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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달을 향한 모험>보다 생태 사회주의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달을 향한 모험>보다 생태 사회주의

OneTiger 2018. 5. 18. 18:09

[언젠가 우리는 외계 인공 생태계를 조성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전부가 아니겠죠.]



아무르 호랑이는 아주 멋진 야수입니다. 몸매는 육중하고 동시에 낭창낭창합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동시에 날렵하게 뛰거나 조용하게 포복할 수 있습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강력한 전사보다 노련한 암살자에 가깝습니다. 고양이과 맹수들 중 가장 교활한 암살자는 표범일 겁니다. 상대적으로 작고 가볍기 때문에 표범은 지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노릴 수 있어요. 표범과 달리, 호랑이, 특히 아무르 호랑이는 그렇게 지형을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합니다.


대신 아무르 호랑이는 육중한 체구를 이용해 목표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형을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르 호랑이 역시 암살자에 속합니다. 은신과 위장을 위해 호랑이는 멋진 줄무늬들을 이용합니다. 황토색 바탕에 길다란 검은 줄무늬들은 화려한 야성을 자랑합니다. 아마 호랑이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검은 줄무늬들에 반했을 겁니다. 종종 동물 서열 싸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무르 호랑이가 북극곰보다 약하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호랑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호랑이가 살아가는 모습이 좋기 때문입니다.



동물 서열 싸움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무르 호랑이는 살육 병기가 아닙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자연 생태계의 구성원이고, 특정한 자연 생태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연 생태계에서 아무르 호랑이가 맡은 역할이 좋기 때문입니다. 오직 동물 서열 싸움으로서 아무르 호랑이를 평가한다면, 그건 살육에 쾌감을 느끼는 편협한 태도일 겁니다. 아무르 호랑이가 매력적인 이유는 아무르 호랑이가 싸움박질을 잘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시각을 줄무늬 다람쥐나 장수 거북이나 레드 우드나 광대 버섯에 적용할 수 있겠죠.


어떤 사람들은 줄무늬 다람쥐나 장수 거북이나 레드 우드나 광대 버섯을 좋아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생명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좋기 때문일 겁니다. 왜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오직 싸움박질로서 바라봐야 할까요? 장수 거북은 육중하고, 우아하고, 기괴하고, 거대합니다. 그런 매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장수 거북을 좋아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줄무늬 다람쥐나 레드 우드나 광대 버섯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생명체들이 거시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생태계에는 정말 활력이 넘치죠.



아마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하는 동물학자나 사진 작가에게 묻는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아무르 호랑이가 멋진지 떠들 겁니다. 하루 종일 그들은 떠들 수 있겠죠. 그런 열정 때문에 그들은 구태여 혹독한 밀림을 찾고 호랑이를 연구하거나 관찰하겠죠. 하지만 아무르 호랑이는 심각한 멸종 위기 동물입니다. 언제가 아무르 호랑이는 완전히 사라질지 모릅니다. 설사 동물원에서 아무르 호랑이들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것들은 진짜 아무르 호랑이가 아닐 겁니다. 호랑이는 야생 동물입니다. 호랑이는 동물원 철창이 아니라 야생 밀림을 활보해야 합니다.


목표를 암살하지 않는 호랑이가 무슨 호랑이겠어요. 그건 그저 호랑이처럼 보이는 뭔가에 불과하겠죠. 호랑이라는 존재는 오직 유전 형질로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야생 밀림이라는 자연 생태계가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야생 아무르 호랑이가 멸종한다면, 아무르 호랑이를 신나게 이야기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의 두 눈 앞에서 아무르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동물학자들이나 사진 작가들이나 아마추어 자연 연구원들은 아무르 호랑이를 신나게 떠들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고, 울분을 터뜨리겠죠.



