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둠스데이 북>, 성탄절과 시간 여행과 질병 아포칼립스 본문
기독교 문명에서 성탄절은 아주 중요한 축일입니다. 성인이 태어난 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생일이기 때문에 다른 축일보다 의미가 더 크죠. 게다가 20세기 이후, 성탄절은 연말과 겹쳤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휴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탄절이라는 표현보다 성휴일(해피 홀리데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사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 신도가 아닌 사람들 역시 성탄절을 많이 기다릴 겁니다. 나라마다 연말 휴일을 즐기는 방법은 다르겠으나, 어쨌든 사람들은 휴일을 바라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놀고 싶다면, 휴일이 유일한 희망이죠, 뭐.)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은 바쁘게 휴일을 준비합니다. 수많은 상점들은 연말 휴일을 대목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축제가 벌어지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몰립니다. 하지만 이럴 때 뭔가 거대한 사건이 터진다면, 도시는 아수라장에 빠질지 모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거나 업무를 그만두기 때문에 그만큼 혼란은 더욱 심하겠죠. 어떤 작가는 이런 점을 이용해 성탄절을 난장판으로 바꾸곤 합니다. 코니 윌리스 역시 그런 작가들 중 하나이고, <둠스데이 북>은 그런 책들 중 하나입니다.
제목 '둠스데이'는 어쩐지 혼란에 빠진 성탄절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코니 윌리스가 정말 그런 해석을 의도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이 제목은 혼란스러운 성탄절보다 중세 영국을 가리킵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근미래를 살아가는 인물이나, 중세 영국으로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소설 속에서 시간 여행은 일반적인 기술이고, 종종 연구원들은 다른 시대로 떠나곤 합니다. 소설 주인공 역시 아무렇지 않게 중세 영국으로 떠났죠. 하지만 하필 주인공이 영국으로 떠나자마자 엄청난 혼란이 몰려옵니다.
현대 도시에 정체 모를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여느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이 그런 것처럼 처음에 다들 환자를 별 거 아니라고 여깁니다. 사람들이 방심하는 사이, 전염병은 사방팔방으로 신나게 퍼지고, 소설은 전형적인 질병 아포칼립스로 돌입합니다. 소설은 질병 아포칼립스가 보여줄 수 있는 온갖 풍경들을 끌어모읍니다. 병원은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도시는 고립되고, 대중들은 서로 밀고 밀칩니다. 오직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소설의 시점은 왜 전염병이 생겼는지 따지고, 어떻게 사람들이 느끼고 움직이는지 살피고, 어디로 전염병이 확산하는지 추척합니다.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은 이런 혼란 속에서 다양한 감수성을 포착합니다. 전염병이 퍼지는 혼란 속에서 <최후의 인간>은 상실감을 표현하고, <나는 전설이다>는 외로움을 표현하고, <스탠드> 같은 소설은 문명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절망이나 희망을 표현합니다. 비록 SF 소설은 아니나, <페스트> 같은 소설 역시 고립과 절망을 세부적으로 묘사하죠. <눈먼 자들의 도시> 역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르기에 어려우나, 혼란 속에서 갑갑함과 절망을 훌륭하게 이야기했고요. <둠스데이 북>은 저런 책들과 많이 다릅니다.
언제나 수다를 잃지 않는 작가답게 코니 윌리스는 절망이나 암울함보다 사람들이 좌충우돌 부딪히는 장면들을 묘사합니다. 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바쁘게 뛰어다니나, 그런 노력들은 순조롭게 화합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는 엉뚱한 원인을 쫓고, 누군가는 계속 말다툼을 벌이고, 누군가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 실수는 나중에 중대한 사건으로 변할지 몰라요. 최선의 노력은 최고의 해결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노력할수록 사고는 점점 어수선하게 변하는 듯합니다. 이런 번잡한 상황들을 그리는 것은 코니 윌리스의 특기겠죠.
하지만 이런 혼란은 비단 현대 도시만 뒤집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중세 영국으로 떠났고, 혼란은 이 시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충돌하는 것처럼 중세 영국 역시 조용하지 않습니다. 시간 여행자는 과거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며칠 동안 앓아눕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나, 시간 여행자는 자신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어떻게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현대를 떠나기 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으나, 이상한 열병 덕분에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죠.
시간 여행자는 다시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나, 그 전에 자신의 목숨부터 제대로 챙겨야 합니다. 시간 여행자가 돌아가고 싶어도 현대 도시에서 전염병이 엄청난 혼란을 몰고 왔기 때문에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시간 여행 전문가들도 전염병에 휘말렸고, 도시는 고립되었고, 다른 시간 여행 전문가들은 이 혼란의 한복판으로 들어오기를 꺼려합니다. 기이한 사건은 현대와 과거, 양쪽을 동시에 덮치고, 소설의 시점은 산만한 현대 도시와 위험하고 묵시적인 중세 도시를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리법석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2054년 현대와 1320년 과거를 한꺼번에 조명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두 명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시간 여행자가 과거를 보여주는 주인공이라면, 그 시간 여행자를 가르치는 교수는 현대를 보여주는 주인공입니다. 이 소설은 두 주인공의 시점을 이용하고, 과거와 현대를 능수능란하게 가로지릅니다. 이 두 가지는 언뜻 별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사건이 점점 악화될수록 희미한 연결 고리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과거와 현대는 만나고, 소설은 점점 절정을 향해 달리죠.
