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비롯한 단편 소설들 본문
페트릭 헤이든이 엮은 <반짝이는 저 별들로부터>는 SF 단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이 모음집은 낸시 크레스, 테리 비슨, 그렉 베어, 코니 윌리스, 데이비드 랭포드 같은 사람들을 담았어요. 모두 17편이죠. 이런 소설 모음집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각자 하위 장르가 다르고, 소재나 분위기 역시 다릅니다. 어떤 것은 엄중하고, 어떤 것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어떤 것은 웃기고, 어떤 것은 세상을 뒤집을 정도로 심각해요. 어떤 것은 희망을 노래하고, 어떤 것은 멸망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10대 독자를 위한 소설 모음집이라고 해도, 성인 독자 역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죠.
첫머리를 장식하는 소설은 테리 비슨이 쓴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입니다. 풍자적인 소설이고, 일반적인 서술 문구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오직 대사들로만 채워졌어요. 소설 제목처럼 외계인들은 지적 존재를 발견하고 엄청나게 놀랍니다. 그 지적 존재들이 유기체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외계인들은 이런 발견을 믿지 못하고, 어떻게 유기체 동물이 지적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반문합니다.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는 별로 엄중하지 않은 풍자적인 소설이나, SF 소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SF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런 비주류적인 상상력일 겁니다.
우리 자신이 유기체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적 존재가 유기체 동물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동물들은 인간과 비슷해야 합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숱한 인간형 외계인들을 늘어놓죠.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는 암석이나 전기 외계인을 상상하나, 역시 주된 외계인들은 유기체 동물 인간형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계인과 우주에 투영해요.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주에 투영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거시적인 주제를 제낀다고 해도, 이 소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정 관념을 벗으라고 말할 수 있겠죠. 자연 과학적으로 엄중하거나 판타지처럼 흐물거리나, 결국 SF 소설에는 이런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더 넓은 세상을 돌아보는 매력이 있는 듯합니다.
<걔들 몸은 고깃덩어리래>가 풍자적이고 흐물거리는 소설이었다면, 제프리 랜디스가 쓴 <태양 아래 걷다>는 훨씬 엄중합니다. 이 소설은 생존물인 동시에 우주 탐사물입니다. 어떤 우주 승무원이 달에 추락했습니다. 우주 승무원은 구조대와 연락했으나,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달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합니다. 아니, 어떤 관점에서 우주 승무원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주 승무원에게는 두 동행이 있습니다. 먼저 우주복이 있습니다. 우주복 덕분에 소설 주인공은 숨을 쉴 수 있고, 비상 식량을 먹을 수 있고, 물을 마실 수 있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요.
비록 비상 식량은 맛이 없을지 모르고, (소변을 재활용했기 때문에) 물은 찝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달이라는 죽은 위성에서 우주복 덕분에 주인공은 오랜 기간 생존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은 불가능을 없애고, 혹독한 환경을 이기고, 인간을 낯선 세상으로 보낼 수 있어요. <태양 아래 걷다>는 어떻게 우주복이 작동하는지 자세히 파고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이성을 이용해 과학을 연구하고 결국 낯선 세상을 떠도는지 적막하게 그립니다. 종종 SF 소설에서 소품이 중요한 경우가 있죠. <태양 아래 걷다>에서 중요한 소품은 우주복이고, 우주복은 충실하게 소설 주인공을 보호합니다.
저는 이런 생존물이 과학 기술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생존물은 낯설고 위험하고 가혹한 환경을 설정하고,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주인공이 생존하는지 이야기하죠. 환경에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존물에서 주인공은 과학 지식에 최대한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작가는 과학 기술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반증하고요. 만약 작가가 정말 하드 SF 소설을 쓰고 싶다면, 이런 생존물은 아주 유용할지 모릅니다. 적대적인 환경은 주인공을 압박하고, 생존하기 위해 주인공은 어떻게든 과학 지식을 짜내야 합니다.
