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붉은 별>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난관 본문
제목이 풍기는 느낌처럼 소설 <붉은 별: 어떤 유토피아>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대략적인 내용은 유토피아 소설들이 즐겨 이용하는 전형적인 줄거리를 따릅니다. 수많은 유토피아 소설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우연히 다른 문명을 방문하고, 그 문명을 둘러봅니다. 소설 주인공은 낯선 문명이 자신의 문명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문명을 비판하죠.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사회를 이상적으로 바꾸자는 주장입니다.
19세기에 SF 소설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 이런 유토피아 소설들은 이미 수없이 나왔죠. 근대 작가들 역시 인간이 다른 행성을 방문하고 외계인들의 사회를 둘러보는 내용을 썼습니다. 당연히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은 많이 모자랍니다. 인문학적이거나 사회 과학적인 주제가 강했기 때문에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오지를 헤매는 동안 낯선 문명과 만나거나 우연히 낯선 문명에 불시작하거나 낯선 미래 문명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갑니다. 아니면 신이나 초인이 개입할 수 있죠. 허버트 웰즈처럼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을 중시하는 작가 역시 판타지에 가까운 타임슬립을 이용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19세기 이후, 유토피아 소설들은 SF 소설과 만납니다. 그리고 유토피아 소설들은 본격적으로 SF 울타리 안에 들어가죠. <붉은 별>은 그런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자연 과학자답게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어설픈 타임슬립이나 초인을 집어넣지 않습니다. 지구인을 화성으로 보내기 위해 보그다노프는 우주선과 우주 항해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게다가 작가는 달에 가기 위해 대포를 쏘는 방법이 무식하고 엉터리라고 지적합니다. 보그다노프는 누구인지 적지 않았으나, 어쩌면 쥘 베른을 깠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서 쥘 베른은 대포를 쐈고 탐사대는 달로 날아갔죠. 20세기 관점에서 <지구에서 달까지>는 꽤나 우스꽝스러운 소설입니다. 하지만 미래가 과거를 돌아본다면, 언제나 과거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겁니다. (인류가 미래까지 살아남는다면) 미래 사람들은 20세기나 21세기 SF 소설들을 우습게 여길지 모르죠. 솔직히 <붉은 별> 역시 별로 엄중한 하드 SF 소설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나름대로 열심히 우주 항해를 묘사했으나, 석연하지 않은 부분들이 꽤나 많습니다. 우주선 연료는 가상의 물질이고, 작가가 너무 가상의 물질에 매달리는 듯해요. (21세기 SF 소설의 타키온 엔진이나 웜홀 엔진 역시 엄중한 상상력은 아니죠.)
과학자로서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을 살렸겠으나, <붉은 별>에서 우주 항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소설 주인공은 열정적인 공산주의자이고,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고, 혁명 동지들은 연이어 갈등하고 싸움을 벌이죠. 언제나 그렇듯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고,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좌파들은 항상 갈등하고 분열하고 내분을 벌입니다. 누군가는 좌파가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좌파는 당연히 분열합니다. 좌파는 당연히 제대로 뭉치지 못합니다.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어떻게 미래로 갈지 잘 모릅니다. 당연히 좌파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칠 테고, 제대로 뭉치지 못하겠죠. 좌파는 이상적이고 박애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좌파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분열이 좌파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만약 좌파가 너무 똘똘 잘 뭉친다면, 저는 그런 현상을 의심하겠습니다. 어쩌면 그건 사기꾼 집단일지 모르죠.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어떻게 사람들이 똘똘 뭉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좌파가 되는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붉은 별>에서 소설 주인공 역시 가시밭길을 걷는 중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어떤 화성인을 만나고, 그 화성인은 화성으로 가자고 권유합니다. 주인공은 상당히 놀라나, 곧바로 수락하고 우주선에 탑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소설 주인공이 화성인을 만나는 부분을 대충 넘어갑니다. 미지와의 조우나 우주의 경이, 뭐, 이런 거 없습니다. 보그다노프는 얼른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설명하기 원했고, 그래서 미지와의 조우를 후딱 지나갑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인간이 미지를 조우하는 순간이야말로 SF 소설이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겁니다.