아마 이런 시간의 연결 고리야말로 시간 여행 이야기가 자랑하는 가장 큰 미덕일 겁니다. 게다가 코니 윌리스는 그저 연결 고리만 탄탄하게 짜지 않았습니다. <화재 감시원>이 그랬듯 정말 중요한 것은 거시적인 시간 여행이 아니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설은 이런 기이한 사건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상세하게 훑어봅니다. 절망과 암울함 속에서 따스한 웃음과 미소가 잔잔하게 배어나오고, 반복적인 일상을 예찬합니다. 질병 아포칼립스와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가 겹쳤으나, 코니 윌리스는 절대 거시적인 사항들로만 시선을 돌리지 않습니다. 아마 그게 이 소설이 선보이는 가장 큰 차별점이겠죠.
소설의 시점이 2054년과 1320년으로 갈리기 때문에 분위기 역시 달라집니다. 소설의 시점이 시간대를 넘을 때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전염병에 휘말린 현대 도시와 중세 유럽 도시는 똑같을 이유가 없죠. 그래서 2054년은 의학 스릴러처럼 보이고, 1320년은 중세 로망스 같습니다. 두 가지는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으나, 시간 여행은 두 시대를 교묘하게 연결하고, 톱니바퀴처럼 여러 사건들이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질병 아포칼립스와 시간 여행이 가장 큰 소재 같으나, 여기에 중세 로망스(보다 중세 서민들의 이야기) 역시 만만하지 않은 비중을 차지해요.
혼란스러운 질병 아포칼립스도 재미있고, 중세 서민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시간 여행자는 자신이 절실하게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320년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이 시간 여행자는 단순한 시간 여행자가 아니라 생존자일 겁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표류했다면, 현대 시간 여행자는 중세를 표류하죠. 코니 윌리스는 이 시간 여행자를 따라가고, 중세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깨알처럼 풀어놓습니다.
중세 유럽은 꽤나 낭만적인 단어입니다. 용맹한 기사 무용담과 서사 환상 소설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중세를 낭만적으로 포장하곤 합니다. 당장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온갖 화려하고 고즈넉하고 웅장하고 멋진 중세 판타지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현대인이 정말 1320년으로 돌아간다면, 고즈넉하거나 웅장한 장면을 별로 기대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른바 문명의 이기는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병원, 학교, 치안, 민주적인 토론, 교통, 통신…. 뭐, 이런 것들은 그저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곳곳에 병원균들이 들끓고, 해충들은 여지저기에서 설치고, 건물들은 낡았고, 강도들이 사람들을 폭행하고, 그 놈의 진절머리 나는 벼룩들이 침대에서 물어뜯고, 사람들은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민주적인 토론? 글쎄요, 신과 성직자들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토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소설은 중세 판타지를 신나게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초라하고 삭막한 중세 유럽만 남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시대를 분명히 살아갔습니다. 고대든 중세든 현대든, 인간은 인간입니다.
비록 중세가 초라하고 삭막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일상을 가꿨고, 그건 역사가 되었습니다. 코니 윌리스가 바라보는 역사관은 그런 것 같습니다. 시대적인 상황 역시 중요하나, 사람들의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이 중세 마을 역시 우정과 사랑과 유머와 인정을 보여주고, 일상을 그저 배경이나 병풍으로 밀어놓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시간 여행자는 중세 역사 전공자이기 때문에 중세를 탐험하는 것처럼 각종 지식들을 늘어놓습니다. 마치 역사학자가 쓰는 테크노 스릴러처럼.
무엇보다 독자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언어이고, 라틴어와 중세 영어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듯합니다. 솔직히 기본은 언어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시간 여행 이야기만 아니라 이계 진입 이야기에서도 언어가 가장 큰 문제이죠. 게다가 시간 여행자는 성탄절에 중세 영국으로 떠났고, 그래서 소설은 중세 유럽인들이 어떻게 성탄절을 보내는지 자세히 보여줍니다. 작가가 얼마나 고증을 정확히 살렸는지 모르겠으나, 이런 장면들은 잔잔한 한편 이질적인 재미를 더합니다. 특히, 기독교 문화와 별로 연관이 없는 아시아 독자는 중세 유럽 명절이 훨씬 낯설겠죠.
이런 요소들과 함께 요절복통 수다들과 희극들은 소설 전체를 관통합니다. 현대와 과거 모두 이런 요절복통 속에서 떠들고 웃고 뒹굽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엉뚱하고, 그런 엉뚱함들은 모이고 모이고 또 모입니다. 이런 엉뚱함들이 홍수처럼 넘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소설 주인공은 곳곳에서 발이 걸리고 넘어지고 벽에 부딪힙니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걸 아줌마 수다라고 부르는 듯합니다. 대도시가 전염병에 빠지고 시간 여행자가 중세에서 표류한다고 해도 이런 아줌마 수다는 빠지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코니 윌리스를 좋아하지 않으나, 진중함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신나게 배꼽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작가는 시종일관 수다들만 채우지 않았어요. 분명히 전염병은 도시와 마을을 덮쳤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소설 속의 어떤 등장인물이 끊임없이 되뇌이는 것처럼 '묵시적'입니다. 어쩌면 정말 코니 윌리스는 '둠스데이'를 의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쟁보다 전염병이 훨씬 무섭다고 하나, 정말 소설 속 상황은 묵시적이군요. 사회 인프라가 마비된다면, 현대 도시 역시 전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중세 시대는 훨씬 더하겠죠. 누군가는 인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고 말하나, 어쩌면 전염병의 역사일지 모릅니다.
<둠스데이 북>은 여러 가지를 혼합한 책입니다. 우선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질병 아포칼립스는 어마어마하고 위협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요절복통 수다들을 빼놓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은 아비규환 성탄절로 이어집니다. 멋지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