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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평등한 생산 관계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평등한 생산 관계

OneTiger 2018. 11. 5. 19:00

[이런 <로드>처럼,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지옥을 연출하고 야만을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기를 좋아합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야만적인 본성들을 드러냅니다. 그런 야만적인 본성들은 지옥을 연출하죠. 그런 지옥을 바라보는 동안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들에서 이런 주제는 드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흔한 인터넷 소설들이나 인터넷 만화들 역시 다르지 않겠죠. 네빌 슈트나 레이 브래드버리 같은 작가들은 이런 통념을 거꾸로 적용합니다.


<해변에서>는 지옥을 연출하지 않죠. 묵시적인 종말이 다가옴에도, 사람들은 야만적인 본성들을 드러내지 않고 인생을 신나게 즐깁니다. 그들은 아비규환에 빠지지 않고, 지옥을 연출하지 않고, 야만 상태에 돌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부정적인 감성이 있다고 해도, 그건 상실감입니다. 그 자체로서 <해변에서>는 감동적인 소설이나, 동시에 여기에는 상대적인 감동이 있을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인간의 본질을 너무 야만 상태로 몰고 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해변에서>는 돋보일 수 있겠죠. 만약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종말을 아름답게 그렸다면, 대부분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잔잔하게 저물어가는 일상들을 묘사했다면, <해변에서>는 별로 돋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제목처럼, 메리 셸리가 쓴 <최후의 인간>은 모든 인간이 사라진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옥이 없습니다. 혼란과 광기가 있으나, 그건 본격적인 지옥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는 야만을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최후의 인간>은 상실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동안, 인류 문명이 사라지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낍니다. 상실감 앞에서 야만과 지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옥을 연출하지 않기 때문에, 상실감을 크게 표현하기 때문에, <최후의 인간>과 <해변에서>는 서로 비슷할지 모릅니다. <최후의 인간>과 <해변에서>는 아주 대표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게다가 메리 셸리는 본격적으로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열어젖힌 장본인이죠.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게는 무조건 지옥을 연출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메리 셸리가 <최후의 인간>을 쓴 것처럼, 초기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무조건 지옥을 연출하는 장르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종말이 몰려올 때, 사람들은 아비규환에 빠질 테고, 그건 아주 쉽게 지옥으로 이어질 겁니다. <모로 박사의 섬>처럼, 이미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인간의 본성이 야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죠. 19세기 이후 20세기는 세계 대전을 두 번씩이나 저질렀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는 동안 유럽 사람들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겁니다.



당연히 그런 깊은 회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핵 공포는 새롭게 나타났고, 여기에 각종 환경 오염들은 난리법석을 덧붙입니다. 이제 세계 대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핵 공포와 환경 오염들은 또 다시 거대한 재난이 될지 몰라요. 20세기 초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과 핵 공포와 환경 오염들은 연이어 사람들에게 깊은 회의를 던졌습니다. 이른바 문명인들은 깊은 회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여러 지옥들을 연출했죠.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들은 야만을 이야기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문명인들은 야만을 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야만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야만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야만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문명을 상정하죠. 문명을 상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야만을 인식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야만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식 속에서 문명이 먼저 나타나기 때문에 문명 이후 야만은 문명과 적대할 수 있죠. 이건 <킹콩> 영화와 비슷합니다. 미국 도시를 볼 때, 관객들은 그게 문명이라고 인식합니다. 이런 인식 이후, 영화가 해골섬과 킹콩과 여러 야수들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미국 도시와 대비되는 야성을 인식합니다. 막판에 문명과 야성은 부딪히죠.



