우스가 평범한 개라고 생각하고, 시리우스는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죠. 시리우스는 끊임없이 두 세계를 방황하나, 두 세계에 모두 적응하지 못합니다. 시리우스가 누구인지 아는 몇몇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리우스는 아주 훌륭한 은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이 세상에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을 겁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리우스에게 깊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가령, 사회주의자는 어떨까요.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회주의자. 하지만 그런 공동체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난다고 해도 절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기득권들이 그런 공동체를 무참하게 짓밟기 때문이죠. 사회주의는 이상향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현실적인 사상이에요. 그래서 기득권들은 사회주의를 두려워하죠. 그게 너무 현실적이고, 현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유로운 공동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기득권들은 그걸 짓밟거나 말려 죽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혼자 자유로운 미래를 살아가는 중이죠. 현실은 폭력적인 자본주의 세상이나, 사회주의자는 절반쯤 자유로운 미래에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런 사회주의자 역시 현실과 미래 양쪽에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겠죠. 이런 사회주의자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고 많을 겁니다. 그래서 시리우스는 멋진 은유가 될 수 있겠죠. 물론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과 비인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비단 시리우스만 아니라 수많은 경계인들이 사이언스 픽션 안에 있습니다.
만약 시리우스가 개가 아니라 다른 동물이었다면, 경계인이라는 외로움을 덜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시리우스가 표범이었다면? 표범은 고독을 즐기는 동물입니다. 사자 같은 예외가 있으나, 커다란 고양이과 동물들은 혼자 살아가죠. 호랑이, 재규어, 표범 모두 혼자 살아가요. 만약 시리우스가 표범이었다면, 이름을 뭐, 파르도스라고 지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지성적인 표범 파르도스는 (겉모습이 위험한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인류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시리우스는 가축이기 때문에 인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나, 파르도스는 그렇지 못해요. 밀림으로 달아나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표범은 천성적으로 고독한 동물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덜 느꼈을지 몰라요. 오히려 혼자 밀림에서 고고하게 살아갔을지 모르죠. 도인들이 속세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파르도스는 인류 문명을 비웃고 밀림 속에서 혼자 지성을 뽐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빛나는 지성을 간직한 존재가 그걸 나누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실에 그런 은둔자나 도인은 존재하나, 파르도스가 그렇게 될 수 있을지…. 표범이라는 겉모습이 얼마나 많이 영향을 끼칠지….
시리우스는 개조 동물인 만큼, 이런 물음도 중요할 겁니다. 똑똑한 목양견과 똑똑한 표범은 다르겠죠. 똑똑한 돌고래, 악어, 상어, 공룡도 다르겠죠. 그런 개조 동물들을 상상하는 행위 역시 재미있을 겁니다. 개조 동물들은 그저 인류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재미있는 상상력이에요. 그래서 데이빗 브린이 업리프트 시리즈를 쓰지 않았겠습니까. 시리우스를 경계인 같은 은유로 해석하는 평론은 중요하나, 시리우스가 개조 '동물'이라는 설정 역시 중요할 겁니다. 똑같은 개조 생명체이고 경계인이라고 해도 인조인간과 달리 시리우스는 동물입니다.
동물은 손이 없고, 손이 없다면 도구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까마귀처럼 도구를 이용하는 야생 동물들도 많으나, 절대 고차원적인 도구를 만들지 못하죠. 시리우스는 그런 문제에 부딪힙니다. 아무리 머리가 똑똑해도 도구를 이용하지 못한다면, 빛나는 지성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서 손이 없다는 절규가 독특하게 기억에 남더군요. 올라프 스태플던은 시리우스가 동물이라는 설정에 제대로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비단 손만 문제가 아니죠. 목양견답게 시리우스는 시각이 좋지 않고, 이런 문제들은 계속 시리우스를 괴롭힙니다.