따라서 소설은 저절로 하드 SF 장르를 향해 달릴지 모르겠습니다. 우주 생존물이 무조건 하드 SF 소설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가 하드 SF 소설을 멋지게 쓰고 싶다면, 우주 생존물은 꽤나 유용한 수단이나 도구가 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태양 아래 걷다>는 딱딱하게 우주복이나 생존만 떠들지 않습니다. 광대하고 낯선 세상을 혼자 걷는 인간은 얼마든지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달을 돌아다니는 동안 주인공은 여러 가지들을 떠올리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런 회상은 또 다른 동행이 되고, 언제나 주인공을 따라다닙니다.
달에서 주인공은 혼자이나, 혼자가 아닙니다. 주인공이 거쳐온 과거는 동행이 되고, 주인공을 떠나지 않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달에는 주인공 혼자 있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런 동행과 충분히 대화할 수 있고, 오랜 동안 상념에 잠길 수 있어요. 트래킹을 다룬 여행 소설들 역시 이런 상념들을 다루곤 하죠. 어떤 관점에서 <태양 아래 걷다>는 아주 장대한 우주 트래킹 소설이고, 아무도 없는 달 위에서 주인공은 과거를 불러내고 불러내고 다시 불러낼 수 있습니다. 달 트래킹은 주인공에게 일생을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가도록 밀어주는 계기가 됩니다.
아울러 <태양 아래 걷다>는 인간이 아직 닿지 못한 비경을 신비롭게 그립니다. 적막과 신비. 낯설고 고요한 아름다움. 저는 우주 탐사물을 비롯한 비경 탐험 소설이 이런 감성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낯설고 고요한 아름다움은 비경 탐험 소설이 전달할 수 있는 가장 멋진 감성일지 모르겠군요. 북적거리는 현대 문명인에게 이런 적막과 신비는 그야말로 낯선 감성일지 모르고요. 그래서 우주 탐사물은 가장 이질적인 SF 장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죠.
<미친 몰리에게 복숭아를>은 스티븐 굴드가 쓴 디스토피아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사람들은 대조적인 두 계급으로 나뉩니다. <미친 몰리>에서 그런 계급은 벽 안쪽과 벽 바깥쪽은 나뉩니다. 고층 건물이 있고, 건물 안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반면, 거미처럼 어떤 사람들은 건물 벽에서 붙어 살고, 거미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다닙니다. 300층에 사는 이웃을 만나기 위해 200층에 사는 사람은 벽을 타고 위태롭게 놀러가죠. 당연히 벽에 붙은 삶은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벽에 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락한 체계에 저항한다고 생각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어쩌면 이런 설정은 당파성을 강조할지 모르겠으나, <미친 몰리>는 그런 성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미친 몰리>는 수직적인 감성을 계속 강조합니다. 수평면 위에서 사는 일반적인 인간에게 이런 수직적인 이동은 불편하고 낯설게 보일 겁니다. 작가는 그런 불편하고 낯선 모습을 연이어 늘어놓고, 동시에 벽을 이용해 계급 차별을 다룹니다. 독자가 머릿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벽을 돌아다니는지 상상한다면, 소설이 훨씬 생생하게 보일 겁니다. <미친 몰리>는 추상적인 측면보다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아요. 아마 이 소설이 영상화가 된다면, 멋진 활공 액션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점퍼>에서 그런 것처럼 스티븐 굴드는 뭔가 독특한 액션 장면을 좋아하는 듯해요.
<클리어리 가에서 온 편지>는 코니 윌리스가 쓴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초반부에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지 않습니다. <클리어리에서>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떠들지 않아요. 소설 주인공은 그저 가족이 지내는 풍경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할 뿐이고, 딱히 암울함이나 위험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뭔가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뭐가 위험하고 뭐가 잘못인지 금방 감을 잡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사건이 좀 더 진행되었을 때, 그들이 숨겼던 갈등은 고개를 내밀어요. 독자는 어떻게 멸망한 세상이 주인공과 주인공의 가족을 위협하는지 알게 되고요.