밀림 탐사대가 공룡을 발견했을 때, 우주 승무원들이 외계 문명과 접촉했을 때, 해커가 기지개를 켜는 인공 지능을 봤을 때, 잠수정이 신비한 해저인들과 만났을 때, 그 어떤 장르보다 SF 소설은 빛날 수 있습니다. SF 소설은 인간 이외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래서 다른 소설들보다 빛날 수 있어요. 자연 과학자답지 않게 보그다노프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후딱 우주선을 타고, 후딱 화성으로 날아가고, 자세히 공산주의 사회를 둘러봅니다. 화성은 완벽한 계획 경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성에서 머무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노동, 예술, 교육, 가족 등을 둘러보고, 지구의 자본주의와 대조합니다. 화성인들은 계획 경제를 이룩했고, 모든 사람은 원하는 대로 노동을 선택합니다. 화성에 양자 컴퓨터나 고도의 인공 지능은 없습니다. 화성인들은 직접 통계를 짜고, 어떻게 사람들이 노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 계산합니다. 저는 예술이나 교육, 가족보다 이런 노동 선택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서 양자 컴퓨터나 인공 지능 없이 인류가 계획 경제를 실행할 수 있을까요. 그건 무슨 모습일까요. 현실 속에서 인류가 계획 경제를 실행한다면, <붉은 별> 같은 모습이 될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붉은 별>은 20세기 초기 소설이고, 그래서 다소 낡은 상상력일지 모르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인류는 불완전한 동물이고, 계획 경제 역시 완벽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계획 경제는 숱한 부작용들을 낳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계획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인류가 계획 경제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계획 경제로 가는 동안 인류는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할 겁니다. 공유 없는 계획 경제는 국가 독점 경제에 불과하겠죠.
계획 경제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거대 정부가 경제를 계획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남긴 유산이죠. 저는 소비에트 연방에 여러 장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를 실행하겠다고 다짐했고, 몇몇 부분에서 좌파적인 정책들을 실행했습니다. 하지만 1차 대전과 적백 내전과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공격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은 계획 경제를 실행했으나, 사회적인 공유와 노동자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죠.
진짜 공산주의에 접어들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빨리 자본주의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회적인 공유와 노동자 통제는 멀리 밀려났습니다. 저는 이게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한다고 설명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빨리 자본주의를 따라가야 한다는 발상에 집착했고, 그래서 사회적인 공유를 집어던졌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거대 정부의 계획 경제라고 생각할 뿐이고, 사회적인 공유와 노동자 통제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죠.
<붉은 별> 같은 소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붉은 별>에서 독자는 사회적인 공유와 노동자 통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산 수단, 토지, 운하, 공장, 사무실, 농장 등은 누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의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 경제와 노동자 통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습니다. 왜 모두 함께 생산 수단을 소유해야 할까요. 사적 소유에 익숙한 사람에게 사회적인 공유는 이단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거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보그다노프는 수치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왜 사회적인 공유가 정당한지 말하지 않아요.
저는 보그다노프가 그 부분을 훨씬 자세히 말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그저 계획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모습만 보여주고, 밑바탕에 깔린 사상들에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노동 선택을 설명한 이후, <붉은 별>은 다른 모습들을 연이어 제시합니다. 가족은 존재하나, 공공 육아가 꽤나 활발합니다. 당연히 여자들은 가정에 매달리지 않아요. 저는 이런 공공 육아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이 정말 권리를 되찾고 싶다면, 육아와 가정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가족은 기초적인 사회 단위일지 모르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여자들이 계속 가정에 매달리고 남편의 월급 봉투(고전적인 표현이군요)에 매달린다면, 남자들은 계속 여자들을 깔보겠죠.
소설 주인공은 계속 화성 공산주의를 둘러보고, 화성이 이상적인 장소라고 느낍니다. 공산주의 화성 사회에서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꽤나 불안한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화성 공산주의는 화성인과 지구인 모두에게 절대 이상적인 지상 낙원이 아닙니다. 우선 소설 주인공은 의외로 화성 공산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은 분명히 열정적인 공산주의자이나, 화성인들이 낯설다고 느끼고 거기에 제대로 화합하지 못해요. 화성 공산주의는 소설 주인공에게 너무 이상적이고 머나먼 세계이고, 주인공은 자신이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주인공은 그저 미개한 지구인에 불과했죠.
