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대재난>, 과학 기술은 정말 인류 문명을 해치는가 본문
르네 바르자벨이 쓴 <대재난>은 소설 내용이 무엇인지 제목으로 드러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죠. 엄청난 재난은 문명을 덮치고, 쓰러지는 문명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안락한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원하나, 엄청난 재난은 그들을 계속 문명 밖으로 몰아갑니다. 사람들은 결국 안락한 울타리에서 쫓겨나고, 온갖 가혹한 상황들에 직면합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울타리 안에서 그들이 뒤집어썼던) 가면과 위선과 형식을 벗어던지고 본모습을 드러내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보여주는 여러 특징들 중 하나는 이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릴 수 있고, 그래서 다양한 가면과 위선과 형식을 벗길 수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른바 문명인을 순식간에 야만인으로 몰아붙일 수 있어요. 우리는 문명인처럼 보이나, 인류 문명이 붕괴한다면, 순식간에 야만성을 보여줄지 모릅니다. 저는 <대재난>이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보여주는 다른 특징들도 덧붙이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안락한 문명 울타리에서 가혹하게 내쫓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미래 프랑스를 보여주고, 유토피아 세상으로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미래 프랑스는 수많은 첨단 기계들이 발달한 곳이고, 기술적인 경이로움을 자랑합니다. 미래 프랑스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첨단 기계들이 놀랍게 발달한 곳입니다. 도시로 가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열차에 탑승하고, 작가는 이 열차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비단 첨단 열차만 미래 프랑스를 대변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펼칠수록 독자는 미래 문명이 얼마나 찬란한 성과를 이룩했는지 알 수 있어요.
어쩌면 21세기 독자는 소설 속의 미래 문명이 허술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대재난>은 1943년에 나왔어요. 아무리 SF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싸맨다고 해도 시대적인 한계를 돌파하기는 어렵죠. 르네 바르자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르네 바르자벨은 열심히 첨단 기계 문명을 구상했겠으나, 상상 과학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점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재난> 역시 마찬가지고요. 첨단 기계 문명은 앞으로 들이닥칠 재난을 강조하는 역할이죠.
현대 문명이 붕괴한다면, 그 문명 속의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겁니다. 미래 문명 속에서 사람들은 그 문명에 더욱 의존할 테고, 재난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훨씬 거대한 혼란에 빠지겠죠. 재난은 점차 다가오나, 그걸 파악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재난>은 왜 인류 문명이 처참하게 무너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문명이 무너진 이후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진다고 이야기하나, 왜 문명이 무너지는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저 국제 정세가 불안하고, 그래서 전쟁이 터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르네 바르자벨은 어떻게 인류 문명이 돌아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전쟁이 터졌다고 대충 묘사한 것 같아요. 이 소설은 그런 주제보다 아비규환에 더 관심이 많고, 곧바로 사건들은 아비규환으로 흘러갑니다. 커다란 재난 하나가 프랑스를 강타한 이후, 그 재난은 다른 재난들을 연이어 일으키고, 아무도 걷잡지 못하도록 상황은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생지옥으로 빠지고, 초라한 목숨들을 살리기 위해 다들 아우성이고, 어느 새 화려한 첨단 문명은 요란한 난리통으로 몰락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본격적인 이야기들을 펼치기 시작해요.
아마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을 때마다 많은 독자들은 이렇게 물을 겁니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런 물음을 던지기에 제일 적합한 장르죠.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수많은 소설 주인공들은 그런 물음에 직면하고, 갈림길들을 골라야 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살아남고 싶다면 문명이 가로막은 제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건 잔인하거나 무모하거나 비인간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자신이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없겠죠. 문명이 무너진 상황에서 문명이 규정한 제약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런 잔인하거나 무모하거나 비인간적인 선택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비인간적인 선택은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소설 주인공이 비인간적인 갈림길을 고르기 전에 거대한 문명이 소설 주인공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겠죠. 소설 주인공이 그런 갈림길을 고른 이유는 인류 문명이 재난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들은 첨단 문명을 유지하느라 바빴고, 전쟁 같은 인적 재난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는 독자는 그런 점 역시 고민해야 할 겁니다.
배경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대재난>을 중반부에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 중반부까지, 주인공은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살길을 찾습니다. 소설 중반부 이후, 주인공은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고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과 다른 생존자들은 어떻게 세상이 무너졌는지 살필 수 있어요. 독자 역시 그들과 함께 여정을 떠나고, 어떻게 대재난이 세상 곳곳을 뒤집었는지 살필 수 있고요. 저는 소설 중반부가 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 안과 도시 밖. 도시와 야생.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소설 주인공 역시 성장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농민이고, 따라서 첨단 도시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노련한 농민이나, 첨단 기계 문명 속에서 그런 재주는 쓸모가 없었습니다. 사방에 화려한 기계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낱 농민에게 별로 시선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도시가 무너졌고,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도시 밖은 야생이고, 대재난은 야생에도 손길을 뻗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 밖에서 생존해야 하나, 여기에는 그들을 돕는 첨단 기계가 없습니다. 당연히 소설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서 멋지게 활약할 수 있겠죠.
