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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풀의 죽음>, 거대한 기근과 문명이라는 허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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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죽음>, 거대한 기근과 문명이라는 허울

OneTiger 2018. 4. 13. 20:02

존 크리스토퍼가 쓴 <풀의 죽음>은 제목처럼 풀이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풀은 밀이나 호밀, 보리, 귀리 같은 곡물들을 가리킵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사방으로 퍼지고, 농민들은 더 이상 각종 곡물들을 수확하지 못합니다. 전염병은 다른 식물들 역시 가만히 놔두지 않고, 따라서 소들이나 양들 역시 더 이상 목초지에서 풀을 뜯지 못해요. 이런 상황에서 감자나 비트 같은 뿌리 작물들은 여전히 멀쩡하고, 돼지처럼 뿌리 작물들을 먹고 살 수 있는 가축들 역시 안전합니다.


문제는 모든 농민이 비트나 돼지를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염병이 퍼지는 동안 국가 정부는 사태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농민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계속 농사를 지을 뿐입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졌음에도 다들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지 않아요. 사태는 파국으로 이어지고, 결국 굶주림이라는 공포는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합니다. 유기체 동물로서 인간에게 굶주림은 가장 무서운 재앙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의식주가 중요하다고 말하나, 옷이나 집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식량은 다릅니다. 인간은 식량을 계속 소비해야 하고, 식량이 떨어질 때 인간은 굶어죽습니다.



흔히 학자들은 농업 혁명이 인류 문명을 지탱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농업은 막대한 인구를 뒷받침하는 영역이고, 막대한 인구 없이 인류 문명은 유지되지 않습니다. 만약 농업이라는 디딤돌이 무너진다면? 식량 산업이 더 이상 막대한 인구를 지탱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온 세상은 펄펄 끓는 난리통에 빠질 겁니다. 식량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빵이나 고기를 쉽게 입에 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국가 정부 역시 제대로 식량을 배급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정부를 믿지 못합니다. 다들 먹거리와 안전을 보장하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나, 문제는 그런 장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충돌과 갈등과 싸움은 피하지 못하는 운명이 되었고, 남은 것은 잔인하고 추악한 야만성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명을 아주 쉽게 내던지고 기꺼이 (이른바) 야만인이 되기 원합니다. 설사 문명이라는 흔적을 간직하기 원하는 사람들조차 연이어 닥쳐오는 시련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다고 믿으나, 온갖 시련들은 그런 희망을 무참하게 꺾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문명은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냉정하게, 때때로 비꼬는 어조로 이런 야만성을 그립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별로 동정하지 않고, 냉정하게 거리를 지킵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등장인물들을 미화하거나 내세우거나 멸시하거나 왜곡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저 그런 추악한 비극들이 연이어 벌어진다고 적을 뿐입니다. <풀의 죽음>은 3인칭 시점이고, 작가는 소설 주인공의 심리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갑니다. 하지만 존 크리스토퍼는 심리나 내면, 의식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보다 어떻게 상황이 급박하게 바뀌는지 서술합니다.


3인칭 시점으로서 작가는 소설 주인공의 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으나, 그것보다 상황을 직접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만약 작가가 심리나 내면을 더 자세히 묘사했다면, 상황이 좀 더 주관적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작가는 일장연설이나 설교, 훈계를 피하고, 그저 문명이 가식적이고 문명인 역시 얼마든지 야만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할 뿐입니다. 특히, 작가는 소설 주인공 이외에 다른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직접 끄집어내지 않고, (주인공의 시각에서) 간접적으로 묘사합니다. 독자는 소설 주인공의 시각에서 작가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볼 겁니다.



대부분 훌륭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그런 것처럼, <풀의 죽음>은 독자에게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물음은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꿰뚫는 물음일 겁니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도착하는 목적지는 거기입니다. 독자는 소설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소설 주인공이 고민할 때, 독자 역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독자는 암울한 상황에 빠졌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 길은 꽤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과 독자가 그걸 선택하지 않는다면, 잔인한 세상은 아무 자비 없이 소설 주인공을 덮치고 갈갈이 찢어발기고 집어삼킬지 모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계속 강요하고, 소설 주인공(과 독자들)은 계속 선택해야 합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이 잠시 자비나 윤리나 동정이나 연민을 내보인다면, 어마어마한 재난은 소설 주인공을 무참하게 덮칠 테고, 소설 주인공은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목숨을 잃을 겁니다. 다른 장르들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런 물음에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사람들을 보호하는 문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른 장르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이런 물음을 문명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따라서 문명이 가로막는 금기들은 더 이상 금기가 아닙니다. 살인, 식인, 성 폭행, 강탈, 노예는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되고, 사람들은 그런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별로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문명이라는 껍데기를 당장 집어치우고, 순식간에 폭도와 약탈자와 노예 주인과 살인자와 식인종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금방 타락했다고 한탄하나, 잠시 한탄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한탄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덮치고 잡아먹을 겁니다. 이런 변화를 강조하는 것처럼 초반부부터 <풀의 죽음>은 윤리나 도덕을 강조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다른 윤리관과 도덕관으로 치장했고, 서로 비꼬거나 농담을 던지거나 멸시하거나 말다툼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꼬기와 농담과 멸시와 말다툼은 여전히 문명 안에 존재합니다. 문명이 무너졌을 때, 윤리관이나 도덕관 역시 함께 무너지고, 비꼬기와 농담과 멸시와 말다툼은 현실이 됩니다. 윤리적인 사람 역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냉정한 사람은 잠시 다른 사람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흔히 평론가들은 SF 소설이 전복적이고 세상을 뒤집는 장르라고 말합니다. <풀의 죽음>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정말 세상을 뒤집습니다. 아니, <풀의 죽음>은 세상을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짓밟힌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남아야 하고, 그들 역시 다른 누군가를 짓밟아야 합니다. 이제 문명이 더 이상 가식을 드리우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쉽게 솔직해지고, 솔직하게 야만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도구가 되고, 도구로서 살아남습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거시적인 문명이나 새로운 사회 구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작가는 주연 일행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바뀌는 과정을 조명합니다. 어떤 독자는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들보다 <풀의 죽음>이 규모가 작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풀의 죽음>은 그저 문명이 무너졌다고 말할 뿐이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가 일어서는지 말하지 않아요. 아예 그런 부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연 일행은 런던부터 머나먼 계곡까지 (끔찍하게) 여행하나, <풀의 죽음>은 그저 계속 그들을 따라다닐 뿐입니다. <풀의 죽음>은 새로운 사회보다 인간이 바뀌는 과정에 더 주목합니다. 그래서 규모는 작으나, 훨씬 추악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비단 <풀의 죽음> 이외에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간이 야만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숱한 작가들은 얼마나 빨리 인간이 타락하고 야만성을 드러내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풀의 죽음>은 좀 더 과감한 것 같습니다. <풀의 죽음>은 소설 주인공이 준비하거나 대비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재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약탈과 성 폭행은 곧바로 소설 주인공을 덮칩니다. 소설 주인공은 잠시 기다리거나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주인공은 약탈과 성 폭행에 맞서야 하고, 그걸 후회하거나 회의할 여유가 없습니다.