아무르 호랑이는 스피노사우루스가 아닙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자연적으로 멸종했기 때문에 공룡 팬들은 아무 회한 없이 스피노사우루스를 떠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르 호랑이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 따라서 아무르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줄무늬 야수를 신나게 떠들지 못할 겁니다. 아직 아무르 호랑이는 멸종하지 않았으나, 동물학자들은 언제나 불안한 심정을 내비칩니다. 아무르 호랑이를 이야기하는 행위는 언제나 불안한 미래로 이어집니다. 언제 호랑이가 멸종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야생 아무르 호랑이가 멸종한다고 해도, 동물학자들은 별로 놀라지 않을 겁니다.


대신 그들은 입술을 깨물고 울분을 터뜨리겠죠. 그들은 멸종을 예견했으나, 막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르 호랑이를 신나게 이야기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정말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왜 호랑이가 위기에 몰렸는지 분석하고, 호랑이를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생물 다양성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분별한 산업 개발 때문이고,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르 호랑이를 정말 보존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비록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하지 않거나 잘 모른다고 해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은 호랑이를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비단 아무르 호랑이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에 전반적으로 이런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죠. 기후 변화 같은 행성적인 대재난이 몰려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자연 생태계에 전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면, 미래의 생태학이나 인공 생태계에 이런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죠. 언젠가 인류는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짓고, 그 안에 인공적인 생태계나 농장을 만들지 모릅니다. SF 팬들은 이런 인공 생태계를 재미있게 떠들 수 있겠죠. 하지만 소수 권력자를 위해 그런 인공 생태계가 존재한다면? 소수 권력자가 인공 생태계를 착취한다면?


SF 팬들이 인공 생태계를 재미있게 떠들 수 있을까요? SF 팬들이 인공 생태계를 떠들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무르 호랑이가 사라지고, 생물 다양성이 감소하고, 기후 변화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SF 팬들이 인공 생태계를 떠든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태계조차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SF 팬들이 인공 생태계를 재미있게 떠들 수 있을까요? 오히려 SF 팬들은 자본주의를 좀 더 비판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는 SF 팬들에게 무조건 그런 의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르 호랑이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인공 생태계를 재미있게 떠든다면, 그건 다소 모순적인 상황일 겁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우주 정거장의 농장과 자본주의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할 겁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아무르 호랑이를 멸종시킨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우주 정거장의 농장과 관계가 없을 거라고 말할 겁니다. 거대한 우주 정거장이 나타난다면, 우주 정거장 사람들은 자본주의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 구조를 이룰지 모릅니다. <조던의 아이들> 같은 소설에서 사람들은 시장 경제를 만들지 않고 대기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만약 인류가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짓고, 인공 생태계나 우주 농장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들은 자본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우주 농장은 자본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우주 농장에 마수를 뻗을지 모릅니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우주 농장을 착취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비약적인 논리라고 지적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옳을지 모르죠.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람들이 틀릴지 모릅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 정말 자본주의 체계는 우주 농장조차 착취할지 모릅니다. 그런 가능성은 꽤나 높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한히 경쟁하고 무한히 확장합니다. 시장 경제 안에서 대기업들은 계속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기업들은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고 싶다면, 대기업들은 더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시장이 포화 상태라면, 대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계속 시장을 넓혔고, 극지나 외계 행성조차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남극이 성지이고 아무도 남극을 함부로 개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극을 차지하기 위해 이미 강대국들은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중입니다. 만약 대기업들이 자유롭게 외계 행성에 진출할 수 있다면, 그들이 외계 행성을 그냥 놔둘까요? 아무리 과학자들이 죽은 행성을 지구화하고 생명의 씨앗을 심어도, 지구화한 행성은 환경 오염에 시달릴 겁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대기업들은 지구화한 행성을 착취하겠죠. 만약 거기에 개척자들이 산다면, 개척자들은 환경 오염에 시달리고 고통을 받겠죠. 어쩌면 대량 학살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3세계가 그런 것처럼.



