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의혹을 팝니다> - 환경 오염을 부정하는 용병 과학자들 본문
소설 <양들은 올려다본다>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자연 환경은 처참하게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숱한 고통들에 시달립니다.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고 자연 환경과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아요. SF 세상에서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드물지 않을 겁니다. 수많은 SF 독자들은 소설 <양들은 올려다본다>가 걸작이라고 칭송합니다. 하지만 걸작 반열에 올라서지 못한다고 해도, 다양한 SF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이야기하죠.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과학자들이나 환경 운동가들은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고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느라 애씁니다. 문제는 과학자들이나 환경 운동가들에게 힘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힘을 가진 세력들, 권력자들은 영리 기업들입니다. 영리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휘두를 수 있고,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어마어마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영리 기업들 앞에서 과학자들과 환경 운동가들은 그저 열정적인 개인들에 불과합니다. <양들은 올려다본다>에서 과학자들은 환경 오염들을 막고 싶어하나, 그들은 영리 기업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국가 정부? 국가 정부는 영리 기업들을 편듭니다. 기업들이 막대한 수익을 보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소설 <우주 상인>에서 환경 보호 단체 콘지는 영리 기업들을 공격합니다. 그들의 환경 운동은 비밀 결사 투쟁에 가깝습니다. 콘지는 녹색당이나 그린피스와 다릅니다. 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영리 기업들을 파악하고, 작전을 짜고, 기업 간부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거나 황당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자연 환경이 오염되고 천연 자원들이 고갈된다고 해도, 환경 운동 단체가 비밀 결사가 되어야 할까요? 하지만 <우주 상인>은 영리 기업들이 살인적인 폭력을 휘두른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지막지한 환경 오염들은 그런 살인적인 폭력에서 비롯했죠.
<양들은 올려다본다>처럼, <우주 상인>에서 국가 정부는 영리 기업들을 편듭니다. 영리 기업들은 국가 정부를 좌우할 수 있고, 국가 정부는 영리 기업들을 떠받드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 홉스가 주장하는 사회 계약론은 그저 지나가는 개도 웃지 않을 농담거리에 불과하겠죠. 국가는 약자들을 보살피지 않습니다. 국가는 강자들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강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약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존재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자들은 세계적인 영리 기업들입니다. 영리 기업들이 지구 생태계를 거덜낸다고 해도, 국가는 영리 기업들을 편듭니다. 그래서 콘지는 비밀 결사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게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심슨 가족> 극장판부터 <양들은 올려다본다>에 이르기까지, 영리 기업들은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SF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 정말 영리 기업들이 환경 오염들을 일으킬까요? 자연 환경이 오염된다고 해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영리 기업들이 오직 이윤만을 추구할까요? 환경 사회학 서적 <의혹을 팝니다>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의혹을 팝니다>는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책입니다.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대안을 내놓고 대안을 실천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다른 수많은 책들처럼, <의혹을 팝니다>는 우리가 대안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하지만 이 책의 진짜 묘미는 그런 것이 아닐 겁니다. 제목처럼, <의혹을 팝니다>는 의혹을 파는 사람들, 과학을 의혹으로 포장하는 사람들, 과학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고발합니다. 누가 의혹을 팔까요? 누가 과학을 의혹으로 포장했을까요? 누가 과학에 의혹을 제기할까요? 과학자들이 흡연과 산성비와 오존층 구멍과 DDT를 비롯해 살충제와 기후 변화가 심각하게 위험하다고 경고할 때, 누가 의혹을 제기할까요? 그들은 영리 기업들, 자유 시장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과학자들입니다. 이런 과학자들은 과학이 아니라 자본에 충성해요.