<풀의 죽음>은 사건을 복잡하게 꼬거나 질질 끌거나 늘리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이 소설에서 줄거리는 전부가 아닙니다. 줄거리보다 다양한 비극들이 훨씬 중요할 겁니다. 줄거리는 그런 비극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일지 모릅니다. 비극들은 빠르게, 아무 조짐 없이 소설 주인공을 덮치고, 그때마다 소설 주인공은 다급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풀의 죽음>은 풍성하거나 방대한 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훨씬 극악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풀의 죽음>이 훨씬 풍성하거나 방대했다면, 이런 다급함과 긴장감이 그만큼 사라졌을지 몰라요.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문명이나 인간성은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다들 문명을 집어던집니다. 약탈하고 살인할 수 있을 때, 다들 인간성을 훌러덩 벗습니다. 문명이나 인간성은 연약한 기반이고,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문명과 인간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봤을 때, 아마 수많은 독자들은 탄식하거나 분노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한다면, 독자는 문명이나 인간성이 그저 반짝거리는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지 몰라요.


<풀의 죽음>은 영국 소설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런던 중산층 시민입니다. 유럽은 세련되고 고상하고 지적인 문명 국가이고, 소설 주인공 역시 그런 문명인이죠. 그런 문명인들이 약탈하고 살인하고 강간할 때, 독자는 문명이 지옥으로 타락했다고 한탄할지 몰라요. 하지만 정말 유럽 문명이 세련되고 고상하고 지적인가요? 정말 유럽 사람들이 진정한 문명인인가요? 유럽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과 동남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인도에서 영국이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유럽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유럽은 자본주의를 만든 대륙입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빈민들이 평등한 공동체들을 만들었을 때, 유럽 국가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나요? 유럽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터뜨린 대륙입니다. 러시아가 전쟁을 멈추라고 말해도, 유럽 거대 자본가들은 계속 양극화와 빈부 격차를 높였고, 유럽 국가들은 파쇼주의를 제대로 막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가 악마라고 욕하죠. 오직 러시아만 전쟁을 멈추라고 경고했음에도, 유럽 국가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그리고 세상은 유럽 대륙이 고상하고 세련된 문명이라고 빨아주고, 유럽 대륙이 저지른 추악한 짓거리들을 외면하죠. 러시아(소비에트 연방)가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인 맥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여전히 제3세계 빈민들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음에도, 유럽 대륙은 고상한 문명이죠. <풀의 죽음>이 잔인하게 보이나요? 하지만 이미 현실은 지옥입니다. <풀의 죽음>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인가요? 하지만 이미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제3세계를 딱하게 바라볼 뿐이고, 아무 것도 바꾸지 않고, 계속 유럽 대륙만 빨아주죠. 왜 그들이 고상한 강대국이 되었는지 아무도 따지지 않아요. 아무도 서구적인 근대화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죠.



<풀의 죽음>은 서구적인 허영을 꼬집은 책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소설 속에서 영국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고민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우리 영국인" 운운합니다. <풀의 죽음> 같은 책을 읽을 때마다, 저는 현실이 이미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상하고 세련된 영국이 타락했다고요? 하지만 이미 영국은 고상하고 세련된 문명이 아니에요. 영국은 자본주의 강대국이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숱한 빈민들을 짓밟는 중이죠. 자칭 문명인들이 그렇게 쉽게 타락하는 이유는 이미 문명이 폭력을 포함했기 때문입니다. 대재난은 그저 허울을 벗길 뿐이죠. 서구적인 근대화가 만든 현실 자체가 이미 폭력입니다. 독자가 <풀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읽었다면, 저는 독자가 그런 현실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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