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대혼란>과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 본문
앤드류 니키포룩이 쓴 <대혼란>은 자유 무역과 생태계 교란을 고발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세계화 때문에 온갖 생태계, 미생물들, 바이러스들이 서로 뒤섞이고, 이런 것들이 생태계 교란을 유발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이곳저곳에서 원자재들을 수입하고, 상품들을 가공하고, 다시 그것들을 수출합니다. 선박들, 열차들, 항공기들은 원자재들과 상품들을 싣고 세계 곳곳을 누빕니다. 문제는 선박들과 열차들과 항공기들이 돌아다닐 때, 온갖 생물들과 바이러스들이 함께 무임승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덕분에 북아메리카 해안과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이 뒤섞이고, 중앙 아프리카 식물이 동남 아시아에 가고, 남아메리카 미생물이 아라비아 해안을 떠돌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해외 동물들을 사들이고, 그것들을 다시 낯선 자연 환경에 풀어놓습니다. 그런 동물들은 토착 생명체들을 몰아내고, 자연 생태계를 교란합니다. 그렇게 교란된 생태계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주변 환경을 계속 교란합니다. 이는 대대적인 생물 다양성 감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이 감소할 때, 치명적인 질병은 신나게 활개칠 수 있죠.
문제는 비단 생태계 교란만이 아닙니다. 광우병 같은 질병이 퍼졌을 때, 대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살처분을 강행합니다. 기후 변화는 산호초들을 파괴하고 죽음의 바다를 만듭니다. 대기업들이 온실 가스들을 열심히 뿜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사라지지 않죠. 강대국들은 질병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온갖 생물 병기들을 개발합니다. 이런 생물 병기들은 비단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엄청난 생물학적 재앙이 될 수 있어요. 대기업들이 닭들이나 돼지들을 좁은 축사에서 키운다면, 그런 축사는 질병이 깽판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 될 겁니다.
이렇게 앤드류 니키포룩은 공장형 축산, 외래종 수입, 단백질 사료, 단일화 농장, 생물 병기 개발, 기후 변화와 수인성 질병, 진드기와 모기 같은 해충들, 부실한 위생 관리를 이용해 얼마나 현대 문명이 생물적인 재앙에 취약한지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대혼란>을 모두 9장으로 나누고, 생물 다양성 감소와 치명적인 질병과 위험한 생물 병기와 기후 변화와 해충들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당연히 심각한 소재들처럼 말투는 꽤나 신랄합니다. <대혼란>은 조만간 현대 인류 문명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파국을 맞이할 거라고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이런 환경 오염 서적들은 언제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잔뜩 풍깁니다. 닐 타이슨 같은 천문학자가 쓴 천문학 서적들이 하드 SF 소설과 비슷하다면, <대혼란> 같은 서적은 각종 (환경 오염이나 질병)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과 비슷합니다. 이는 <대혼란>이 SF 소설 같은 주제를 드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환경 오염이나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는 <대혼란> 같은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SF 독자는 이런 책을 각종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과 비교할 수 있겠죠. 게다가 이런 책을 읽는다면, SF 독자는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 그저 SF 소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단순한 SF 소설이 아닙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나 질병 아포칼립스는 시시각각 현대 문명을 물들이는 중이고, 환경 재난과 생물학적 재난을 경고하는 SF 소설들은 일종의 경고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재난을 경고하기 위해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은 소설을 쓸 겁니다. 그래서 마가렛 앳우드 같은 작가는 자신이 SF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대혼란>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관점에서 <대혼란>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과 비슷한 주제를 드러냅니다.
