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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이 <풀의 죽음>에게 대답하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빼앗긴 자들>이 <풀의 죽음>에게 대답하다

OneTiger 2018. 4. 20. 20:09

존 크리스토퍼가 쓴 <풀의 죽음>은 사람들이 못 먹고 굶주리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제목처럼 온갖 작물들이 시들고, 식량들이 부족해져요. 사람들은 굶주리고, 굶주림은 이성과 문명이라는 가식을 벗기고, 마침내 다들 서로 죽이기 시작합니다. 좀 더 먹기 위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때리고 짓밟고 죽이고 부려먹습니다. 사회적 안전망 따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정부는 국민들을 버리고, 국민들은 신뢰와 화합을 버리고, 문명 세계는 죽고 죽이는 무법천지가 됩니다.


<풀의 죽음>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미화하거나 왜곡하거나 우회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얼마나 빨리 문명 세계가 무법천지로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얼마나 쉽게 사람들이 가식을 집어던질 수 있는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문명인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그저 착각이나 허영에 불과할 뿐이고, 문명인은 아주 쉽게 악마가 될 수 있어요. <풀의 죽음>은 그런 상황을 아무 여과 없이 제시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봅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등장인물들을 함부로 두둔하거나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가식적이고, 그렇게 빨리 타락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소설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주먹을 움켜쥐거나 가슴을 두드렸을 겁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문명을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빨리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에. 남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자를 폭행할 때, 어떤 독자는 주먹을 움켜쥐었을 겁니다. 어른들이 아이를 빈곤 속에 버릴 때, 어떤 독자는 가슴을 두드렸을 겁니다. <풀의 죽음>은 그런 상황을 계속 제시하고, 독자들은 연이어 탄식하거나 주먹을 움켜쥐거나 가슴을 두드릴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제발 암울한 상황이 빨리 끝나기 바랄 겁니다.


<풀의 죽음>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블랙홀처럼 급박한 상황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기는 소설입니다.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급박한 상황 속으로 빨려들어갈 테고,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무법천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자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라고 물어볼 겁니다. <풀의 죽음>은 그런 물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설입니다. 무릇 훌륭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런 물음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만약 어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그런 물음을 이끌어낸다면, 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훌륭한 완성도를 갖추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그저 탄식하거나 주먹을 움켜쥐거나 가슴을 두드려야 할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그런 반응이나 소감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존 크리스토퍼는 아주 암울한 상황을 사변했으나, 이미 현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이미 제3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갑니다. 강대국 시민이라고 해도, 돈이 없거나 힘이 없다면,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죽어가야 합니다. 그들이 비참하게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유는 현대 문명이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샤를 푸리에나 헨리 조지가 지적한 것처럼 빈곤은 풍요에서 비롯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착취하기 때문에 현대 문명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유럽 강대국들은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짓밟았고 막대한 자원들을 가져갔습니다. 미국은 흑인 노예들을 부려먹었습니다. 노예 해방 이후, 흑인 농장 노예는 흑인 임금 노예가 되었고, 계속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숱한 자본가들은 계속 노동자들을 살인적인 공장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저항할 때, 자본가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탄압했죠. 현대 문명은 그런 폭력적인 과정들을 거쳤습니다.



그런 폭력적인 과정들을 거쳤기 때문에 현대 문명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폭력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도탄에 빠지고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문명 사회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명 사회는 이미 문명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걸 문명 사회라고 생각하고, 그저 자본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를 열심히 빨아줄 뿐이죠. <풀의 죽음>은 문명 사회가 금방 타락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나, 이미 문명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풀의 죽음>이 무서운 소설일까요. 네, 이 소설은 무섭습니다. 어설픈 3류 귀신보다 <풀의 죽음>은 훨씬 무섭습니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자본주의와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입니다. 그것들은 정말 현실적인 폭력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폭력입니다. 만약 독자가 <풀의 죽음>을 무섭게 읽었다면, 독자는 현실의 모순과 착취와 수탈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겁니다. 독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기만이고 위선일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이미 존재합니다. 온갖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그저 그걸 색다르게 바꿨을 뿐입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풀의 죽음>에서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입니다.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됩니다. 하지만 왜 이른바 문명인이 그런 지경에 빠져야 할까요. 만약 절대적인 식량 생산량이 부족하다면, 사람들은 함께 굶주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족한 식량을 함께 나눠먹고, 함께 굶주릴 수 있어요. 무법천지를 만드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은 방법이죠. 그렇게 다들 시련을 견디는 동안, 작물들이 다시 자라난다면, 사람들은 다시 잘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다들 서로 어깨를 두드리고 그들이 거친 고난을 뒤돌아볼 수 있겠죠.


하지만 <풀의 죽음>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정부는 식량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감추느라 급급했습니다. 중대한 재난이 닥쳤음에도, 사람들은 서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민주 시민들은 모든 결정을 국가 정부에게 맡겼고, 함께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오직 국가 정부만 믿었을까요. 왜 이른바 민주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을까요. 왜 다들 그렇게 서로 싸우고 죽이고 때리고 부려먹었을까요.



저는 자본주의 체계와 국가 이데올로기가 폭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취와 수탈 없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미 더러운 고름들을 흘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착취와 수탈 위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서있었습니다. 오직 이윤만을 노리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상품으로 만듭니다. 자본주의는 상품이 되지 않는 것들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배제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임금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굴종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굴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굴종을 타파하기 원할 때, 국가는 자본주의를 편들고 저항을 무참하게 진압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고, 국가는 그런 수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농민들이 죽거나 노동자들이 죽거나 빈민들이 죽어도, 자본주의가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면, 국가는 자본주의를 편듭니다.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국가는 어마어마한 세금과 비극적인 침략 전쟁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한 재난이 닥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금방 폭도가 될 겁니다.