저는 이렇게 문명과 야생을 대조하는 방법이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킹콩> 같은 영화에서 문명과 야생은 너무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이쪽에는 완전한 문명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완전한 야생이 있습니다. 두 가지는 물과 기름이고 서로 섞이지 않죠. 하지만 현실에서 문명과 자연은 그런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문명과 자연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들을 교환하고 서로 모습들을 바꿉니다.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고 자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이 없었을 때에도 자연은 고정적이지 않았고 문명이 나타난 이후에도 자연은 고정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킹콩> 같은 영화는 두 가지를 너무 쉽게 구분하죠. 이런 구분은 효과적인 상징이 될 수 있으나, 그런 상징은 문명이 자연을 침범한다고 커다란 오해를 동반하죠.


문명과 야만 역시 비슷한 구도입니다. 문명과 야만 역시 한쌍이고 서로를 강조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에서 뭐가 우선일까요? 문명과 야만이 한쌍이라고 해도, 동시에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는 우선하는 것이 있겠고 파생적인 것이 있겠죠. 그리고 문명과 야만 중에서 문명은 야만보다 우선할 겁니다. 왜냐하면 문명이 긍정적인 것이고 야만이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와 무처럼, 긍정은 부정보다 앞섭니다.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긍정이 있기 때문에 부정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킹콩>은 야생(부정)보다 도시(긍정)를 먼저 보여주죠. 아니, <킹콩>이 도시를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관객들은 이미 도시를 상정하겠죠.



[킹콩의 표정은 참…. 이런 야생은 문명을 강조하기 위한 아주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존재가 없을 때, 우리는 무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고를 당하고 한쪽 팔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부상을 안타깝다고 여깁니다. 사고가 한쪽 팔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셋째 팔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셋째 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셋째 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셋째 팔을 잃는 고통)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셋째 팔이 없다고 투덜거릴지 모릅니다. <스파이더맨> 만화에 나오는 문어 박사는 셋째 팔이 없다고 투덜거릴지 모르죠.


하지만 우리가 무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셋째 팔이 없다고 투덜거릴 수 있죠. 셋째 팔이 없다고 투덜거릴 때, 우리는 없는 것이 '있다'고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인식합니다. "만약 나에게 셋째 팔이 있다면…." 이걸 가정하지 않는다면, 긍정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자체로서 무는 무가 아닙니다. 존재가 부재할 때, 그건 무가 됩니다. 무가 존재하기 전에 존재는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철학에서 존재와 무는 아주 근본적인 주제이고, 따라서 이렇게 제가 존재와 무를 요약한다면, 이건 너무 커다란 오류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명과 야만을 존재와 무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존재 없는 무가 없는 것처럼, 문명 없는 야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야만을 인식할 때, 이미 문명을 인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야만이 야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바이어던>에서 문명(국가)을 이야기하기 위해 토마스 홉스는 야만(자연 상태)을 가정해야 했습니다. 문명이 있기 때문에 토마스 홉스는 야만을 가정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문명을 이룩하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무엇이 문명인지 아예 인식하지 못했겠죠. 물론 데이빗 흄이 주장한 것처럼, <리바이어던>은 엉터리입니다. 국가가 문명이라고 긍정하기 위해 토마스 홉스는 의도적으로 야만(자연 상태)을 규정했죠.


데이빗 흄은 이런 사회 계약론이 엉터리라고 깠습니다. 데이빗 흄은 좌파 철학자나 아나키스트 철학자가 아니었으나, 적어도 경험 이론에 기반했고 무엇이 현실인지 들여다볼 수 있었죠. 지구상에서 작은 나라들이 소멸할 때, 커다란 제국들이 나타날 때, 민족들이 이주할 때, 식민지들이 나타날 때, 힘과 폭력 이외에 우리는 아무것도 찾지 못합니다. 토마스 홉스는 이걸 간과했죠. 분명히 식민지 수탈들을 관찰할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홉스는 일부러 식민지 수탈들을 개무시했죠. 국가를 찬양하기 위해. 이건 너무 편리한 설정입니다. 국가가 저지른 온갖 폭력들을 외면한다면, 국가를 찬양하기는 너무 쉬울 겁니다.



