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로보포칼립스>, 얄팍하고 애매한 인공 지능과 전쟁 본문
다니엘 윌슨이 쓴 <로보포칼립스>는 두 가지 소재를 종합했습니다. 하나는 로봇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즉,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래서 인류 문명이 무너졌고, 세상이 아비규환 속으로 빠졌다는 뜻입니다. 이는 매우 고전적인 내용이나, 동시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술적 특이점을 언급하는 21세기에서 인공 지능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보일 수 있겠죠. 기술적 특이점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을 것 같고, 작가 역시 자신이 로봇 공학 기술자라고 홍보합니다.
아쉽게도 <로보포칼립스>는 기술적 특이점을 별로 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설 속의 기계들은 그저 좀 더 특이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겉모습은 분명히 기계이나, 행동거지와 사고 방식은 인간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작가가 이질적인 인간을 그렸다면, 그건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겁니다. 저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묘사한 로봇들이 정말 기술적 특이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로봇들 역시 인간적인 범주에서 멀리 나가지 않죠. 하지만 아시모프는 주류적인 인식을 뒤집었습니다.
여러 소설들 속에서 아이작 아시모프는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고, 그걸 이용했습니다. 로봇 3원칙이라는 체계는 여러 방면들에서 주류적인 인식과 부딪힙니다. 그때마다 독자는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설사 로봇 3원칙이 별로 엄밀하지 않은 설정이라고 해도 그런 방법론은 중요한 가치를 보여줍니다. 아시모프는 독자가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시했어요. 그래서 양전자 두뇌가 별로 엄밀하지 않은 설정이라고 해도, 아시모프가 쓴 로봇 소설들은 재미있고 감동적입니다. 좋은 SF 소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시하죠.
<로보포칼립스>는 어떨까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을 제시할까요. 글쎄요, 저는 별로 그런 창문을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 윌슨은 인간이 뭔가 다른 존재가 되는 기분, 다른 입장에 서는 감성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감성이 SF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 인공 지능을 이야기한다면, 인공 지능처럼 독자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독자는 인공 지능이 무슨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로보포칼립스>에서 그런 창문은 등장하지 않아요.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소설 주인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소설은 별로 과학적으로 엄중하거나 치밀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조리 소설일 뿐이에요. 하지만 독자는 소설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고, 어떤 상황에서 몸부림치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플라이>가 (소설과 영화 모두) 공포물이 될 수 있다면, <변신> 역시 그럴 수 있겠죠. <변신>에서 소설 주인공은 인간과 벌레가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는지 이야기합니다. SF 소설은 그런 상황을 묘사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게다가 <변신>과 달리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으로 그런 상황을 묘사해야 할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과 양전자 두뇌로 그런 상황을 멋지게 표현했죠. <로보포칼립스>는 그렇지 못합니다. 다니엘 윌슨이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대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봇 소설을 쓰는 모든 창작가가 아시모프 같은 대가가 되기는 어렵겠죠. 아시모프를 언급하는 이유는 SF 소설이 드러내는 장점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보포칼립스>는 그런 장점들을 보여줘야 했고요.
하지만 저는 소설 속의 인공 지능, 아코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용이나 철학이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코스 자체가 전혀 개성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코스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환경 보호? 언뜻 그렇게 보입니다. 네, 환경 보호. 아주 중요하죠. 아코스가 자연 생태계를 보존하고 싶어한다면, 그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사건입니다. 하지만 인공 지능으로서 아코스는 무엇을 분석했나요? 아코스는 인공 지능입니다. 인공 지능은 인간보다 훨씬 면밀하게 현대 문명을 분석하거나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음에도 왜 자연 생태계가 계속 오염되는지 인공 지능은 냉철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아코스가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공 지능은 자연 생태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나, 거기에 이르는 구체적인 철학이나 사상이나 분석이 없습니다. 솔직히 인공 지능 대신 열렬한 환경 운동가를 집어넣어도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에드워드 윌슨이나 제인 구달 같은 학자들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구태여 인공 지능을 집어넣을 이유가 없겠죠.
솔직히 소설 속의 인공 지능은 제인 구달이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인간 학자들보다 더 애매합니다. 인간보다 애매한 인공 지능? 그런 인공 지능을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주연 인공 지능 이외에 다른 문제들도 산적했습니다. 주연 인공 지능이 애매하다면, 다른 등장인물들이 주연을 뒷받침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다들 애매한 자리에서 맴돕니다. 주연 인공 지능이 애매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문제들 역시 애매한 자리에서 맴돕니다. 뚜렷한 철학이나 사상, 주제가 없는 창작물은 자신도 모르는 길을 걷습니다.
작가 역시 왜 자신이 그런 글을 쓰는지 모릅니다. 작가는 그저 열심히 쓸 뿐이고, 그래서 애매한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죠. 오히려 노골적으로 뭔가를 주장했다면,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겁니다. 작가가 어떤 주제나 철학을 노골적으로 주장했다면, 그런 주제나 철학이 옳든 그르든, 작가는 분명한 색깔을 남겼겠죠. 소설 자체가 별로 재미있지 않더라도, 주제가 뚜렷하다면, 그 소설은 나름대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소설이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로보포칼립스>에서 그런 색깔은 굉장히 희미합니다.