<의혹을 팝니다>는 흡연, 산성비, 스타 워즈 계획, 간접 흡연, 오존층 구멍, 살충제와 레이첼 카슨, 기후 변화를 차례로 검토합니다. 그러는 동안 이 책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어떻게 과학자들이 영리 기업들의 용병이 되었는지 밝힙니다. 이런 '용병 과학자들'에게 더 이상 과학적인 방법론과 자연 과학적인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용병 과학자들은 보수 우파적인 가치관과 자유 시장들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합니다. 설사 자유 시장이 과학적인 방법론과 자연 과학적인 사실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자유 시장을 옹호하기 위해 용병 과학자들은 거리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길을 거침없이 나갑니다.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세계적인 영리 기업들이 엄청난 자금으로 후원하기 때문이죠. 용병 과학자들은 얼마든지 싸울 수 있고 지치지 않고 덤빌 수 있습니다. 설사 자연 과학계가 용병 과학자들을 몰아붙인다고 해도, 용병 과학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영리 기업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막대한 수익은 각종 보수 우파적인 싱크 탱크들, 과학 재단들, 과학 잡지들, 인터넷 사이트들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싱크 탱크들과 과학 재단들과 과학 잡지들과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용병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오존층 구멍 문제, 살충제 문제, 기후 변화를 부정할 수 있어요.
흔히 사람들은 (자연) 과학이 객관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심지어 인문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을 부러워합니다. 자연 과학은 오직 하나의 대답만을 내놓습니다. 자연 과학은 실험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실험 과정을 증명할 수 있고, 딱 부러지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인문학과 사회 과학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인문학자들과 사회 과학자들은 자연 과학 분야를 부러워하죠. 사람들은 모든 자연 과학자가 과학적인 진리를 추구할 거라고 믿습니다. 인문학 및 사회 과학과 달리, 자연 과학은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죠.
하지만 <의혹을 팝니다>는 그런 믿음이 함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 과학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은 객관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자연 과학은 회의하는 학문이고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학문입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단정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변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단호하거나 문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예외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둡니다. 산업 발달이 기후 변화를 초래했다고 해도, 과학자들이 그걸 관찰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무슨 가능성(산업 발달이 온실 가스를 뿜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지 이야기할 뿐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과학자들이 단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빈 틈을 남길 겁니다. 빈 틈이 있다면, 용병 과학자들은 빈 틈을 파고들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신중하게 예외적인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용병 과학자들은 그런 예외적인 가능성을 파고듭니다. 사실 예외적인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 예외적입니다. 하지만 용병 과학자들은 그런 예외적인 가능성이 주된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과장합니다. 과학자들이 언제나 신중하게 발언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쉽게 단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신중한 발언과 조심스러운 추론은 빌미를 제공합니다. 용병 과학자들은 그런 빌미를 신나게 뻥튀기하죠.
자연 과학은 객관적인 분야가 아닙니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자들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론들을 지속적으로 회의하고, 그러는 동안 용병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열심히 부풀릴 수 있습니다. 이건 자연 과학적인 방법론이 드러내는 한계입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자연 과학 분야에는 딱 부러지는 대답이 없습니다. 지적 설계가 엉터리 광신이라고 해도, 자연 과학자들은 지적 설계가 엉터리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은 인간이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지적 설계자를 관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건 단정이 아니죠. 그래서 광신도들은 진화 이론에 빈 틈이 있다고 나불거릴 수 있습니다.
용병 과학자들과 지적 설계 광신도들은 비슷합니다. 용병 과학자들은 자유 시장을 옹호하기 원하고, 지적 설계 광신도들은 근본주의 광신을 유지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비슷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 과학자들이 단정하지 않을 때, 용병 과학자들과 광신도들은 빈 틈을 파고듭니다. 이렇게 자연 과학적인 방법론은 문제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이런 방법론을 버려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우리가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과학적인 방법론은 우주와 자연을 가장 오류 없이 파악하는 방법일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입니다. 불완전한 동물로서 인간은 '불완전한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지해야 합니다. 비록 이게 불완전하다고 해도, 이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논리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논리적인 사고 방식을 갈고 닦아야 할 겁니다. 전문가들, 자연 과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우리는 그런 문제 제기가 논리적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논리인지 알지 못합니다. 용병 과학자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고 기후 변화가 거짓이라고 주장해요.
