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지구 2084>, 관념적인 생태 철학 및 사이언스 픽션의 정의 본문
요수타인 가아더가 쓴 <지구 2084>를 SF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지구 2084>는 일반적인 SF 소설과 다른 듯합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지구 2084>가 SF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몰라요. 하지만 전통적으로 타임슬립이나 예지몽은 SF 울타리 안으로 쉽게 들어왔습니다. 고전적인 19세기 작가들은 예지몽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했고, 타임슬립은 여전히 흔한 SF 장치입니다. 따라서 <지구 2084>를 SF 소설이라고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겠죠.
게다가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요수타인 가아더는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과 사회 과학적인 상상력을 결합합니다. <지구 2084>가 SF 세상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책은 주변 부분에 머물 수 있어요. 아무도 이 책을 SF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겁니다. 상상 과학을 전개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지구 2084>는 흔한 SF 블록버스터보다 훨씬 사이언스 픽션이 드러내는 본질에 접근했을지 모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가치가 있을까요. 우주 구축함이 외계 드래곤(!)에게 포탄들을 쾅쾅 날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볼거리 역시 중요하나, 정말 중요한 것은 논리적이고 비주류적인 가능성이겠죠.
제목처럼 <지구 2084>는 환경 아포칼립스를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뒤집습니다. 이 소설은 암울한 세상을 예상해요. 제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인류 문명은 여전히 암울하게 돌아가겠으나, <지구 2084>는 더 멀리 나갑니다. 어떤 애플리케이션은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기후 변화는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화석 연료는 고갈되고, 자동차는 비싼 사치품이 되었습니다. 사방에는 기후 난민들이 넘칩니다. 어떤 것은 전형적인 상상력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화석 연료가 고갈되고 자동차가 비싼 사치품이라는 상상은 별로 신선하지 않습니다. 1950년대에 이미 프레데릭 폴 같은 작가는 그런 환경 아포칼립스를 상상했습니다. 뭔가 파격적인 상상을 기대하는 SF 독자에게 <지구 2084>는 실망스러운 책이 될 겁니다. 대신 <지구 2084>에는 현실적인 대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대안들. 멸종 위기의 호랑이를 위한 복권 같은 대안은 현실적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그런 대안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요수타인 가아더는 얼마나 자세하게 현대 문명을 들여다보는가?
소설 속에서 작가는 현대 문명이 저지르는 모순들을 꼬집습니다. 작가는 선진국 시민들이 진실을 외면한다고 고발하고, 선진국 시민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작가는 약소국 사람들과 기후 난민들을 동정하고, 우리가 석유를 비롯해 자원들을 절약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절약, 동정, 연민, 선의. 요수타인 가아더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죠. 하지만 저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욕심이 많고 진실을 외면할까요. 사람들이 자원을 절약하고 동정을 베푼다면, 기후 변화가 사라지고 환경 오염이 완화될까요. 사람들이 동정을 베푼다면, 아무르 호랑이들이 늘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요수타인 가아더는 현대 문명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간다고 상정합니다. 그건 추상적인 관념이고, 형이상학적인 상정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시민들은 자유롭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은 일정한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시민들은 자유를 선택합니다. 선을 넘어가는 시민들은 야유를 받고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체포되거나 죽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지배 계급은 현실을 계속 왜곡하고 시민들을 세뇌하죠.
여기에 어떤 노동자가 있습니다. 석유를 아끼기 위해 이 노동자는 자동차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직장이 너무 멀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면 계속 지각할 겁니다. 하지만 직장이나 집을 옮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취업 전쟁은 극심하고, 부동산 가격은 살인적입니다. 교육 비용은 계속 올라가고, 그야말로 월급 이외에 모두 치솟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혼자 석유를 아낀다고 해도,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실업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환경 오염이고 나발이고, 당장 실업자들은 먹고 살 걱정에 시달려야 합니다.
실업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실업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왜? 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매달려야 하나요? 왜 실업자가 자본가에게 매달려야 하죠? 자본가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그렇게 잘난 존재이기 때문에? 실업자들이 게으르고 못나기 때문에? 세상 천지의 실업자들이 전부 병신 머저리들이기 때문에? 아니, 그렇지 않아요. 요점은 생산 수단과 소유 권리입니다. 하지만 요수타인 가아더는 이걸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고, 형이상학적인 대안을 내놓습니다.
소수가 생산 수단을 차지하고 다수가 그렇지 못한 사회는 억압적인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는 당연히 각종 자연 환경들을 파괴할 겁니다. 어떻게 자연 환경을 이용하고 관리할지 우리는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등하게 논의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소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기후 변화 같은 환경 오염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하죠. 일자리를 빌미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환경 오염이 저절로 해결될 것 같나요? 하지만 요수타인 가아더 같은 사람은 절대 이걸 언급하지 않아요.
자본주의 체계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지구 2084> 같은 책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아요. 오히려 자본주의 안에서 해답을 찾느라 애쓰죠. 감기 환자에게 설사약을 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겠습니다. 저는 요수타인 가아더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가아더는 따스한 교훈들을 남겼어요. 하지만 선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반쪽짜리 수단이 될 겁니다. 자본주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생물 다양성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2084년을 상상한다고 해도, 작가는 자본주의 체계를 제대로 들여다봐야 했어요.
