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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노변의 피크닉>, 드넓은 우주와 인식론적 한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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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드넓은 우주와 인식론적 한계

OneTiger 2017. 12. 28. 19:56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느끼고, 맛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눈과 코와 귀와 피부와 혀는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하고, 뇌는 그런 정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먹거리를 찾거나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 뇌가 인식하는 세상과 다르다면, 우리는 생존하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존한다는 뜻은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인식했다는 반증이겠죠.


하지만 이게 완벽한 반증일까요. '통 속의 뇌'는 유명한 사고 실험입니다. SF 소설들 역시 통 속의 뇌를 이용하곤 하죠. 흔한 사이버펑크 소설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인식하는지 아니면 현실처럼 보이는 가상 세계를 인식하는지 확신하지 못해요. 만약 누군가가 현실과 완전히 똑같은 가상 세계를 만든다면, 그 가상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현실과 가상 세계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스스로 가상 세계를 깨뜨리고 현실로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인간이 인식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SF 작가들은 그런 가능성에 회의적입니다. 존 발리와 필립 딕과 할란 앨리슨과 로저 젤라즈니와 찰스 스트로스와 기타 수많은 작가들이 쓴 소설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가상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현실로 나가지 못합니다. 철학자들 역시 회의적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통 속의 뇌 실험에 반대하나, 여전히 우리가 가상 세계에서 현실로 나가고 싶다면, 우리는 가상 세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방법이 없고, 그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한계 내부에서 발버둥칠 뿐입니다.


흠, 어쩌면 21세기 인류 모두가 어떤 실험적인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는지 모르죠. 외계인들이 인류를 실험실에 집어넣고 실험하는 중일지 몰라요. 뭐,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구태여  사이버펑크 소설만 이런 인식론적인 한계를 이용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쓴 <노변의 피크닉> 역시 인식론적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이 설정한 상황은 '통 속의 뇌' 실험과 다르고, 소설 주인공 역시 가상 세계와 현실을 헛갈리지 않습니다. <노변의 피크닉>은 분명히 인식론적 한계를 이야기하나, 그 방법과 주제는 다릅니다.



통 속의 뇌 실험에서 가상 세계 속의 인물은 자신이 가상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합니다. 아니면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에서 소설 주인공은 현실을 직시합니다. 문제는 그 현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소설 주인공이 알지 못한다는 상황입니다. 현실은 무한한 세상이고, 소설 주인공은 그 현실을 모두 가늠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주는 광대하나, 인간은 광대한 우주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광대한 우주가 인간을 가만히 놔둔다면, 인간은 힘들게 우주를 체험하려고 애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광대한 우주는 인간에게 계속 간섭하고, 따라서 인간 역시 우주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인간은 자신의 인식론적 한계를 깨닫고 절망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현명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나, 현명한 동물에게 너무 많은 한계들과 장벽들이 있습니다. 우주는 인류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으나, 인류는 우주를 낱낱이 밝히지 못합니다. 그저 이유를 모른 채 고난을 겪을 뿐이죠. 우리는 무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절망합니다.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상황을 조명합니다.



<노변의 피크닉>은 통 속의 뇌와 별로 접점이 없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첫머리에서 통 속의 뇌를 언급한 이유는 이 소설 역시 인식론적 한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잠시 통 속의 뇌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우주가 인류를 어떤 실험실에 가두지 않았을까? 사실 이 모든 암울한 상황은 어떤 실험이 아닐까? 인류가 실험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비록 <노변의 피크닉>과 통 속의 뇌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해도, 두 가지를 함께 고민한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은 감상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외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소설 주인공은 자신의 내부 역시 의심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를 의심하기 시작할 겁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흐트러진다면, 당연히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 역시 흐트러질지 모르죠. "이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내가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 물음은 다시 "내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능력이 있나?"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겠죠. 결국 인간은 "내가 그런 능력이 있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볼 겁니다.



그렇게 <노변의 피크닉>은 인간 외부 세상을 이야기하고, 점차 인간 내부로 들어갑니다. 이 소설은 외부적인 의문들을 잔뜩 나열하고, 결국 그걸 이용해 내부적인 응어리를 터뜨리죠. 소설은 크게 네 부분들로 나뉩니다. 소설 주인공은 레드릭 슈하트라는 스토커입니다. 스토커는 금지 구역으로 몰래 잠입하고 희귀한 물품들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한 후, 지구에 여러 기이한 구역들이 생겼습니다. 그 구역들 안에는 온갖 이상 현상들이 떠돌고, 정체 모를 존재들이 거주합니다.


구역은 위험한 지역입니다. 언제 이상 현상들이 사람들을 덮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언제 정체 모를 존재들이 사람들을 죽일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기이한 구역에 도전하나, 다들 난데없이 죽음과 마주칠 뿐입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생존자들 역시 왜 그들이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 자리에 뭔가 이상한 현상이 도사린다는 사실만 깨닫고 그 자리를 피할 뿐입니다. 구역 안에 들어간다는 건 자살과 별로 다르지 않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구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 외계인들이 남긴 진귀한 물품들이 있기 때문에.



스토커는 구역 안에서 이상 현상들이나 괴물들을 피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챙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스토커는 일종의 모험가입니다. 위험을 피하고, 괴물과 싸우고, 보물을 챙기고, 막대한 보상을 받는 모험가입니다. 던전 속에서 함정을 피하고, 해골 병사와 싸우고, 보물 상자를 열고, 마을에서 보상을 받는 모험가와 스토커는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검마 판타지가 던전 탐험을 중시하듯 <노변의 피크닉>은 구역 탐사를 중시합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가 구역을 탐사하는 이야기들을 나열합니다.


