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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테러 호의 악몽> - 얼어붙은 지옥과 극지 괴수의 압박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테러 호의 악몽> - 얼어붙은 지옥과 극지 괴수의 압박

OneTiger 2018. 1. 15. 19:56

요즘처럼 춥고 눈이 내릴 때, 읽기에 딱 알맞은 소설들이 있습니다. <테러 호의 악몽>는 그런 소설들 중 하나일 겁니다. 프랭클린 탐사대를 소재로 삼은 비경 탐험 이야기죠. 프랭클린 탐사대는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영국을 떠났으나, 결국 혹독한 극지방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넜습니다. 영국 해군과 다른 탐사대들은 플랭클린 탐사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했으나, 프랭클린 탐사대는 의문 속으로 사라졌고, 여전히 난파와 실종 사건은 전말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여러 증거들이 더 많이 나타났다고 들었기 때문에 어쩌면 전모가 조금 더 밝혀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가혹한 북극에서 사라진 의문의 탐사대는 매력적인 소재이고, 작가 댄 시몬스는 북극 탐사대를 이용해 처절하고 압도적인 탐사 이야기를 펼칩니다. 아니, <테러 호의 악몽>는 그저 탐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감성은 생존하기 위한 끊임없는 사투이고, 살벌한 자연 환경은 탐사 대원들을 극단까지 사정없이 밀어붙입니다. 만약 지옥이 차갑게 변한다면, 이런 모습으로 변했을 것 같습니다. 프랭클린 탐사대는 하얀 지옥에 갇혔고, 그야말로 지옥 속에서 싸웁니다.



사실 비경 탐험 소설들에서 극지는 드물지 않은 소재입니다. 극지는 인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고, 문명은 차갑고 하얀 장벽 앞에서 발길을 멈춰야 했습니다. 요즘 강대국들은 극지에서 제국주의적인 영토권을 주장하나,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까지 극지는 인류가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는 불모지였습니다. 중세나 근대 사람들도 과연 세상의 얼어붙은 끄트머리가 어떨지 궁금해했고, 나름대로 상상력을 펼쳤죠. 당연히 판타지 작가들이나 SF 작가들은 이런 소재를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그래서 노틸러스는 두꺼운 얼음 밑으로 잠수했고, 아서 고든 핌은 기이한 펭귄들을 만났고, 미스카토닉 대학 탐사대는 광기의 산맥을 둘러봤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열어젖힌 빅토르 프랑켄슈타인 역시 인조인간을 쫓기 위해 극지를 향했습니다. 이런 전통은 판타지 소설들과 SF 소설들에 꾸준히 흘렀고, <테러 호의 악몽>은 그런 연장선에 서있을 것 같습니다. 음, 댄 시몬스가 저런 소설들을 얼마나 많이 참고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런 소설들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군요. <테러 호의 악몽>에서 북극은 여느 별세계 못지않은 기이함을 자랑합니다. 여기는 그저 하얗고 추운 지옥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별세계입니다.



소설 속에서 북극의 가혹한 자연 환경은 그 자체로서 주인공입니다. 가혹한 자연 환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괴물이고, 악독한 동장군이고, 서슬 퍼런 살인마입니다. 어마어마한 빙산들과 끝이 없는 하얀 벌판과 각종 크레바스들과 위압적인 눈보라를 묘사하기 위해 댄 시몬스는 총력을 기울입니다. 아마 독자마다 평가가 다르겠으나, 무엇보다 댄 시몬스가 북극의 자연 환경을 묘사하기 위해 애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극이라는 가혹한 자연 환경은 소설을 뒷받침합니다.


