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의 개척자>, 외계 위성의 처절한 개척 농업 본문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우주의 개척자>는 일종의 우주 탐사물입니다. 아니, 우주 탐사보다 우주 개척물이 옳은 표현일 겁니다. 원래 제목은 '하늘의 농민'이고, 소설 주인공은 정말 농민입니다. 소설 주인공이 하늘의 농민인 이유는 주인공이 지구가 아니라 외계 위성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입니다. 왜 외계 위성에서 주인공이 농사를 지을까요. 이는 우주를 개척하기 위한 발판입니다. 인류는 한창 우주로 뻗어나가는 중이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외계 행성들과 외계 위성들을 개척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들 중 하나이고, 지구를 버리고 다른 위성으로 건너가고,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생존이나 개척을 이야기하는 SF 소설들은 항상 농사를 간과하지 않아요. 고전적인 <신비의 섬>부터 <플래닛베이스> 같은 최신 비디오 게임까지, 새로운 땅이나 새로운 행성에서 살기 위해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채집이나 사냥을 제외한다면, 농업은 인류 문명을 떠받치는 1차적인 디딤돌이고, 이는 <우주의 개척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이 농민이나 농업을 본격적으로 묘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주의 개척자>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성장 소설들 중 하나입니다. 성장 소설로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밝고 신나고 요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우주로 나가고 싶어하는 소년이고, 우주로 나가기 위한 지식과 용기 모두 갖추었습니다. 소년은 당당하게 우주로 나가고, 외계 위성에서 농민(개척민)이 되고, 새로운 마을에 참여합니다. 하인라인이 쓴 성장 소설들은 우주 보이 스카웃이라고 불리곤 합니다. 소년들이 열정적인 개척 정신을 발휘하고, 여기저기 모험하고, 풍부한 생존 능력을 자랑하고, 여러 사람들을 조직하기 때문입니다.
보이 스카웃을 창시한 어니스트 시튼이 로버트 하인라인을 뭐라고 평가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인라인이 쓴 성장 소설들은 정말 우주 보이 스카웃 같습니다. (우주 걸 스카웃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우주의 개척자>는 아예 대놓고 소설 속에서 우주 보이 스카웃을 보여줍니다. 소설 주인공은 당연히 낙천적이고, 외계 위성에서 온갖 위협들을 마주하나,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맞서 싸웁니다. 이런 모험과 위기 속에서 하인라인은 자신만의 과학적 상상력을 펼칩니다.
<우주의 개척자>를 다른 성장 소설들과 비교한다면, <은하를 넘어서>만큼 신나거나 빠르지 않습니다. <은하를 넘어서>를 읽었을 때, 저는 정말 신나는 놀이 동산에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아마 소설 주인공이 혼자,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낯선 우주에서 생존해야 했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우주의 개척자>에서 소설 주인공은 개척 마을의 구성원입니다. 비록 이 마을은 외계 위성의 초라한 집단이나, 적어도 어느 정도 문명 세계입니다. 개척 마을은 문명 세계가 되어가는 중이죠. 소설 주인공은 거기에 속했고, 그래서 혼자 모험하거나 생존한다는 느낌은 많이 엷습니다. 자연 재해가 닥친다고 해도, 이웃집 아저씨나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힘을 합칠 수 있고요.
그래서 저는 모험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하늘의 터널> 같은 소설은 개척 마을이 무슨 위험에 빠질 수 있는지 경고하고, 꽤나 음울한 기운을 풍기죠. <하늘의 터널>에서 로버트 하인라인은 작은 개척 문명을 묘사하기 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인라인이 자신의 이상을 너무 상황에 밀어넣은 것 같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겠으나, 소설 상황과 작가의 이상이 다소 동떨어진 듯합니다.
<우주의 개척자>는 그렇게 엉뚱하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인라인은 어떻게 소설 주인공이 재치와 용기와 지식으로 위험과 재난에 맞서는지 그립니다. 저는 이른바 개척 정신이라는 것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결국 대규모 개척 정신은 침략과 학살로 이어집니다. 인류 역사에서 대규모 개척 정신이 평화로운 정착으로 끝난 적이 별로 없었죠. 특히, 로버트 하인라인이 사랑하는 아메리카 개척은 침략과 학살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아메리카 개척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극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개척자>는 재미있는 소설이고, 개척 정신이라는 요소를 충분히 자극합니다. 이 소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문명을 일구는 로망을 건드려요. 개척 정신은 절반쯤 탐험 정신과 비슷할 겁니다. 저는 인간에게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는 호기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먼 곳을 쳐다봤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직접 거기로 떠나고 거기를 탐사해야 합니다. 개척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척민이 어딘가에 정착하기 원한다면, 먼저 탐험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개척 소설들은 비경 탐험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를 파악했다면, 이후 그들은 새로운 장소에 맞는 새로운 사회를 꾸려야 합니다. 전통적인 사회는 새로운 장소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낯선 땅에 전통을 도입하는 과정을 좋아하겠으나, 그건 항상 쉽지 않을 겁니다. 외계 위성에서 사람들이 지구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많이 힘들겠죠. 외계 위성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회를 펼칠 테고, 그래서 개척 소설은 재미있을 겁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파격적이고 새로운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이, 그럴 이유가 없죠. 하인라인은 철저하게 계급 구조 사회를 지향합니다.