용병 과학자들은 오직 입으로만 떠들지 않습니다. 다른 과학자들처럼, 그들은 온갖 자료들을 들이댑니다. 그것들은 조작된 자료들이죠. 심지어 용병 과학자들은 아무 근거 없는 문장들을 인용하고, 임의로 자료를 추출하고, 전반적인 통계가 아니라 부분적인 통계를 끌어들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유부단한 과학자들을 이용합니다. 우유부단한 과학자들이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용병 과학자들은 그런 과학자들을 이용해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죠.
이른바 비전문가들, 일반적인 민중들이 온갖 자료들, 데이터들, 그래프들, 함수들, 표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용병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 곡선들을 주르륵 늘어놓는다면, 일반적인 민중들이 조작과 거짓과 날조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습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노련한 언론인들조차 무엇이 조작과 거짓과 날조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복잡한 그래프들과 통계들과 수식들과 표들은 노련한 언론인들을 속일 수 있죠. 노련한 언론인들은 그게 자연 과학이라고 정말 믿을지 모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공포의 제국>을 썼을 때, 어떤 SF 독자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모든 SF 독자가 야유를 보낼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비단 자연 과학 분야에만 있지 않습니다. 경제학 역시 이런 문제를 겪어요. 19세기 이후, 주류 경제학자들은 '정치' 경제학을 버리고 경제학을 추구합니다. 정치 경제학은 정치, 사회 구조, 경제 현상을 서로 밀접하게 다룹니다. 하지만 정치와 사회 구조가 경제 현상에 끼어들 때,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게 자유 시장을 침범한다고 여겼습니다. 경제학은 순수하게 수익을 계산하는 수학적인 학문이 되어야 합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걸 원했어요. 주류 경제학은 정치와 사회 구조를 걷어차고 온갖 함수들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경제학 학생들은 수학 공부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 자연 과학 분야(수학 분야)로 들어가기 원하죠. 하지만 그건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농담입니다. 정치와 사회 구조는 경제 현상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정치학과 사회학이 사회 과학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경제학 역시 사회 과학을 떠나지 못합니다. 환경 사회학이 생태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경제학은 자연 과학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아니, 환경 오염들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경제학은 생태학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경제학은 그걸 거부하겠죠. 그걸 거부함에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자연 과학 분야에 들어가고 싶어하죠.
이런 용병 과학자들과 주류 경제학을 경계하고 싶다면, 민중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민중들이 온갖 그래프들과 함수들에 속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의혹을 팝니다>는 민중들이 권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리 기업들은 가장 커다란 권력이 되고, 권력은 얼마든지 자연 과학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자연 과학을 짓밟을 때, 아무리 사람들이 자연 과학을 이해하기 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잘못된 함정으로 빠질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온갖 그래프들과 함수들 넘어 권력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권력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야 하고 자유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자유 시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영리 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는 동안, 환경 오염들이 심각해지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한다고 해도, 영리 기업들은 거기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자유 시장 경제는 언제나 실패를 되풀이했습니다. 적어도 소비에트 연방이나 중국 인민 공사는 왜 자신들이 실패했는지 변명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 인민 공사는 세계 대전을 돌파해야 했고 초강대국 미국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자유 시장에게는 변명거리가 없죠. 언제나 자본주의가 강자였기 때문입니다.