이는 <대혼란>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대혼란>이 SF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도, 소설은 소설이고 논픽션은 논픽션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이나 우밍이나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런 소설과 <대혼란>은 엄연히 다를 겁니다. SF 독자는 우밍이 쓴 질병 아포칼립스 소설과 <대혼란>에서 여러 공통점들을 뽑아낼 수 있겠으나, SF 소설과 <대혼란>은 엄연히 다르겠죠.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저 주제나 분위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소설을 이루는 배경이나 사건에 속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은 배경과 사건 이외에 등장인물 역시 요구합니다. 사실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읽기 위해 많은 독자들은 소설을 펼칠 겁니다. 소설은 일상을 묘사합니다. SF 소설은 상상의 날개를 펴나, 가상의 일상 역시 일상입니다. 그런 가상의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울고 웃고 떠듭니다. 독자들은 자신을 그런 등장인물에게 투영하고, 삶의 단면을 느낄 수 있겠죠.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쓴 소설 <와인드업 걸>은 환경 아포칼립스이자 질병 아포칼립스입니다. 동시에 이 소설에는 다국적 식량 기업 직원, 성 노예 인조인간, 약소국 환경 경찰, 강대국 이주민 노동자 등이 등장합니다. 독자들은 이런 등장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가상의 미래 사회에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겠죠.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의 단면에 생생하게 접촉하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죠. 소설은 만화나 영화보다 이런 특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텍스트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념들을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어요. 아무리 배우가 연기를 잘 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림체가 유려하다고 해도, 영화나 만화는 텍스트가 포착하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죠. 물론 이는 소설이 무조건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만화나 영화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모든 매체에게는 각자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저는 그저 소설이 드러내는 장점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작가는 인조인간이나 환경 경찰이 고민하는 부분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고, 독자들은 그들의 관념 속으로 자세히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대혼란> 같은 논픽션 서적에는 이런 부분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대혼란>과 <와인드업 걸>이 똑같이 환경 오염이나 질병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양쪽은 서로 다릅니다. <대혼란>을 읽는 감성과 <와인드업 걸>을 읽는 감성은 서로 다릅니다. <대혼란> 같은 서적 역시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이나 아픔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저자는 그걸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습니다. <대혼란> 같은 책에는 갈등을 부추기거나 해소하는 대화나 말싸움 장면이 없죠.
<와인드업 걸>에는 이주민 노동자(중국인)가 다국적 기업 직원(미국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굴욕감을 느끼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순간은 <대혼란>에 나오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장면이 나온다고 해도, 저자는 그런 장면을 감정적으로 포장하거나 꾸미지 않겠죠. <대혼란> 같은 책은 감성보다 정보를 먼저 전달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와인드업 걸>을 읽겠죠. 등장인물의 일상에 자신을 투영하기 위해. 그래서 <대혼란>과 <와인드업 걸>이 서로 비슷한 분위기나 주제를 공유한다고 해도, 독자는 SF 소설을 읽을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떠드는 이유는 SF 소설이 오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SF 소설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그리고 일부 SF 매니아들조차) SF 소설이 자연 과학 서적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독자들은 SF 소설이 자연 과학 지식들을 늘어놓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SF 소설과 자연 과학 지식은 필수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드 SF 소설에 수렴할수록 SF 작가들은 자연 과학 지식들을 늘어놔야 합니다. 심지어 좀 더 교묘하게 뻥을 치기 위해 사이언스 판타지 작가들조차 자연 과학 지식들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쓰고 싶은 작가에게 <대혼란> 같은 책은 좋은 원천이 될 겁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작가는 이런 책들에서 다양한 소재들을 뽑아낼 수 있겠죠. 하드 SF 독자들이 닐 타이슨이 출현하는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 독자들은 <대혼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SF 소설과 자연 과학 지식이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해도, 이는 SF 소설이 과학 논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입니다. 소설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자연 과학 지식을 얻고 싶은 독자는 <사이언스>를 구독해야 할 겁니다.
자연 과학 지식이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 과학 지식을 포함하는) SF 소설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SF 소설은 일반적인 주류 문학보다 특별합니다. 주류 문학은 그저 고정적인 현재를 이야기하나, SF 소설들은 변혁을 이야기하고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뚜렷한 차이입니다. 세상을 고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이 바뀐다고 주장하는 시각은 절대 똑같지 않습니다. 종종 이런 이유 때문에 SF 독자들은 주류 문학을 깔봅니다. 주류 문학이 고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자신들이 훨씬 선구적이라고 느낍니다. 그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사고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 방식은 무조건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SF 소설이 자연 과학 지식을 말하고 변혁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런 요소들은 SF 소설을 과학 논문으로 탈바꿈시키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특별한 소설입니다. 특별한 소설 역시 (과학 논문이 아니라) 소설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식인들이나 과학자들을 특별하게 숭배하기 때문에 SF 소설 역시 그런 숭배를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지식인들은 우리가 숭배할 대상이 절대 아니죠.)