<우주의 개척자> 역시 거기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낯선 공간을 돌아다니고, 바쁘게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모습은…. 독자에게 어서 새로운 땅으로 떠나라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하인라인은 만담과 재치를 여기저기 퍼뜨리고, 엄중하고 진지한 과학적 묘사들이 있으나, 책장은 술술 넘어갑니다. 몇몇 군데는 식상하나, 하인라인이 아무 이유 없이 이야기꾼이라고 불리지 않았을 겁니다.
존 클루트를 비롯한 여러 SF 평론가들은 SF 소설이 공간적인 이동을 그린다고 말합니다. SF 소설은 공간적인 이동을 그릴 수 있는 장르입니다. SF 소설은 인류를 심해와 지저와 다른 차원과 외계 행성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언제나 탐험은 기술과 이성과 지식을 동반했습니다. 별자리를 읽고 나침반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머나먼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 것처럼 첨단 과학 기술은 인류는 점점 더 머나먼 장소로 보냅니다. 그렇게 머나먼 장소에서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이 생명의 요람과 문명 세계를 벗어났다고 느낍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더욱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요람과 문명 세계는 안락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쉽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을 반성할 수 있을까요. 문명 세계보다 낯선 장소가 낫겠죠. <우주의 개척자>는 작은 문명이 힘겹게 일어서는 과정을 묘사하고, 이런 소설에서 독자는 인류 문명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겠죠. 첫째 문단에서 저는 <우주의 개척자>가 우주 탐사물이 아니라 우주 개척물이라고 농담했으나, 이런 우주 개척(탐사)물은 그런 반성과 회의에 적합한 장르입니다. 이런 소설이야말로 가장 사이언스 픽션다운 소설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주의 개척자>는 대책 없이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긍정적이나, 하인라인은 문명이 위기에 부딪힐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아무리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설정은 환경 디스토피아에 가깝고, 암울한 지구는 외계 위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인구 폭발 때문에 지구 사람들은 굶주리고, 소설 주인공은 그런 굶주림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지구를 탈출했어요. 어쩌면 주인공이 외계 위성을 개척한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 모릅니다. 지구가 너무 싫었기 때문에, 지구가 암울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지구를 탈출했고 외계 위성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삶 역시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사회 역시 지구와 어느 정도 묶였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먼저 이주했고 많은 부를 얻었으나, 누군가는 나중에 이주했고 가난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지구에서 외계로 이주하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느라 애씁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절대 개척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이주는 힘겨운 과정이고, 외계 위성을 개척하는 과정은 훨씬 힘겨운 과정입니다.
문제는 이런 고난과 장애가 꽤나 인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주의 개척자>가 말하는 고난과 장애는 인위적입니다. 이는 아주 억압적인 계급 구조에서 비롯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하인라인이 그런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비판하나요? 하인라인이 계급 구조를 비판하고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나요? 그렇지 않아요. 하인라인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과 장애가 존재하기 전에 억압적인 계급 구조가 존재합니다. 왜 인구 폭발 때문에 지구가 몸살을 앓아야 할까요. 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렇게 인구를 늘리고 함부로 자연 환경을 훼손할까요.
그들이 억압적인 계급 구조를 타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등한 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이 계급 구조를 타파할 때마다, 기득권들이 그런 사람들을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민들을 계속 세뇌하기 위해 기득권들은 현실을 왜곡하고, 이런 억압적인 구조가 당연하고 옳다고 거짓말들을 떠듭니다. 하인라인은 외계 위성과 하드 SF 연출을 보여주나, 저런 억압적인 구조를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인라인 역시 세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배 계급에 충성하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이 미래 사회를 논한다는 상황은 슬프군요.
<우주의 개척자>는 우주 수송선을 메이플라워라고 부릅니다. 뭔가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이죠. 그리고 그 이름은 엄청난 학살을 불렀습니다.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이 평화로운 천사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유럽 백인들이 철저한 악마이고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이 무조건 평화로운 성인군자라고 주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럽 백인들이 어마어마한 학살을 벌였다는 사실입니다. 설사 북아메리카 부족민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해도, 유럽 백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을 권리는 없죠.
하지만 유럽 백인들은 그렇게 학살했고, 그래서 캐나다와 미국 같은 강대국이 등장했습니다. 이른바 서구 문명은 그런 상황을 얼마나 많이 반성할까요. 미국 민주당 같은, 버락 오바마 같은 뭔가 온건한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반성할까요. 비단 북아메리카 부족민들만 아니라 다른 동남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역시 피해를 입었습니다. 서구 문명이 그걸 반성하나요. 그렇지 않아요. 설사 반성한다고 해도, 다들 입만 뻥긋거릴 뿐이죠. 그리고 로버트 하인라인 같은 SF 작가 역시 그렇죠.
<우주의 개척자>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머나먼 땅을 둘러보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과정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개척자>는 억압적인 구조와 학살을 인정합니다. 아니, 외계 문명을 만드는 SF 소설은 당연히 그런 억압과 학살을 타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SF 소설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우주의 개척자> 같은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왜 제가 SF 소설을 읽는지 회의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