하지만 <노변의 피크닉>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띄엄띄엄 나열하고, 구역 탐사와 구역을 둘러싼 상황을 보여주죠. 서로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레드릭 슈하트는 공식적인 연구원이 되거나 불법적인 도굴꾼이 됩니다. 그저 한탕을 벌기 위해서 아니면 뭔가 간절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슈하트는 구역 안으로 들어갑니다. 전반적으로 <노변의 피크닉>은 스토커 레드릭 슈하트에게 초점을 맞추나, 셋째 단락에서 리처드 누넌이라는 인물을 잠시 보여줍니다. 리처드 누넌은 스토커가 아니라 구역을 둘러싼 갈등 관계를 조절하는 인물입니다. 누넌은 직접 구역을 탐사하지 않으나, 대신 구역을 둘러싼 거시적인 그림을 보여주죠.



사실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대화 역시 리처드 누넌에게서 나옵니다. '노변의 피크닉' 가설을 이야기하는 인물은 스토커 레드릭이 아니라 리처드 누넌이죠. 누넌은 언제나 의문을 떨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은 지구를 방문했고, 지구에 위험한 이상 현상들과 희한한 물품들을 남겼습니다. 왜? 왜 그들이 지구에 왔고, 왜 위험한 이상 현상들과 희한한 물품들을 남겼을까요? 왜? 이유가 뭘까요? 해답은 없습니다. 누넌은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누넌과 논의하는 어느 박사는 외계인들이 그저 지구에 소풍을 왔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들린 이유는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풍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외계인들과 인류는 너무 다른 존재이고, 그래서 소풍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뿐이죠. 이는 우주적 공포와 비슷해 보입니다. 외계인은 그저 가볍게 손짓했을 뿐이나, 사람들은 우수수 죽어나갑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같은 작가는 다곤이나 크툴루 같은 압도적인 외계인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죽음과 공포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러브크래프트는 인과 관계를 분명히 기록합니다. <노변의 피크닉>에는 실낱 같은 인과 관계조차 없습니다. 노변의 피크닉 가설 역시 가설에 불과합니다. 왜 외계인들이 지구에 방문했는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인류는 그저 현실과 직면할 뿐입니다.



위에서 저는 구역 탐사가 던전 탐험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역 탐사는 아주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모험이 될 수 있고, 사실 여러 창작물들은 <노변의 피크닉>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비디오 게임 <스토커>는 대놓고 <노변의 피크닉>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게임 속에서 스토커들은 위험한 구역으로 들어가고, 돌연변이 괴물들을 죽이고, 번개 폭풍을 피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챙깁니다. 긴장이 넘치는 모험이죠. 하지만 구역을 탐사할 때마다 레드릭 슈하트는 언제나 공포와 절망을 마주칠 뿐입니다.


여기에 짜릿하거나 흥미진진한 감성은 없습니다. 슈하트를 비롯한 탐사대들이나 스토커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들을 마주하고, 이유 없이 죽습니다. 만약 돌연변이 괴물이 머리통을 물어뜯는다면, 슈하트는 별로 절망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돌연변이 괴물은 슈하트가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역 안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이나 이상 현상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뭔가가 존재하나, 슈하트는 그게 뭔지 알지 못합니다. 구역 안을 탐사할 때마다 슈하트는 그것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구역을 탐사하는 과정은 슈하트가 인식론적 한계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한국에서는 <노변의 피크닉>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 먼저 나왔죠. <세상이 10억 년>에서 여러 학자들은 왜 우주가 인간을 압박하는지 논의합니다. 하지만 그 학자들 역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들은 우주에게 압박을 받을 뿐이고, 아무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노변의 피크닉>과 <세상이 10억 년>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으나, 주제는 거의 비슷합니다. 광대한 우주. 그 우주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인간은 절망하고, 끝없는 회의와 우울함과 절망만 소설 속을 가득 채웁니다. 아무도 해답을 밝히지 못합니다.


사실 스트루가츠키 형제조차 해답을 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중요한 사안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고 절망한다는 상황만 중요할 뿐이죠. 아서 클라크 같은 작가는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초거대 건조물을 선보입니다. 인데버 탐사대는 초거대 우주선을 돌아다니나, 아무 것도 제대로 밝히지 못합니다. 이 소설에서 해답은 없습니다. 사실 아서 클라크는 왜 라마가 우주를 떠도는지 설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인데버 탐사대는 초거대 우주선에서 막대한 경외를 느낍니다. 그래서 <라마와의 랑데부>는 신비롭고 활기찹니다. <노변의 피크닉>은 정반대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초현실적인 상황일 겁니다. SF 소설들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하나, <노변의 피크닉>에서 초현실적인 공간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인류가 제대로 해답을 밝히지 못하고 계속 참변을 당하기 때문이겠죠. 결국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고, 결국 크게 외칩니다. 왜 내가 이런 상황에 몰려야 하나? 내가 누구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확신할 수 있나? 누가 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 외부적인 의문들은 도화선 같습니다. 외부적인 의문들은 내부적인 응어리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입니다. <사기꾼 로봇>이 보여주는 것처럼 외부적인 의문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알고 싶다는 도전으로 이어지죠.


<노변의 피크닉>이 사이버펑크 소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식론적 한계를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그런 경향을 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그런 범주(인식론적 한계를 이야기하는 범주)에 넣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변의 피크닉>이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좁은 해석일 겁니다. <사기꾼 로봇>이 보여주는 것처럼 소비에트 연방이 없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얼마든지 인식론적 한계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노변의 피크닉>은 훨씬 드넓은 주제를 담았고, 소비에트 연방을 운운하는 것은 너무 시시한 해석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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