이런 비극적인 가능성은 꽤나 높습니다. 만약 인류가 우주로 진출할 때까지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한다면, 자본주의 체계는 우주 농장이나 지구화한 행성에 마수를 뻗을 겁니다. 어쩌면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기 전에 자본주의 체계는 소멸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영원불멸하지 않을 겁니다. 몇 천 년 동안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고, 자본주의 체계 역시 바뀔 겁니다. 21세기 사람들은 흑인 여자들이 투표하는 장면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과 300년이나 400년 전에 사람들은 흑인 여자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인류 문명이 계속 바뀐다면, 몇 백 년 이후 자본주의 역시 사라질지 모르죠. 20세기 사람들은 대기업들에 목숨을 걸었으나, 미래 사람들은 그런 꼬락서니가 웃기다고 비아냥거릴지 모릅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한다면, 대기업들에게 애걸복걸 매달리는 모습들이 다소 우스꽝스러울 겁니다. 어쩌면 인류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평화롭게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지을지 모릅니다. 그때 사회 구조는 우주 농장이나 지구화한 행성을 착취하지 않겠죠. 아마 사람들은 그런 미래를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은 대기업들이 사라진 세상을 절대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대기업들은 사회 전체를 장악했고, 우리의 관념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는 대기업들에게 애걸복걸 매달리는 노예입니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사회 구조입니다. 지배 계급이 자신에게 유리한 관념을 퍼뜨리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됩니다. 노예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쉽게 꿈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억압에 저항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억압적인 자본주의에 저항합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언젠가 자본주의는 소멸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가 사라진 이후, 더 좋은 세상이 찾아올까요? 저는 무조건 그렇다고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설사 기술적 특이점이나 기후 변화가 자본주의를 끝장낸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더 암울한 세상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런 암울한 사회 구조가 우주 농장이나 지구화한 행성에 마수를 뻗을지 모르죠.


이런 상황에서 SF 팬들이 재미있게 인공 생태계를 떠든다면, 그건 너무 한가하고 순진한 행동일지 모릅니다. 이는 그런 논의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공 생태계는 기발하고 신비한 설정이죠. 인류가 거대한 우주 정거장에 농장을 만들거나, 소행성 내부에 가공 생태계를 만들거나, 죽은 행성을 살리거나, 아예 생체 도시를 만들거나…. 솔직히 저는 인류가 생체 도시를 만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생체 도시를 만들어야 할까요? 하지만 살아있는 폐쇄 순환 체계를 돌리기 위해 생체 도시가 필요할지 모르죠. 누가 알겠습니까.



SF 팬들은 <화성의 왕궁에서> 같은 소설을 논의할 수 있고, 그건 정말 기발하고 재미있는 논의가 될 겁니다. 저 역시 그런 논의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암울한 사회 구조가 생체 도시를 착취한다면, 생체 도시 설정은 더 이상 재미있는 논의가 되지 못하겠죠. 진짜 문제는 그겁니다. 아무르 호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르 호랑이보다 자본주의 비판을 더 많이 떠들어야 할 겁니다.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르 호랑이가 멸종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르 호랑이를 정말 신나게 떠들고 싶다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더 많이 비판해야 할 겁니다.


생체 도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똑같은 논리입니다. 인공 생태계를 재미있게 논의하고 싶다면, SF 팬들은 인공 생태계보다 자본주의 비판을 더 많이 떠들어야 할 겁니다.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결국 인공 생태계가 오염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노동 조합이나 진보 정당이나 사회주의 경제학은 생체 도시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처럼 보입니다. 다른 좌파적인 가치들(성 소수자, 인종 평등, 제국주의 침략 비판) 역시 생체 도시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생체 도시와 떨어지지 못합니다. 생체 도시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SF 팬들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떠들어야 할 겁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는 SF 팬들이 무조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공 생태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작가들이나 SF 팬들에게 무조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인공 생태계를 논의한다면, 그건 너무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될 겁니다. 그런 논의는 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공허한 차원을 떠돌겠죠. <달을 향한 모험>이나 <마션> 같은 소설에서 인류는 죽은 위성에 생명의 씨앗을 심습니다. 가혹한 우주에서 녹색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이런 장면을 볼 때, SF 독자는 지구를 넘어 보다 넓은 세상을 떠올릴 수 있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겠죠. 왜 SF 소설을 읽겠어요? 우리가 더 넓은 세상과 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SF 소설이 재미있을 겁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사회 구조는 더 넓은 세상과 또 다른 존재를 착취하고 수탈하고 오염시킬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는 야생 동물들이 사라지고 자연 환경이 파괴되는 모습을 숱하게 봤습니다. <달을 향한 모험>이나 <마션>은 그런 모습을 걱정하지 않아요.