밀턴 프리드먼처럼 자유 방임주의자조차 자유 시장 경제가 완전하게 작동할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시장 경제 속에서 모든 시장 참가자가 동등하게 정보를 얻을 때, 모든 시장 참가자가 비슷한 생산 수단을 차지할 때, 자유 시장 경제는 제대로 작동합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수직적인, 아주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있습니다. 이건 심각한 정보 불균형과 소유 불균형을 부릅니다. 시장 참가자는 동등하게 정보를 얻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세계화 속에서 인도네시아 시골 할머니와 미국 대기업 간부가 똑같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자유 시장 경제는 불가능합니다. 구조적으로 자유 시장 경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언제나 실패하고, 환경 오염은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런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리 기업들은 환경 오염들을 은폐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영리 기업들은 용병 과학자들을 이용하고, 용병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없다고 날조합니다. 그들은 흡연이 폐암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산성비의 원인이 산업 발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심지어 가장 부유할 때조차 소비에트 연방이 미국을 넘어서지 못했음에도) 소비에트 연방이 당장 미국을 침략할 거라고 말하고, 레이첼 카슨이 수백만 명을 굶겨죽였다고 말합니다. 용병 과학자들은 의혹들을 팝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이런 자본주의 현실입니다. 자본주의 현실은 온갖 날조들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비단 미국 민중들만 이런 세뇌들에 속을까요? 그건 아니겠죠. 남한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은 날조들을 배우죠. 진보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미화할 때, 시민 운동가들은 그게 옳다고 간주하죠. 문화 예술이 자본주의를 숭배할 때, 독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본주의를 신뢰하죠. 그래서 어린 학생들은 무조건 대기업에게 충성하기 원하고, 시민 운동가들은 약자들을 배신하고, 독자들은 뜨거운 눈물로서 자본주의를 지지하죠. <의혹을 팝니다>는 자연 과학계 내부를 보여줬으나, 사회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날조들을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의혹을 팝니다>는 치가 떨리는 책입니다. 결국 기후 변화는 자연 과학적인 문제보다 자유 시장 문제와 세뇌 문제가 됩니다. <의혹을 팝니다>는 그런 문제를 신랄하게 고발하죠. 물론 <의혹을 팝니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혹을 팝니다>는 소비에트 연방과 공산주의가 무조건 전체주의 악당이라고 간주합니다. 이 책은 왜 소비에트 연방이 사회주의 노선에서 탈선했는지 자세히 분석하지 않아요. 유럽과 미국이 파쇼주의를 수수방관했음에도, 영국과 미국 지도자들보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레프 트로츠키가 2차 대전을 막고 싶어했음에도, 유럽과 미국 지도자들이 나치와 2차 세계 대전을 부추겼음에도, <의혹을 팝니다>는 그런 사실들을 언급하지 않죠. 하지만 <의혹을 팝니다>는 바쁘게 용병 과학자들을 쫓아다니느라 왜 소비에트 연방이 탈선했는지 자세히 분석하지 못했겠죠. 그런 여유는 없었을 겁니다. 이 책이 실수했다고 해도, 이 책의 장점은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끔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주 상인>은 우스꽝스럽거나 황당무계한 설정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정말 비밀 결사대를 조직해야 할까요? 자연 환경들을 복원하고 영리 기업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환경 운동이 비밀 결사 투쟁이 되어야 할까요? 어쩌면 나중에 환경 운동은 정말 비밀 결사대가 되어야 할지 모르죠. 환경 운동은 <우주 상인>을 넘고 <문명: 비욘드 어스>의 조화 친화도처럼 거대 괴수 병기를 만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 나오는 늑대인간들처럼, 환경 운동가들은 투쟁적인 전사들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SF 세상에는 온갖 환경 아포칼립스들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전염병, 기후 변화, 거대 괴수, 비경 탐험 모두 환경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죠.
문제는 환경 아포칼립스가 자유 시장의 용병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자유 시장의 용병이 될지 모릅니다. 환경 오염을 이야기한다고 자부하는 숱한 SF 창작물들이 정말 자유 시장을 제대로 비판할까요? 그런 창작물들은 자유 시장을 옹호할지 모릅니다. 사실 환경 오염을 떠든다고 자부하는 대단하고 고상한 SF 창작물들께서는 자유 시장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퍼지든, 거대 괴수가 상륙하든, 지구인이 외계 생태계로 도피하든, 다들 자유 시장을 외면하느라 난리법석을 떱니다. SF 창작물들이 환경 오염을 이야기한답시고 자유 시장을 옹호할 때, SF 팬들은 그런 세뇌에 물들겠죠. 그런 SF 팬들이 환경 운동에 참가할 때, 그들은 무모하게 엉뚱한 방향으로 달릴 겁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해야 할 겁니다. 각종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비평하고, 대안을 내놓고, 대안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의심하고, 분석하고, 되짚어보고, 회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근본적인 고민이 없다면, 근본적인 고민 없이 무조건 우리가 대안을 실천한다면, 약자들을 배신하는 숱한 시민 운동가들처럼, 우리는 끝도 없는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