사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리바이어던>이 엉터리인 것처럼,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엉터리입니다. 그런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을 너무 쉽게 규정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물들은 너무 쉽게 문명을 규정하고 그 문명에서 아무렇지 않게 야만을 도출합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규정하는 그 문명들이 정말 문명일까요? 문명이 뭘까요? 우리가 무엇을 문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수많은 대답들이 있을 겁니다. 너무 많은 대답들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문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재단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문명을 재단하기 위해 우리는 대표적인 기준들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식량 생산은 그런 대표적인 기준이 될 겁니다. 식량들이 없다면, 인류 문명들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대한 공동체를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식량들이 없다면, 거대한 공동체는 고사하고 몇몇 개인조차 생존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신비의 섬>에서 링컨섬이 완전히 불모지였다면, 주변 바다에 물고기가 하나도 없었다면, 다섯 생존자들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을 겁니다. 무인도 문명 따위는 존재하지 못했겠죠. 사실 다섯 생존자들은 식량을 가장 먼저 걱정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걸 잊습니다. 하지만 식량 없이 개인이고 문명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하죠.



아무리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리 체계적인 법 질서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복잡한 사회적인 관계들이 있다고 해도, 빵 한 조각이 없다면, 문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유기체 동물이고,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소설 작가도 먹어야 하고, 판사도 먹어야 하고, 사회학자도 먹어야 합니다.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먹거리가 있을 때, 문명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숱한 4X 게임들은 먹거리를 빼놓지 않습니다. 먹거리가 자원이 아니라고 해도, 식량은 아주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문명>이나 <엔들리스 레전드>나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보세요.


이런 4X 게임들에서 식량은 빠지지 않는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심지어 이런 4X 게임들조차 식량이 중요하다고 취급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걸 무시하죠. 수많은 사람들은 식량 생산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식량 생산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 식량 생산은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어디에서 식량이 나올까요? 하늘에서 식량이 뚝 떨어질까요? 땅에서 식량이 불쑥 솟을까요? 물론 땅에서 식량은 솟습니다. 땅에서 쌀, 벼, 옥수수, 사과, 버섯은 솟습니다. 땅에서 풀들과 나무들이 자라기 때문에 꿀벌들은 꿀을 빨 수 있고 인간 역시 꿀을 빨 수 있죠. 소들이 풀들을 먹기 때문에 인간은 우유를 짤 수 있어요.



[게임 <엔들리스 스페이스>처럼, 심지어 4X 게임들조차 식량 생산이 문명을 떠받친다고 말합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우리는 꿀벌을 치거나, 옥수수를 키우거나, 해안에서 물고기들을 잡거나, 숲 속에서 야생 버섯을 따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식량들을 생산해야 합니다. 이것 없이 문명은 존재하지 못하죠. 예외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자연 생태계 속에서 식량들을 생산할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합니다. 무슨 식량들을 생산할 것인가? 얼마나 많이 식량들을 생산할 것인가? 어떻게 잉여 생산물들을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생산물들을 분배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생산량이 모자란다면? 생산량이 모자랄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논의는 생산 수단, 생산 방법, 분배 방법 등을 포함합니다. 여기에서 사회적인 관계들은 파생하고, 법과 질서는 파생하고, 계급 구조는 파생하고, 문화 예술은 파생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문화 예술, 법 질서, 계급 구조, 사회적인 관계들은 이런 생산 노동에서 파생합니다. 그리고 문화 예술과 법 질서와 계급 구조와 사회적인 관계들이 파생할 때, 이것들은 폭력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장 자크 루소가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소수가 생산 수단과 생산 방법과 분배 방법을 독점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됩니다. 누군가가 빈곤을 조성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권력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 수단과 생산 방법과 분배 방법을 평등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등. 그건 문명을 뒷받침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평등은 아주 막대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정말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평등을 고려하나요? 문명을 규정할 때,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평등을 고려하나요? 문명 없이 야만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야만을 떠들고 싶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을 규정해야 합니다. 문명을 규정할 때,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생산 관계를 고민해야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생산 관계를 고민할 때, 평등은 빠지지 않는 기준입니다. 이렇게 평등이 중요함에도,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생산 관계와 평등을 논의하지 않습니다. 생산 관계와 평등을 논의하지 않음에도,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과 야만을 함부로 가릅니다. 그건 아주 어설픈 주제입니다.