자본주의 체계가 자연 환경들을 파괴함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밖에서 해답을 찾지 않아요. 그들은 그런 행위가 불미스럽고 위험한 죄악이라고 생각하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사람은 무조건 악질 빨갱이가 됩니다. 아무리 SF 창작가들이 미래 사회를 상상하고 첨단 기술을 상상해도, 그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그들은 동물 권리를 외치고 선의를 외치고 박애를 외치죠. 그런 운동들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운동들은 반쪽짜리 운동에 머물 겁니다.
왜 다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당연히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왜 다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을 타파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을 타파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이 평등하게 자연 환경을 관리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자연 환경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면, 그건 박애나 선의나 동정 때문이 아닐 겁니다. 생태 사회주의적인 대안들 때문일 겁니다. 저는 진지한 SF 소설들부터 SF 비디오 게임들까지 다들 그걸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발 사람들에게 자연 환경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제발 그런 능력을 준 이후, 박애와 선의와 동물 권리를 외치세요.
아, 그리고 최재천이 쓴 추천사는 꽤나 엉뚱하더군요. 이 책은 서두에 최재천이 쓴 추천사를 달았고, 최재천은 <지구 2084>가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징을 촘촘하게 엮었다고 호평했습니다. 확실히 <지구 2084>가 미래의 환경 오염을 상상하는 부분은 통상적인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겹치죠. 위에서 제가 말한 것처럼 비록 이 책은 SF 소설이 자랑하는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겠으나, SF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지 않을 겁니다. <지구 2084>는 분명히 전통적인 SF 소설이 아니나, 모든 SF 소설이 전통적인 사이언스 픽션일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이 추천사를 읽었을 때, 저는 커다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최재천은 과학과 문학이 만나는 좋은 사례들이 별로 없으나, 요수타인 가아더가 그걸 해냈다고 칭찬했어요. 아, 그런가요? 과학과 문학이 만나는 좋은 사례가 별로 없다고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멋지고 놀라운 SF 소설들이 많고 많습니다.
최재천은 그런 SF 소설들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숱한 SF 소설들은 최재천에게 별로 맞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SF 소설에서 자연 과학적 상상력은 진짜 과학이 아닙니다. 상상 과학은 자연 과학에서 출발하나, 이내 작별을 고하고 머나먼 우주로 혼자 올라갑니다. 자연 과학이 지구를 벗어나지 못할 때, 상상 과학은 지구를 벗어나고 태양계를 벗어나고 신나게 다른 항성계로 향합니다. 게다가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사이언스 판타지들은 아예 엄중한 자연 과학에 관심이 없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열심히 우주 함대를 내보내고, 우주 함선들은 신나게 감마 어뢰들을 쾅쾅 날릴 뿐입니다. 우주 함선과 외계 드래곤(!)이 싸우는 광경은 최재천 같은 자연 과학자에게 황당하게 보일 겁니다. 감마 어뢰를 날리는 우주 함선? 에너지 화염을 내뿜는 외계 드래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요? 어떻게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에 과학적인 상상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요.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 역시 우주 함선과 외계 드래곤이 과학적인 상상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그것보다 신나는 우주 함대 전투를 더 중시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하드 SF 소설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드 SF 소설들은 자연 과학에서 출발합니다. 어느 순간 하드 SF 소설은 자연 과학에서 멀어지고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치나, 자연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드 SF 소설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하드 SF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우주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누구인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드 SF 소설은 그런 감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일 겁니다. 다른 장르 소설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으나, 그것들은 하드 SF 소설을 쉽게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덕분에 우주 생물학 서적들을 읽을 때,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칼 세이건이나 닐 타이슨이 이야기하는 우주는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비록 하드 SF 소설과 닐 타이슨이 서로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종종 SF 소설과 닐 타이슨은 비슷한 감성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비단 우주 생물학이나 천체 물리학만 그렇지 않겠죠. 폭력적인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생태학자들이나 환경 사회학자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언급합니다. 생태학 서적과 환경 사회학 서적과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구 2084>는 생태 철학책이 될 수 있고, 동시에 SF 소설책이 될 수 있죠.
심지어 교양 과학을 위해 중국 같은 나라는 SF 소설들을 지원합니다. 그건 크게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건 SF 소설을 자연 과학이라는 틀에 가두는 행위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SF 소설과 자연 과학이 맺은 관계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 과학과 문학이 만나는 멋진 사례들은 많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나 뉴웨이브 SF 소설이나 유토피아 문학을 제외한다고 해도, SF 울타리 안에서 자연 과학과 문학은 멋지게 만날 수 있어요. 하지만 최재천은 그런 사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최재천이 하드 SF 소설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들에 다른 단점들이 있기 때문에? SF 소설들이 싸구려 외계인들을 늘어놓는 저질 매체이기 때문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최재천이 쓴 추천사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남한에서 최재천은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과학자입니다. 이런 과학자가 SF 소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저는 꽤나 애석합니다. 솔직히 남한에서 SF 소설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드물어요. 이 블로그에서 저는 여러 SF 소설들을 떠드나, 저 역시 고작 뒷북을 치는 중일 겁니다. 따라서 최재천 같은 과학자가 힘을 보탤 수 있다면, 훨씬 좋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