아마 프랭클린 탐사대가 열대 밀림이나 사막이나 온대림이나 고산 지대를 탐사했다면, 이런 가혹한 시련에 직면하지 않았을 겁니다. 설사 직면했다고 해도 그 시련은 차가운 지옥이 아니고 많이 달랐겠죠. 그만큼 북극이라는 자연 환경은 이 소설을 떠받치고, 그 자체로서 주인공이 됩니다. 댄 시몬스는 인간이 북극에서 처할지 모르는 온갖 위험들을 총망라합니다. 누군가는 얼어죽고, 누군가는 깊이를 알지 못하는 심연에 빠지고, 누군가는 피를 토하고, 누군가는 미쳐버립니다. 모든 죽음은 처절하고 끔찍한 동시에 장황한 서사시를 장식합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댄 시몬스는 특유의 장기를 발휘합니다.



시몬스는 서사시를 능수능란하게 엮어내는 작가입니다. 기이한 환경과 비참하고 참혹한 시련들과 어지러운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장엄하면서도 파국적인 이야기를 빚어내죠. 아마 시몬스는 우리나라에서 <일리움>이나 <히페리온의 몰락>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로 유명할 듯합니다. <테러 호의 악몽>은 그런 스페이스 오페라에 비해 확실히 규모가 작아요. 우주 전쟁과 극지 탐사선 두 척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작가의 필력은 우주 전쟁이나 극지 탐사를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북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외계 행성 같습니다. 만약 북극을 그저 얼음 바다로 생각하는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저 신비스러운 극지가 드러내는 웅장하고 다양하고 참혹한 장관들에 놀랄 겁니다. SF 소설을 읽을 때, 흔히 사람들은 낯설고 무섭고 위험한 환경을 체험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합니다. 이질적인 외계 행성은 그런 지평선을 확장하기 위한 매개체입니다. 비록 <테러 호의 악몽>은 SF 소설이 아니고 외계 행성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19세기 극지 탐사대가 북극을 돌아다닐 뿐입니다. 하지만 댄 시몬스는 북극이라는 환경을 다양하게 조명하고, 극지의 프랭클린 탐사대는 외계 행성을 방랑하는 우주 탐사대와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솔직히 겨울 행성은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드물지 않은 무대입니다. 구태여 <제국의 역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온갖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 속에서 겨울 행성은 혹독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어지간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겨울 행성은 <테러 호의 악몽>에 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프랭클린 탐사대가 직면하는 지옥은 그저 무진장 추운 환경이 아닙니다. SF 소설에서 중요한 것이 인물이 아니라 배경 설정이라면, <테러 호의 악몽>은 배경 설정이 소설의 분위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증명합니다.


비록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나, SF 소설을 읽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기이한 외계 행성을 묘사하고 싶은 창작가는 <테러 호의 악몽>을 쉽게 간과하지 못하겠죠. 미스카토닉 대학 탐사대가 방문한 광기의 산맥이나, 아서 고든 핌이 둘러보는 남극이나, 숙주에게 기생하는 외계 생명체가 살아가는 극지 연구소만큼, 이 소설의 북극은 기이하고 무섭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시무시하고 낯선 자연 환경은 극지 괴수라는 존재에서 정점을 찍는 듯합니다. 낯선 자연 환경에는 낯선 야수가 도사리곤 하죠. 프랭클린 탐사대는 가혹한 자연 환경만 직면할 뿐만 아니라 포악한 육식동물과 투쟁해야 합니다.



자연 환경이 소설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기둥이라면, 정체 모를 육식동물은 사건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길잡이일 겁니다. <죠스>의 백상아리처럼 이 육식동물이 소설의 모든 사건을 결정하는 방아쇠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건들이 육식동물에게서 비롯합니다. 이 야수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아니나, 적어도 프랭클린 탐사대에게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체 모를 육식동물이 프랭클린 탐사대를 기습할 때, <테러 호의 악몽>은 시대극을 넘어 환상 속으로 훌쩍 넘어갑니다. 당연히 작가는 이 야수가 무엇인지 쉽게 밝히지 않습니다.