그래서 <로보포칼립스>는 별로 건질 것이 없는 책입니다. 작가는 여러 이야기들을 썼으나, 인공 지능은 애매하고, 뚜렷한 주제가 보이지 않고, 작가의 색깔은 희미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전쟁 영웅입니다. 사악한 인공 지능을 처치한 전쟁 영웅이죠. 하지만 저는 소설 주인공이 뭔가 특별한 업적을 달성했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인공 지능이 애매하기 때문에 그 인공 지능을 처치한 소설 주인공 역시 덩달아 애매해졌습니다. 어쩌면 다니엘 윌슨은 독특한 인공 지능보다 화끈한 전투를 이야기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세계 곳곳에서 로봇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봇들과 인간들은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입니다. 멋지지 않나요. 로망이 넘치는 설정이죠. 하지만 소설 속에서 화끈한 전투 장면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작가가 그런 장면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소설 주인공이 전쟁 영웅이라고 계속 강조하나, 실제 화끈한 전투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덕분에 소설 주인공은 애매한 전쟁 영웅이 됩니다. 뭔가 제대로 전투하지 못한 전쟁 영웅. 아, 애매하다는 수식어를 이제 그만 쓰고 싶군요. 인공 지능도 부족하고 화끈한 전투 장면도 부족하다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만약 작가가 로봇들을 이용해 파괴적인 욕망을 채우고 싶었다면, 전투 장면에 좀 더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톰 클랜시나 스티븐 헌터처럼 다니엘 윌슨은 분대 전술이나 소총 제원을 상세하게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레인보우 식스> 같은 소설은 분대 전술을 정말 멋지게 묘사합니다. 뭐, 저는 톰 클랜시가 10대 소년들이 좋아하는 병정 놀이를 화려하게 포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레인보우 식스>는 <로보포칼립스>와 비슷합니다. 왜 자연 생태계가 오염되는지 정확하게 분석하지 않아요.
톰 클랜시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기득권들이 피지배 계급들을 수탈하는 구조를 설명하지 않죠. 밀리터리 팬들은 톰 클랜시를 사랑할지 모르나, 톰 클랜시는 그저 지배 계급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지배 계급들을 옹호하는 사람에 불과했죠. 권력의 나팔수가 아니라고 해도 그런 역할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양반입니다. 하지만 톰 클랜시는 <레인보우 식스>에서 분대 전술을 멋지게 썼습니다. 비록 10대 소년들의 병정 놀이에 불과하다고 해도 <레인보우 식스>는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로보포칼립스>는 그렇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전쟁 영웅이나, 자세한 분대 전술은 소설 속에 없습니다.
소수 민족 이야기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겠죠. 저는 왜 작가가 소수 민족을 강조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노렸을지 모르죠. 무너지는 현대 문명과 연대하는 사람들과 소수 민족은 눈물 겨운 화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확장한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가가 소수 민족을 열심히 강조한다고 해도, 그건 그저 싸구려 동정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현대 문명에서 소수 민족을 이야기할 때, 자본주의의 억압과 폭력과 학살을 빼놓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보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거대한 폭력이나 학살을 절대 언급하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정체성 문제만 죽어라 강조하고, 그래서 소수 민족들은 진짜 보상을 받지 못하죠. 우리가 오직 정체성만 강조하면, 하늘에서 먹거리들이 떨어지나요? <로보포칼립스> 역시 똑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폭력들을 이야기하나요?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소수 민족들과 유색 인종들을 학살했다고 작가가 비판하나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작가는 주연 인물들을 소수 민족으로 내세웠으나, 주술적인 감성을 어설프게 서술했을 뿐이고, 소수 민족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가는 진짜 억압을 거론하지 않아요. 작가는 인간들의 행동 원리나 사회 구조의 모순, 현대 문명의 근본에 하등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별로 알지 못하거나. 그런 사람이 소수 민족을 이야기해도 그저 싸구려 동정을 뛰어넘지 못하겠죠. 인공 지능과 분대 전술이 워낙 허술하기 때문에 그런 싸구려 동정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이런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로보포칼립스>는 로봇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말합니다. 따라서 겉보기에 사이언스 픽션이죠.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작가는 로봇이 어떤 창문을 제시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떤 창문으로 무너진 인류 문명을 바라봐야 할지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로봇들과 싸우나, 작가는 왜 그들이 싸워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로봇들이 싸우는 이유를 말하기 싫다면, 다른 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결국 로봇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 소설에서 겉보기에 불과합니다. 상상 과학이 겉보기에 불과한다면, <로보포칼립스>는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하겠죠. 물론 저는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상 과학은 핵심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왜 다니엘 윌슨이 무슨 주제로 이 책을 썼는지 잘 모르겠으나, 분명히 상상 과학은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로보포칼립스>가 얄팍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적인 소재인 인공 지능은 물론이고 분대 전술이나 연애나 소수 민족 역시 별로 읽을거리가 없습니다. <로보포칼립스>는 얄팍한 사이언스 픽션 이외에 아무 것도 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