생산 관계와 평등을 논의하지 않는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합니다. 문명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한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야만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에서 토마스 홉스가 엉터리 주장들을 남발한 것처럼,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엉터리 주장들을 남발합니다. 아니, 지배 계급이 토마스 홉스를 지식인이랍시고 내세우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엉터리 주장들을 받아들였을 테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엉터리 주장들을 늘어놓겠죠. 포스트 아포칼립스 창작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문제는 지식인들의 꼴불견이죠.



물론 생산 관계와 평등 없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과 야만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논의에는 많은 가치들이 있을 겁니다. 문명과 야만을 이야기하기 위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무조건 생산 관계에 주목해야 할까요? 무조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생산 수단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공동체를 상정해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문명에는 생산 관계 이외에 다른 복잡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가령, 어떤 소설 작가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동성애 문제를 함께 이야기한다면, 평등한 생산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야만은 오직 생산 관계에서만 비롯하지 않습니다. 생산 관계 없이, 얼마든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을 규정하고 지옥을 연출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평등한 생산 관계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이 이걸 잊는다면, 그들은 쉽게 관념적인 말장난에 빠질지 모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 역시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먹는 식량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고려하지 않음에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은 함부로 문명과 야만을 재단하죠. 그런 재단은 관념적인 말장난에 빠질 수 있어요. 겉모습은 지옥이나, 알맹이는 그저 장난에 불과하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식사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역시 식사하셨겠죠. 식량 없이 여러분은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누가 그런 식량들을 생산할까요? 무슨 생산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식량들을 생산할까요? 무슨 계급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식량들을 생산할까요? 사람들이 평등하게 생산 수단들을 소유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평등하게 잉여 생산물들을 분배할 수 있나요? 왜 누군가는 엄청난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왜 누군가는 손바닥만한 땅조차 갖지 못하고 굶을까요? 왜 누군가는 마음대로 온실 가스를 뿜고, 왜 폭염 때문에 누군가는 농사를 망칠까요?


문명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물음들을 절대 빠뜨리지 못할 겁니다. 안타깝게도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것들을 눈꼽만큼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폭력을 감추기 위해 지배 계급이 토마스 홉스 같은 지식인들을 내세우기 때문이겠죠. 다행히 문명을 근본적으로 고찰하는 SF 소설들은 없지 않습니다. <빼앗긴 자들> 같은 소설은 좋은 사례가 되겠죠. 이 소설에서 식량 생산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아나레스 공동체를 묘사해요. 아나레스 사회는 노동자 평의회 사회이고, 생산 관계는 노동자 평의회 사회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생산 수단을 공유합니다.



[게임 <문명 6>의 한 장면. '문명'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우리는 식량 생산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생산 수단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평등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유지합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억압 없는 사회를 유지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엄청난 폭력이 없다고 해도, 아나레스 공동체에는 억압과 계급 구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고 해도, 그건 만능 열쇠가 되지 못하죠. 기근이 몰려왔을 때, 일부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킵니다. 만약 기근이 훨씬 심각했다면, 식량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나레스 사람들은 지옥을 연출했을지 모릅니다. 아나레스 사회는 절대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여기는 절대 천국이 아닙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그저 생산 관계를 평등하게 유지할 뿐입니다. 심지어 그런 겉모습조차 기만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근이라는 재난이 닥쳤을 때, 그건 대대적인 야만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현실에 이런 사례가 있을까요? 이런 모습은 현실 속의 중국 인민 공사와 비슷합니다. 중국 인민 공사 역시 평등한 생산 관계를 중시했습니다. '공사'라는 용어는 공동 소유를 가리키죠. 아나레스 사람들이 노동자 평의회를 이룩하고 일상을 공유한 것처럼, 중국 인민 공사 역시 비단 생산 수단만이 아니라 일상을 공유했습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이 심각한 기근을 겪은 것처럼, 중국 인민 공사 역시 심각한 기근을 겪었어요. 물론 아나레스 사람들은 기근을 무사히 넘어갔으나, 현실에서 중국 인민 공사는 기근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습니다. <빼앗긴 자들>과 달리, 전쟁터에서 중국 인민 공사는 시작해야 했죠.