환상과 현실을 가르는 경계선 속에서 탐사 대원들 역시 분분한 의견들을 나눕니다. 이 야수는 그저 몸집이 커다란 북극곰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선사 시대에서 살아남은 고대 생명체일까요? 아니면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종류일까요? 아니면 정말 외계에서 뛰쳐나온 괴물일까요? 작가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제시하나, 어느 것도 뚜렷한 답은 아닙니다. 그러는 동안 야수는 계속 프랭클린 탐사대를 습격하고, 대원들은 어느 순간에도 긴장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극지 환경 그 자체가 괴물임에도 또 다른 괴수가 습격하는 상황이죠.



개인적으로 작가가 정체 모를 육식동물을 묘사하는 동시에 북극곰에게 경외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댄 시몬스가 무슨 속내로 글을 썼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북극곰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은 마치 허먼 멜빌이 <백경>에서 향유 고래에게 보내는 찬가 같습니다. 사실 이 장엄한 육식동물은 여러 탐험가들과 학자들과 작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댄 시몬스 역시 그 점을 놓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북극 탐사대와 기이한 야수를 이야기한다면, 북극곰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지 못하겠죠.


정체 모를 육식동물 덕분에 <테러 호의 악몽>은 기이한 비경 탐험일 뿐만 아니라 기이한 괴수물이 되는군요. 여타 괴수물과 달리 이 소설에서 괴수는 중점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정말 중점적인 요소는 프랭클린 탐사대가 북극에서 살아남는 과정이죠. 하지만 정체 모를 육식동물은 연이어 탐사대를 습격하고, 괴수는 이 소설에서 빠지지 못하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테러 호의 악몽>을 괴수물이라고 불러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괴수물을 좋아하는 독자는 이 소설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겠죠. 특히 탐사대가 탐사선 속에서 야수를 추적하는 장면은…. 우주 탐사대가 우주선 속에서 외계 괴물을 추적하는 장면 같군요.



비경 탐험 이야기답게 <테러 호의 악몽> 속에서 탐사대는 탐험 아닌 탐험을 나섭니다. 영국을 떠난 이후, 프랭클린 탐험대는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땅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영국을 떠나기 전에 뭔가 좋지 않은 조짐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죠. 누군가는 탐험을 떠난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나, 탐험은 절대 낭만적이거나 신나는 모험이 아닙니다. 영국을 떠난 이후 그런 고생은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북극 탐험에 나선 이후, 온갖 고난들은 연이어 탐사대를 괴롭힙니다. 탐사대는 식량과 기후와 탐험 경로를 쉬지 않고 살펴야 합니다.


식량은 모자라고, 기후는 악독하고, 탐험 경로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밥그릇이 문제입니다. 탐사대는 단단한 건빵과 맛대리가 없는 염장고기만 먹어야 합니다. 혹한의 대지는 생명체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탐사대는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합니다. 가끔 운좋게 바다표범이나 북극곰을 사냥할 뿐입니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프랭클린 탐사 대장은 구두를 먹는 꿈을 꾸죠. 굶주림은 피곤하고 느릿느릿한 행군으로 이어집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탐사대는 언제나 추위를 잊지 못하고 추위에 둘러싸입니다.



솔직히 구태여 살아남을 필요가 없다고 느낄 만큼, 탐사대는 고난을 넘어 고난으로 향합니다. 탐사대를 몰살시키기 위해 북극 자체가 지독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죽음이 투쟁적인 생존보다 훨씬 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탐사대는 악으로 깡으로 버팁니다. 모순적이게도 그런 악과 깡은 허무적이고 묵시적인 감성을 부채질하고, 탐사대가 버티면 버틸수록 처참한 몰락이 훨씬 가깝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댄 시몬스는 쓸데없는 인간 승리나 박애를 빙산 밑바닥에 묻어버리고, 너무하다 싶을 만큼 탐사 대원들을 지옥 속으로 열심히 빠뜨립니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소설 전개부터 절정을 거쳐 후반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건 전개 과정이 다소 반복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극지 탐사대가 워낙 제한적인 조건에 갇혔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습니다. 그래서 사건 전개가 반복적으로 보일지 모르죠. 비단 <테러 호의 악몽>만 아니라 다른 비경 탐험 소설들도 이런 단점들을 드러내곤 합니다. 하지만 댄 시몬스가 보여주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기괴하고 장엄한 자연과 치밀한 고증은 저런 단점을 금방 덮습니다.