개가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기 때문에 개를 이용하는 소설들은 많습니다. 주류 소설 역시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수많은 소설들은 개를 은유나 풍자나 비유로 이용할 뿐이고, 진짜 개라는 동물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개는 인간과 달라요. 시각이 다르고, 후각이 다르고, 청각이 다르고, 미각이 다릅니다. 신진대사가 다르고, 신체 구조가 달라요. 만약 작가가 개를 이용한다면, 이런 사실들을 응용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 작가들은 그저 개를 인간을 바라보는 거울로 이용할 뿐이고, 개라는 동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요. 그래서 고작 우화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죠. 이는 상당히 좁은 사고 방식입니다.
동물을 소설 속에 집어넣는다면, 그저 우화에서 벗어나고 동물이라는 본질에 초첨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동물을 이용하는 우화 역시 가치가 있으나, 작가가 우화에서 벗어나고 좀 더 논리적으로 동물을 묘사한다면, 소설의 시각은 한층 넓어지겠죠. 하지만 여러 작가들은 우화에서 그칠 뿐이고, 그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 소설들을 볼 때마다, 저는 좀 답답합니다. SF 소설 역시 우화를 넘어서지 못할 때가 있고, 주류 소설들은 더욱 그렇죠. 주류 소설 자체가 낡아빠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게다가 세상의 진짜 근본을 꿰뚫어보는 주류 소설들도 많고요. 저는 그런 작가들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동물이라는 본질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소설들은 많고, 그런 소설들은 <시리우스>를 본받아야 할 겁니다. <시리우스> 역시 한계가 있으나, 적어도 (우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런 소설들보다 훨씬 낫겠죠.
아마 제가 시리우스라면, 트렐론 박사를 많이 미워했을 듯합니다. 트렐론은 아주 가부장적인 사람은 아니나, 분명히 시리우스를 짓누르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적인 개조 생명체를 만들고, 독립하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가끔 시리우스보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더욱 중시했고요. 하지만 시리우스를 죽인다거나 폐기하지 않았고, 그런 극단적인 지경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아마 시리우스가 트렐론 가족과 어렸을 때부터 어울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애증이 깊고, 시리우스 역시 대형 사고를 터뜨리지 않았어요.
트렐론 가족은 시리우스를 가족처럼 돌보거나 함께 놀았고, 그래서 시리우스 역시 자신의 창조주와 인류 세상을 완전히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는 듯합니다. 시리우스는 분명히 자신을 박대하는 인류를 깔보거나 증오합니다. 그런 감정이 없지 않아요. 아주 강렬하죠. 하지만 그게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연대나 유대가 있기 때문이겠죠.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인조인간은 아예 그런 유대가 없고, 오히려 창조주와 인류 문명을 저주하죠.
사실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은 트렐론 박사가 아니라 플랙시일 겁니다. 트렐론 박사의 딸이죠. 시리우스와 플랙시는 어렸을 적부터 함께 자랐고, 그래서 소꿉친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성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시쳇말처럼 시리우스와 플랙시는 상대를 이성으로 바라봅니다. 시리우스는 플랙시에게서 인류 문명을 배웠으나, 플랙시는 시리우스에게서 어떤 동물적인 감성을 배웁니다.
물론 인류 문명과 동물적인 감성이 서로 대조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둘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겁니다. 허버트 웰즈는 <모로 박사의 섬>에서 그런 주제를 다뤘죠. 하지만 인류 문명은 분명히 사람들을 억압하고, 시리우스 덕분에 플랙시는 그런 억압을 어느 정도 깨달은 듯해요. 뭐, 플랙시와 시리우스가 19금 수간물을 찍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끔 분위기가 끈적해지거나 도발적으로 변합니다. 만약 이게 21세기 소설이었다면, 좀 더 도발적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차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가 썼다면, 플랙시와 시리우스가 끈적한 시선만 교환하지 않았을지도….
개인적으로 '똑똑한 개조 동물'을 이야기하는 소설들 중에서 이 책을 꽤나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 작가가 이야기하는 개조 동물들도 시리우스에게 많은 영향들을 받았을지 모르겠군요. <시리우스>는 개조 동물이라는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가 간과하지 못할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