그렇다고 해도 이는 SF 소설이 자연 과학 지식과 완전히 갈라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이 과학 논문이 아니라고 해도, SF 소설은 자연 과학 서적과 많은 공통점들을 드러냅니다. SF 소설과 자연 과학 서적은 서로 겹치지 않는 동시에 서로 겹치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죠. 저는 이걸 뭐라고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유명한 SF 평론가들은 이런 관계를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를 만들었는지 모르죠. 저는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우리는 SF 소설과 자연 과학 서적이 맺은 관계를 음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대혼란>은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어요. 앤드류 니키포룩은 신랄한 밀투를 이용해 자유 무역과 다국적 기업들과 생태계 교란과 질병 재앙을 무섭게 떠듭니다. <대혼란>은 생물학적 재앙이 현대 문명을 집어삼킨다고 경고하고 경고하고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신랄한 말투와 경고는 어지간한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보다 끔찍합니다. 만약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을 때, 독자가 <대혼란>을 떠올릴 수 있다면, 소설을 읽는 긴장감은 훨씬 높아질지 모르죠. 정말 환경 아포칼립스는 그저 SF 소설이 아닌 것 같아요.
전문적인 식견이 없기 때문에 저는 <대혼란>이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떠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투가 너무 신랄하기 때문에 종종 저는 앤드류 니키포룩이 사태를 너무 과장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대혼란>에는 틀린 구석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인간이 있겠어요. 하지만 틀린 점들이 많다고 해도, <대혼란>이 경고하는 주제 그 차체는 틀리지 않을 겁니다. 자유 무역은 분명히 수많은 생물들과 기생충들과 질병들과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이동 수단입니다.
무역 선박들, 열차들, 항공기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질병을 퍼뜨리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대기업들을 숭배하는 정부는 공장형 축산보다 야생 동물들을 탓합니다. 대기업들 때문에 죄 없는 야생 동물들은 죽어나갑니다. 질병이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상황에서 정부조차 대대적으로 야생 동물들을 없앱니다. 생태학자들은 자유 무역이 문제라고 목이 터져라 떠듭니다. 하지만 대기업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정부는 공장형 축산보다 야생 동물들을 없앱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태학자들이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어요. 환경 운동가들이 욕설을 쏟아내고 X랄발광을 떤다고 해도, 그게 정말 잘못일까요.
<대혼란>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혼란>이 얼마나 자본주이 시장 경제가 위험한지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태적이고 생물학적인 재앙 앞에서 다른 문제들은 애교 같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 군사 독재가 폭력적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네, 공산주의 군사 독재는 폭력적이죠. 하지만 그게 정말 원대한 폭력일까요? 콜레라가 해양 생태계를 휩쓸고, 살처분이 숱한 동물들을 피무덤으로 끌고 가고, 생명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늘어나고, 온갖 해충들이 치명적인 질병들을 퍼뜨리고, 괴로움 속에서 사람들과 야생 동물들이 죽어가는 상황 앞에서 고작 군사 독재가 폭력이 될까요? 이렇게 행성적이고 생물학적인 대재앙 앞에서 지엽적인 군사 독재 따위가 폭력이 될까요? 소비에트 연방이나 킬링필드가 폭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이런 생태적인 재앙을 모를 만큼 멍청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현실을 왜곡하거나.
이는 공산주의 군사 독재가 좋거나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 문명에서 킬링필드 같은 대학살은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 인민 공사 같은 거대한 삽질 역시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생물 병기를 실험했고, 이런 짓거리는 절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폭력은 소비에트 연방을 사회주의 노선에서 밀어냈습니다. 저는 킬링필드나 중국 인민 공사를 절대 변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유 무역이 저지르는 엄청난 생태계 교란 앞에서 킬링필드나 중국 인민 공사는 감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겁니다. 미국 같은 자본주의 강대국은 여전히 생물 병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폭력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훨씬 거대하고 심각한 폭력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생태계 교란은 자유 무역,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킬링필드나 중국 인민 공사를 비판할 자격이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근본적인 폭력과 파생적인 폭력이 있고, 거대한 폭력과 작은 폭력이 있습니다. 중국 인민 공사나 크메르 루즈는 모두 가난을 딛고 일어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가난을 겪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기득권을 확장하기 위해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생태적인 재앙을 부르죠. 이는 분명히 거대하고 근본적인 폭력입니다. 앤드류 니키포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자고 말하지 않으나, 저는 독자들이 그런 주제를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