제가 관련 지식이 없기 때문에 <테러 호의 악몽>이 얼마나 자세히 실제 사건을 고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사 이 소설이 고증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해도 작가는 치밀하게 탐사 장비들과 지리를 묘사합니다. 설사 댄 시몬스가 고증을 틀렸다고 해도 독자는 이런 자세한 사항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겠죠. 특히, 탐사대가 두 탐사선에서 지내는 만큼, 댄 시몬스는 두 탐사선을 묘사하기 위해 심열을 기울입니다.


허먼 멜빌이 피쿼드를 널빤지 하나와 대갈못 하나까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댄 시몬스는 이리버스와 테러를 이물 처음부터 고물 끝까지, 돛대부터 갑판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봅니다. 단순한 선박이 아니라 성채나 요새 같군요. 아니, 대피소라는 표현이 어울리겠죠. 사실 북극에 고립된 이후, 두 탐사선은 정말 대피소가 되었어요. 어쩌면 작가의 상상이 들어갔을지 모르나, 저는 어디서부터 상상이고 어디까지 고증인지 잘 모르겠군요. 솔직히 그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고요. 게다가 작가는 비단 탐사 장비와 지리만 아니라 다양한 대원들을 하나씩 조명합니다. 다양한 인물들은 다양한 시점들을 전개하고, 독자는 탐사대의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굿서 박사와 존 어빙 소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혹한 시련 속에서 따스함을 잃지 않고 원주민을 사려 깊게 대하는 존 어빙이 좋았습니다. 탐사대와 북극 원주민들이 만나는 과정 역시 소설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존 어빙은 그런 만남을 대표하는 등장인물처럼 보입니다. 물론 댄 시몬스가 제국주의 탐사대와 극지 원주민들이 만나는 과정을 그저 낭만적으로 그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비경 탐험 소설은 탐험과 정복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기 쉽고, 창작가들은 항상 그 점을 주의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정복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끔찍한 식민지 시대를 거쳤음에도 제국주의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언제나 유럽 복지 국가는 선하고 정의롭습니다. 유럽 바깥은 모두 악독하고 악마들만 우글거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유럽 복지 국가들은 피투성이 식민지를 초래했고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 거대 자본들은 제3세계를 수탈하는 중이죠. 그래서 비경 탐험 소설은 유럽 탐사대를 낭만적으로 띄워주고 제3세계를 짓밟을지 모릅니다. 창작가들은 언제나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하죠.



한편 굿서 박사는 의사이고 생태학자입니다. 19세기 탐험대에서 선내 의사는 생태학자 역할을 맡았죠. 의술은 생물학이고 생태학은 생물학과 가깝기 때문에 선내 의사가 생태학자가 되는 것 같군요. 하지만 소설이 투쟁적인 생존을 강조하기 때문에 생태학자로서의 면모는 다소 약합니다. 이거 좀 아쉽군요. 뭐, 이렇게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편하게 자연 생태계만 조사하지 못하겠군요. 낚시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고….


아울러 극지 원주민 역시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들 중 하나입니다. 주요 등장인물들 중 유일한 원주민이고 유일한 여자로군요. 다른 등장인물들은 죄다 유럽 백인 남자들이고요. 그만큼 극지 원주민은 상징적이고, 소설의 주제를 전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작가가 이 원주민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좋았을 듯합니다. 의문과 수수께끼를 강조하기 위해 복선을 너무 감췄다고 할까요. 어쩌면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이 비약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그런 철학과 주제는 좋으나, 그게 소설의 사건 전개와 등장인물을 활용하는 방식과 다소 어긋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점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장엄하고 기이한 비경 탐험과 처절한 생존 투쟁과 무시무시한 괴수를 뒤덮지 못합니다. 이 겨울에 낯선 비경과 포악한 괴수를 보고 싶다면, <테러 호의 악몽>은 절대 간과하지 못할 작품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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