이 소설이 드러내는 진가는 그런 것인 듯합니다.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이나, 자신이 멸망한 세상을 떠든다고 티를 내지 않아요. 코니 윌리스는 일부러 그런 방법을 피하는 것 같습니다. 시작은 아주 평범합니다. 중반부 역시 약간 이상하나, 별로 특별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 소설은 진짜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코니 윌리스는 갑자기 거대한 사건을 내던지거나 충격적인 반전을 시도하지 않아요. 수다와 대화 속에서 작가는 천천히 멸망한 세상의 윤곽선을 그립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방법이 훨씬 충격적인 것 같습니다.
윌 셔털리가 쓴 <브라이언과 외계인>은 이 소설 모음집에서 제일 웃긴 소설인 것 같습니다. 아, 정말 어떻게 이렇게 웃기게 쓸 수 있는지…. 어느 시골에서 외계인들과 순진한 소년과 애완견이 만나고, 외계 기술 덕분에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터지고, 오해는 오해로 이어지고, 다시 그 오해는 또 다른 오해로 이어집니다. <브라이언과 외계인>이 웃긴 이유는 그렇게 오해와 편견과 착각이 또 다른 오해와 편견과 착각을 낳고, 그것들이 계속 번식하기 때문일 겁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아니, 어쩌면 별로 미약하지 않을지 모르겠군요.) 사건은 순식간에 가지들을 다시 칩니다.
하지만 초반부에 외계인이 지구인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군요. 현실 속에서 우리가 그런 보수 우파적인 시선들을 마추지기 때문이죠.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바라보는 것. 그래서 보수 아니겠습니까. 로버트 윌슨이 쓴 <위대한 이별>은 우주로 뻗어나가는 인류를 서정적으로 그립니다. 언제나 여정은 이별을 담보하고, 누군가가 떠나야 할 때, 누군가는 남아야 합니다. <위대한 이별>은 그런 모습을 그리고, 이는 진부한 소설 같으나, 좋은 SF 소설은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집을 수 있죠. 젊은이와 노인, 외계와 지구, 변화와 정체, 그런 것들.
데이비드 랭포드가 쓴 <다른 종류의 어둠>은 꽤나 비유적입니다. 모든 SF 소설은 비유가 될 수 있으나, <다른 종류의 어둠>에서 특별히 그런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아마 이 소설이 극단적인 설정을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모두 깜깜합니다. 집이나 학교 이외에 아이들은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창문으로 시선을 돌릴 때, 아이들은 그저 막막한 어둠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 어둠이 무엇이고 왜 어둠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그 어둠을 헤칠 수 있는지 모르죠. 어른들은 뭔가 아는 것 같으나,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둠이라는 벽을 깨뜨리고 한 단계 성장합니다. 누구도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훨씬 더 대단할지 모르죠. 어른들은 그걸 보호라고 생각하겠으나, 사실 그건 아이들에게 감옥이나 장벽일지 몰라요. 하지만 <다른 종류의 어둠>은 그저 비유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벽한 패턴으로 사람을 죽이는 그림은 흥미로운 발상로군요. 이런 그림이 미치광이 예술가가 아니라 천재적인 수학자에게서 나왔다는 특징 역시 흥미롭고요. (수학이라는 지긋지긋한 학문이 공포가 되었을지…. 수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학문이죠, 하하.)