자본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는 폭력적인 상황을 조장합니다. 착취와 수탈과 학살을 미화하거나 왜곡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폭력이 옳다고 사람들을 세뇌시킵니다. 경쟁은 좋은 것이고, 사람들은 대기업들과 국가 정부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현재는 고정된 것이고, 역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문명은 역사적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자본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흐름을 필수적으로 부정합니다.


자본가는 그저 자본가일 뿐이고, 국가는 그저 국가일 뿐입니다. 자본가는 당연히 자본가이고, 임금 노동자는 당연히 자본가에게 굴복해야 합니다. 빈민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빈민이고, 당연히 굶어죽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비열하고 이기적이라고 가르쳐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억압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자본주의만 아니라 온갖 억압적인 사회 구조들은 언제나 생물적인 이유를 나불거렸죠. 왕은 태생적으로 고귀하고, 백인은 태생적으로 흑인보다 잘났고, 남자는 태생적으로 여자보다 똑똑하고, 자본가는 태생적으로 노동자보다 성실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X랄 맞은 헛소리입니다. 태생적으로 고귀한 왕과 잘난 백인과 똑똑한 남자와 성실한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기득권을 빨아주는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기득권들은 이런 헛소리들을 끊임없이 퍼뜨리고, 사람들은 정말 태생적으로 왕이 고귀하고, 백인이 잘났고, 남자가 똑똑하고, 자본가가 성실하다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라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할 때, 자본주의와 국가는 마음껏 약자들을 착쥐하고 수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건 후천적인 영향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무시하는 야생 동물조차 다른 개체를 도와줍니다. 어쩌면 그것조차 이기적인 행동일지 모릅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호의적인 행동 역시 이기심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호의적인 행동이 이기심에서 비롯한다고 해도, 우리가 정말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사회 구조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급한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어요.



만약 평등한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계속 살아간다면, 어떻게 그들이 재난을 극복할까요.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사람들을 세뇌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평등하게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빼앗긴 자들>이 거기에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빼앗긴 자들>이 굶주리는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유토피아 소설들과 달리, <빼앗긴 자들>은 가난한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풍부한 생산력과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나, <빼앗긴 자들>은 이상적인 공동체가 가난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굶주림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무법천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주 거대한 기근이 공동체를 덮쳤으나,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때리고 부려먹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아예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식량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정말 커다란 폭동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은 두 눈을 뒤집고 식량 차량에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전부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성인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평소에 그들이 그저 평등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은 습관이고, 그들은 그저 습관을 지켰을 뿐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도덕이나 선의를 남발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평등한 공동체 역시 커다란 갈등에 휩싸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평등한 사람들 역시 그저 인간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죽이거나 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투나 폭력은 대대적인 폭동이나 무법천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평등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이 현실을 왜곡하거나 사람들이 세뇌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빼앗긴 자들>은 평등한 공동체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고 고발합니다.


하지만 <풀의 죽음>과 달리, 거대한 굶주림에 직면해도, 그런 평등한 공동체는 무법천지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설사 숱한 작물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사람들은 함께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겁니다. <풀의 죽음>에서 전국의 농민들이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농업을 논의했을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함께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조건 시장 경제와 중앙 정부를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에서 사람들은 시장 경제와 중앙 정부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공동체는 거대한 위협에 훨씬 논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풀의 죽음>에서 감자 같은 작물은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뿌리 작물을 건드리지 않았고, 그래서 예민한 농민들은 감자와 비트를 심었습니다. 만약 전국의 대부분 농민들이 뿌리 작물을 길렀다면, 사람들은 대대적인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국가 정부를 믿었고, 국가 정부가 약자들을 지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타났을 때부터 근대 국가는 약자들을 짓밟았어요. <풀의 죽음>에서 국가 정부는 아주 쉽게 시민들을 버립니다. 덕분에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약탈하기 시작해요.


만약 <빼앗긴 자들>에서 평등한 공동체가 이런 바이러스를 직면했다면? 아마 평등한 공동체는 뿌리 작물들을 많이 심어야 한다고 논의했을 겁니다. 평등한 공동체는 시장 경제를 믿지 않고, 그래서 세금 문제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평등한 공동체는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시장 경제가 무너질지 걱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다들 뿌리 작물을 심었을 테고, 다들 굶주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 겁니다. 유토피아 소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 좋은 대답이 되는 것처럼 <빼앗긴 자들>은 <풀의 죽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평등한 공동체가 쉽게 찾아올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빼앗긴 자들>에서 평등은 습관입니다. 평등이 습관이 되기까지, 평등한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계속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사람들이 노예 근성을 쉽게 버릴 수 있을까요. 아니,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사회 구조가 바뀐다고 해도, 그런 사회 구조는 금방 인간성을 바꾸지 못할 겁니다.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오랜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습관을 익힐 때, 마침내 인간성 역시 바뀌겠죠.


저는 인간성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회 구조가 바뀐다고 해도, 평생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금방 주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고정 관념은 쉽게 부서지지 않고, 흡혈귀처럼 관념에 들러붙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항 운동은 힘들고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힘들고 멀다고 해도, 아예 저항 운동을 포기하면 안 될 겁니다. 만약 우리가 거대한 재난을 막고 싶다면, 우리가 평등하게 거대한 재난을 물리치고 싶다면, 우리는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써야 할 겁니다. 우리는 꾸준히 저항하고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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