어쩌면 이는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는 반증일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꽤나 좌파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화성 공산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공산주의 화성 사회에 간다면, 저는 공산주의적인 인간으로 거듭나야 할지 몰라요. 저는 문화, 관습, 도덕, 언어 등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이 되야 할 겁니다. (그래서 소설 <빼앗긴 자들>은 새로운 사회주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상상하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변증법적으로 함께 변해야 합니다. 슬프게도 공산주의 사회는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닐지 모르죠.
더욱 큰 문제는 화성 공산주의가 커다란 갈림길에 직면했다는 사실입니다. 화성인들은 성장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화성 공산주의는 계속 성장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해도, 자원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화성 공산주의는 영원히 성장하지 못할 테고, 언젠가 벽에 부딪힐 겁니다. 그때 화성인들은 더 이상 인구를 늘리지 못하고, 산업 시설을 늘리지 못하고, 에너지를 늘리지 못할 겁니다. 환경 보호론자들은 당연히 미래 문명 역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겠죠.
환경 보호론자들은 지속 가능성을 중시할 겁니다. 하지만 화성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성인들은 공산주의가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여기고, 성장을 멈추는 순간 그들이 멸망할 거라고 여깁니다. 화성인들은 성장을 멈추지 못합니다. 성장을 멈추는 문명은 죽은 문명입니다. 어쩌면 이는 성장 숭배라는 관념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좋아하는 성장 숭배와 많이 다릅니다. 화성인들에게 지속적인 성장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고, 당장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성장과 지속 가능성. 글쎄요, 뭐가 더 중요할까요. 언젠가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저는 인류가 지속 가능성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는 만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여러 평등한 공동체들은 지속 가능성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느리게 성장했고, 강력한 힘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강대국들은 평등한 공동체를 아주 쉽게 쓸어버렸죠. 북아메리카나 남태평양의 여러 부족민들은 국가를 이루지 않았으나, 덕분에 유럽 군대는 그들을 쉽게 쓸어버렸습니다. 만약 그들이 국가를 이루었다면, 훨씬 강대해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신 직접 민주주의나 평등이나 지속 가능성은 날아갔겠죠.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맞붙었을 때, 소비에트 연방조차 군비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고 파산했습니다. 만약 소비에트 연방이 군비를 대폭적으로 축소하고 사회 재생산에 투자했다면? 소비에트 연방은 훨씬 빈약한 군대를 갖춰야 했을 테고, 소련 인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겁니다. 언제 미국이 연약한 소비에트 연방을 쓸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에. 협동 조합이나 종업원 지주 회사 역시 비슷합니다. 하다못해 우주 전략 게임에서도 지속 가능성은 막강한 군대를 보장하지 않아요. 지속 가능성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덕분에 <붉은 별>은 환경 보호로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붉은 별>은 환경 보호를 대놓고 주장하지 않으나, 지속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따라서 환경 보호와 이어질 수 있어요. 환경 보호론자들 역시 인구 증가와 유한한 자원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저는 20세기 초기의 공산주의 유토피아 소설이 이런 시각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생각해요. 유럽 녹색당들이 환경 보호를 떠들기 전에 이미 20세기 초기의 공산주의 유토피아 소설은 지속 가능성을 고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환경 보존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나, <붉은 별> 같은 소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에서 쫓겨났고, 그래서 보그다노프의 사상은 공산주의 주류에서 많이 멀죠. 그렇다고 해도 <붉은 별>은 초기 공산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SF 소설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치들이 있겠으나, 저는 이런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설 속에서 지속 가능성은 가장 큰 갈등 요인이고요. 21세기 SF 작가들조차 성장 숭배에서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붉은 별>은 아주 핵심적인 문제를 던지는 듯합니다. 21세기 SF 작가들은 <붉은 별> 같은 소설을 보고 반성을 좀 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