그렉 베어가 쓴 <탄젠트>는 차원을 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외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흔히 사람들은 다른 행성이나 위성, 항성을 떠올릴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행 세계를 떠올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3차원에 갇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다른 차원 역시 외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외계를 상상하기가 꽤나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차원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니, 우리가 그런 차원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차원은 우리에게 무슨 모습일까요. 그렉 베어는 시각적인 측면을 묘사하고, 독자는 그걸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3차원에 사는 독자에게 다른 차원은 훨씬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건 그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을 요구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우리가 새로운 개념을 떠올린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사고 방식은 이 차원에 갇혔고, 그 너머를 내다보기가 너무 힘들죠. 환경 결정론자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환경이 개체를 규정할 수 있다는 현상에 동의할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3차원적인 존재이고, 다른 차원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할 외계가 됩니다. 그렉 베어는 여기에 이방인이라는 비유를 집어넣습니다. 사회적으로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좀 더 다른 세상을 기대할지 몰라요. <탄젠트>에서 그런 사회적인 경계와 차원적인 경계는 오묘하게 합쳐지고, 하드 SF 소설이 선사할 수 있는 경외감을 선보입니다. 인식의 지평선이 훌쩍 넓어지는 느낌. 그런 것이 하드 SF 소설의 경외감이죠. (막판에 사소한 웃음 역시 빼놓지 못하겠고요.)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낸시 크레스가 쓴 외계인 이야기입니다. 흠, 어쩌면 외계인보다 이방인이라는 표현이 훨씬 어울릴지 모르겠군요. <탄젠트>는 이방인과 외계인을 미묘하게 조합했으나,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대놓고 외계인이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영어권에서 외계인과 이방인이 모두 에일리언이기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은 외계인을 훨씬 더 이방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에게서 차이를 찾아내고, 다른 것에서 트집을 잡고, 차별하거나 혐오합니다. 문제는 우리와 타인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피부색이 다르거나, 생김새가 다르거나,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우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인 듯합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누군가는 소통하려고 시도했으나, 다른 누군가는 그걸 무시하고 공격했죠. 이는 자연 과학적인 상상보다 사회학적인 비유에 더 가깝군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런 차별과 공격과 혐오를 아주 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낸시 크레스는 특정한 누군가를 지적하지 않으나,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수많은 상황들에 들어맞을 수 있겠죠. 상대가 외계인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그런 상황들을 더욱 부각할 수 있고요.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사회학적인 비유로서 SF 소설'을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과거형 서술이 훨씬 좋습니다. 현재형 서술에 적응하기 어려워요.)
<아서 스턴백이 화성에 변화구를 소개한 이야기>는 화성에서 야구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화성에서 야구? 화성은 지구와 다르고, 당연히 화성인들은 색다른 경기를 펼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어떻게 화성인들이 야구라는 경기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그걸 관전하고, 어떻게 공을 던지거나 치거나 받는지 보여줍니다. 킴 로빈슨은 야구를 이용해 화성이라는 외계 행성을 강조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성이라고 해도, 고정 관념을 깰 수 있는 결정적인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소설은 꽤나 밋밋하게 흘러가고, 위기나 절정이 없지 않으나, 그게 별로 짜릿하지 않아요.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역시 약간 심심해 보입니다. 무겁지 않고, 다소 가벼운 발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해도 화성이 어떤 곳인지 야구를 이용해 설명하는 방식은 흥미롭군요. (비록 SF 작가는 아니나, 랜들 먼로 같은 작가가 이걸 썼다면, 훨씬 재미있었을지 모르겠어요.) <화성에서 변화구>에서 정말 인상적인 부분은 야구보다 화성 협동조합이었습니다. 대안 사회를 강조하는 SF 작가답게 킴 로빈슨은 공공 육아 같은 부분을 살짝 보여줍니다. 작가가 이런 부분을 훨씬 더 많이 보여줬다면, 소설이 훨씬 이질적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소설들 역시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위에서 소개한 소설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필립 딕이 쓴 <외계인의 생각>은 재치가 빨랐을 뿐이고, 딱히 인상적이지 않군요. 좀 더 파격적이고 암울한 발상을 기대했으나, <외계인의 생각>은 꽤나 가볍습니다. 하지만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몇몇 소설은 정말 뒷통수를 강렬하게 때리는군요. 제일 기억에 남는 소설은 <태양 아래 걷다>입니다. 인간이 친숙한 문명을 떠나고 낯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장면은 SF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크고 낯선 기쁨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