아나레스 사람들은 전쟁을 겪지 않았습니다. 아나레스 위성은 척박하나, 적어도 몇 년 동안 아나레스 사람들은 무사히 공유 사회를 실험할 수 있었죠. 하지만 중국 인민 공사는 2차 세계 대전이 남긴 잿더미에서 벗어나야 했고, 기근은 중국 인민 공사의 발목을 붙들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과 적백 내전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발목을 붙든 것처럼, 2차 세계 대전은 중국 인민 공사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인민 공사는 온갖 뻘짓들을 저질렀고, 그건 처참한 환경 오염들로 이어졌죠. 사실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17세기 유럽 디거스부터 21세기 남아메리카 사회주의까지, 공유 사회들은 숱한 뻘짓들을 저지릅니다. 공유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그들은 쉽게 침략을 당하고 쉽게 뻘짓들에 빠져듭니다. <빼앗긴 자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현실과 달리, 아나레스 사람들은 침략을 당하지 않았고 크게 뻘짓들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1974년 소설입니다. 68 혁명 이후 <빼앗긴 자들>은 출판되었죠. 어슐라 르 귄이 중국 인민 공사를 연구했을까요? 중국 인민 공사가 저지른 뻘짓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슐라 르 귄이 일부러 전쟁 이야기를 간과했을까요? <빼앗긴 자들>은 침략 전쟁 가능성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중국 인민 공사에게 엄청난 타격을 줬음에도, 아나레스 위성 옆에 엄청난 강대국 행성이 있음에도, <빼앗긴 자들>은 침략 전쟁을 고찰하지 않아요. 어쩌면 어슐라 르 귄은 그런 사실을 알았을지 모릅니다. 중국 인민 공사를 참고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슐라 르 귄은 그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지 모릅니다. 설사 어슐라 르 귄이 중국 인민 공사를 참고하지 않았다고 해도, 침략 전쟁 없이 <빼앗긴 자들>은 안락하게 공유 사회를 사변할 수 있었죠.



그래서 <빼앗긴 자들>은 다소 안락하고 낭만적입니다. 현실과 달리, 침략 전쟁 없이 아나레스 사람들은 낭만적으로 공유 사회를 실험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빼앗긴 자들>은 어떻게 우리가 생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게다가 이런 생산 관계는 쉽게 환경 보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주연 등장인물 타크베르는 생태학자입니다. 타크베르는 생명체들이 상호 작용하는 복합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생산 수단과 생산 관계를 독점한다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생산 수단과 자연 생태계에서 소외되겠죠. 누군가가 함부로 자연 생태계를 이용하고 환경 오염들을 일으킨다고 해도, 생산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환경 오염들을 막지 못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자연 생태계를 함께 관리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사람들은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물 다양성은 아름답죠. 왜 소수가 아름다움을 독차지해야 하나요? 그래서 <빼앗긴 자들>은 훌륭한 생태 문학이 될 수 있겠죠. 아무리 <반지 전쟁> 같은 소설에 수두룩하게 엔트들이 나온다고 해도, 생태 문학으로서 <반지 전쟁>은 <빼앗긴 자들>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빼앗긴 자들>은 소중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문명을 고찰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런 교훈을 마음 속에 새길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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