소설 주인공이 도시에서 야생으로 여정을 떠나고 시골뜨기에서 생존자로 각성하는 동안, 소설은 다양한 참상들을 펼칩니다. 사회 구조는 든든하게 보이나,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때 이른바 문명인들은 추악한 맨얼굴을 들이밉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과학 기술은 그런 문명인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결국 과학 기술 역시 인간들이 다루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회가 무너지고 인간들이 몰락한다면, 과학 기술 역시 아무 소용이 없어요. 평소에 불거지지 못한 여러 불평등들은 기회를 만나고 고개를 불쑥 내밉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하게 맞물리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문명인들은 서로 죽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일 수 있으나, 저는 작가가 나름대로 극단적인 상황을 제대로 연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은 수시로 비인간적인 갈림길을 마주합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 주인공 역시 윤리적인 문제에 쉽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르네 바르자벨은 소설 주인공을 윤리적인 포장지로 감싸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런 점이 솔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설프게 윤리적인 포장지를 감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창작물들은 너무 단순하고 얄팍합니다. 사실 인류 문명은 별로 반짝거리는 포장지가 아니죠.
작가는 무너지는 도시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불평등을 놓치지 않습니다. 미래 문명은 유토피아처럼 보이나, 그건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화려한 문명은 포장지에 불과하죠. 노동, 전쟁, 관료 제도, 광신 같은 문제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재난 이후 신나게 튀어나옵니다. 특히, 이런 상황일수록 노동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르네 바르자벨은 재난을 이용해 노동자를 무시하는 시각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서 노동과 문명, 전쟁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그 세 가지는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누가 화려한 첨단 기계들을 만드나요? 노동자들입니다. 노동자들은 고대부터 각종 건축물들을 지었고, 따라서 노동자들 없이 화려한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기득권들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문명을 떠받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터질 때, 노동자들은 소총을 들고 전장에 나가거나 공장에서 열심히 전차를 조립합니다. 따라서 전쟁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노동 문제를 빼놓지 못하겠죠. 하지만 르네 바르자벨은 그런 문제를 유기적으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그런 문제를 고민하지 못한다고 해도, 소설은 온갖 참상들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대재난은 거대한 상황을 쉽게 뒤집을 수 있어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자본가는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닙니다. 부자는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닙니다. 도시가 무너지고 아비규환에 빠진다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를 아주 쉽게 처치할 수 있겠죠. 부자와 거지는 똑같이 비참한 생존자에 불과하고요. 부귀영화는 더 이상 번쩍거리지 않고, 불평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노동자와 거지가 자본가와 부자보다 더 강할지 모르겠군요. 자본가가 권력자인 이유는 생산 수단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사실 자본가 계급 자체는 기생적입니다. 자본가들이 권력자인 이유는 그들이 뭔가 특별한 성과를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 수단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대재난 덕분에 자본가들은 더 이상 생산 수단을 차지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본가들은 기생적인 맨얼굴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첨단 과학 기술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거친 야생 속에서 첨단 기계에 의존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기계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쌍하게 끙끙거리고, 그런 모습은 꽤나 희극적입니다. 독자들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현대 문명과 첨단 과학이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고민하겠죠. 그런 고민은 중요하나, 솔직히 작가가 너무 과학 기술을 등한시하는 것 같습니다. 과다한 러다이트 운동 같아요.
물론 우리가 과학 기술을 맹신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학 기술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회 구조가 불평등하다면, 과학 기술은 온갖 불평등에 이바지하겠죠. 갈릴레오를 이야기할 때 베르히트가 쓴 것처럼 과학 기술은 고통스러운 인민들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과학 기술은 불평등을 더욱 키웁니다. 따라서 르네 바르자벨이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다면, 과학 기술과 함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주목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과학 기술과 첨단 기계(죽은 노동)가 인민들을 억압하는지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르네 바르자벨은 그런 분석을 배제하고 무조건 과학 기술을 부정합니다. 적어도 <대재난>은 그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은 도구에 불과해요. 인류는 그걸 유용하게 쓸 수 있어요. 문제는 그걸 가로막는 불평등한 구조이나, <대재난>은 그런 구조에 주목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소설은 성 차별 역시 간과하죠. 저는 르네 바르자벨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대재난>에서 소설 주인공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우파적입니다. 소설 속에서 이상적인 여자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이를 잘 기르는 현모양처입니다. 어쩌면 작가가 이런 구시대적인 꼰대 기질을 비판하는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는 비판이나 조롱 같은 느낌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재난>이 도달하는 결말은 진부하고 다소 얄팍합니다. 작가는 뭔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과학 기술을 부정하고 여자를 억압하는 공동체 같습니다. 작가가 정말 그런 공동체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대재난>이 거기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르네 바르자벨이 묘사한 공동체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왜 인류 문명이 문제를 일으키는지 본질적으로 고민하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 대책 없이 과학 기술을 부정하고 여자를 차별하죠. 사회 구조를 고민하지 않는 문명 비판은 뻔한 결론으로 흐르곤 합니다. 저는 <대재난>이 생생하고 재미있는 소설이나, 그런 단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