비단 이런 하드 SF 소설들만 아니라 SF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죠. 숱한 SF 게임들은 어떻게 외계 행성이나 우주 공간에서 인간이 지구화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스팀 같은 게임 플랫폼에서 스팀 유저들은 그런 게임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팀에서 외계 개척 게임을 검색한다면, 누구나 길다란 목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스페이스 콜로니>, <이매진 어스>, <아스트로니어>, <플래닛 노마드>, <오시리스: 뉴 던>, <서바이빙 마스>, <언클레임드 월드>, <에이븐 콜로니> 등등. 하지만 그런 게임들이 사회 구조를 고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달을 향한 모험>이나 <마션>에게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런 개척 게임들 역시 아무 것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임들은 그저 광활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 경관을 뽐낼 뿐입니다.


네, 그런 경관들은 멋집니다. 아주 멋지죠. 하지만 이 지구에도 그런 경관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그런 경관들을 파괴하고, 사람들 역시 환경 오염에 시달리죠. 만약 자본주의가 외계 행성이나 우주 공간에 마수를 뻗칠 수 있다면, 미친 듯이 착취하겠죠. 자본주의는 외계 생태계나 인공 생태계가 이윤을 위한 상품이나 자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아주 열심히 착취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 농장이나 외계 수족관을 떠든다면, 그건 너무 한가로운 설정 놀음이 될 겁니다. 자본주의를 고민하고 분석하고 비판할 때, 그런 설정 놀음은 현실에 밀착할 수 있겠죠.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참고해야 할 겁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가장 격렬하게 싸웠고 지금도 여전히 싸우는 중입니다. 거대한 소비에트 제국을 살피거나 제3세계 사회주의 투쟁을 살피거나, 우리는 그런 것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인공 생태계와 사회주의 투쟁이 너무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화성의 왕궁에서>와 제3세계 농민 운동은 너무 멀리 떨어진 요소 같습니다. 맞아요. 그렇게 보일 겁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과 싸우는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농민과 <화성의 왕궁에서>에 등장하는 생체 개척지는 너무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런 투쟁적인 농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체 개척지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외계 행성에 마수를 뻗는다면, 외계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파괴할 겁니다. 지금 지구에서 산호초들이 하얗게 오염되는 것처럼. SF 팬들은 "왜 내가 구태여 제3세계 농민 운동을 살펴봐야 하는가? 나는 그저 외계 생태계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할지 몰라요. 저는 그런 SF 팬들에게 아무르 호랑이를 쳐다보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아무르 호랑이는 외계 생태계가 직면할 미래를 상징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볼셰비키 정당이나 비아 캄페시나는 <달을 향한 모험>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논의한다면, 설사 그게 외계 생태계나 인공 생태계라고 해도, 우리는 환경 오염과 생물 다양성 문제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생물 다양성 문제는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져야 하겠죠. 생태 사회주의는 너무 멀고 힘들고 절망적이고 아득한 여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가시적인 것들에만 주목해서는 안 될 겁니다. 가시적인 것들을 넘어 우리는 근본적인 관계를 주목해야 할 겁니다. 이 세상이 단면적인 표면들로 이루어졌다면, 철학이 존재할 이유는 없겠죠.


가시적으로 자본주의와 외계 개척지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남아메리카 농민 운동이나 노동 조합이 <달을 향한 모험>과 무슨 관계를 맺겠어요? 하지만 자연과 문명은 서로 떨어지지 못합니다. 가시적인 표면을 넘어 근본적인 질서 속에서 자연과 문명은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와 외계 생태계라는 가상의 자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달을 향한 모험>이나 <언클레임드 월드> 같은 사이언스 픽션을 볼 때마다 저는 뭔가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착취적인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시각입니다. <달을 향한 모험>이나 <언클레임드 월드>는 그저 반쪽짜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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