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이슬란디아>와 서구적인 근대화 본문
SF 소설은 첨단 과학 기술과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이나 <해저 2만리>, <타임 머신>처럼 유명한 초기 SF 소설들은 자연 과학자를 소설 주인공으로 내세웠어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위대한 연금술사이고, 네모 선장은 해양 과학자이자 만능 공학자입니다. 시간 여행자는 직접 시간 여행 장치를 뚝딱뚝딱 만들었죠. 이런 특징은 20세기와 21세기로 이어지고, 여전히 많은 SF 작가들은 과학자들, 발명가들, 우주선 승무원들을 소설 주인공으로 내세워요.
심지어 사이언스 판타지 역시 과학자를 사랑하죠. 사회 과학적인 SF 소설 역시 그렇고요. 모든 SF 작가가 과학자들을 편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SF 세상에서 과학자는 상징적인 등장인물이고, 이는 SF 소설이 첨단 과학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 반증하죠. 하지만 어떤 SF 소설들은 그런 특징에 반발합니다. <아이슬란디아> 같은 소설이 좋은 사례일 겁니다. <아이슬란디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SF 소설이 아닙니다. 그보다 메리 셸리 이전의 SF 소설들, 토마스 모어나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소설들과 비슷해요. 본격적인 SF 이전의 원형적인 SF 소설이죠.
<아이슬란디아>는 유토피아 문학이 마련하는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소설 주인공은 이상적인 사회를 둘러봅니다. 이런 소설의 특징들 중 하나는 극적인 갈등이나 긴장이나 카타르시스가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상적인 사회에는 갈등이나 긴장이 없습니다. 설사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작가는 거기에 별로 집중하지 않아요. 많은 유토피아 문학들은 이상적인 사회 역시 갈등을 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런 갈등이 대대적인 문제로 터지지 않고, 작가 역시 그런 문제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보여주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유토피아 소설은 별로 재미가 없을지 몰라요. <아이슬란디아> 역시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 <아이슬란디아>는 첨단 과학 기술을 거부하는 유토피아 문학입니다. 이상적인 사회 안에서 주민들은 목가적으로 살아갑니다. 강대국은 아이슬란디아 주민들에게 철도를 제안하나, 주민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철도는 아이슬란디아 주민들에게 엄청난 기술 혁명이나, 그들은 기술 혁명 따위가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SF 세상에는 <아이슬란디아>처럼 (사이언스라는 어감과 어울리지 않게) 과학적인 진보에 반대하는 소설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과학적인 진보를 서구적인 근대화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과학적인 진보는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했고, 다른 대륙 국가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따라가느라 애썼습니다. (러시아를 비유럽적인 문명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러시아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보고 두 눈동자를 말똥말똥 떴습니다. 러시아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모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진보라고 여겼습니다.
21세기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은 유럽 국가들이 모범적인 문명이라고 여기고 인류가 유럽이나 미국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슬란디아>는 그런 서구적인 근대화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소설입니다. 이런 유토피아 문학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아이슬란디아> 역시 낭만적인 면모로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스틴 라이트가 제기한 문제가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적인 근대화가 최선인가? 결국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하는가? 다른 길로 가면 안 되는가? 왜 모든 인류가 유럽을 따라가야 하는가? 유럽이 정말 세련되고 우아하고 고상한 문명인가? 왜 인권 운동가들이나 진보 지식인들은 유럽만 열심히 부르짖는가?
현대 문명은 수많은 문제점들을 품었습니다. 현대 문명은 밑바닥 빈민들을 착취하고,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물 다양성을 줄입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유럽만 부르짖고, 서구적인 근대화를 쫓아가야 할까요? 저는 과학적인 진보나 첨단 기술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저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나 기술적 특이점이 해방으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이 무조건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비롯하는 결과일까요. 현대 문명이 품은 문제점들을 고치고 싶다면, 우리는 현대 문명을 낳은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벗어나야 할지 모릅니다.
가령, 대기업들이 공장 문을 닫는다고 가정하죠. 아마 수구 꼴통들은 경제가 망하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난리법석을 부릴 겁니다. 일반 시민들 역시 대기업과 거대 공장에게 목숨을 걸겠죠. 하지만 대기업과 거대 공장은 전형적인 근대화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대기업이나 거대 공장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마침내 우리는 현대 문명이 품은 문제점들을 고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서구적인 근대화를 따라가는 동시에 서구적인 근대화의 문제점들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건 다소 안일하거나 낙관적인 발상일지 몰라요.
서구적인 근대화는 진보가 아니라 공해일지 모릅니다. 블라디미르 레닌 같은 사람은 이런 발상을 좌파적인 소아병이라고 부르겠죠. 레닌은 서구적인 근대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믿었어요. 그런 믿음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동남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그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하고 뭔가 다른 발전 경로를 찾기 원했죠. 심지어 극단적인 세력들은 아예 도시 문명 자체를 거부하고 대량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비극은 끔찍하나, 저는 우리가 동남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세력들이 제기한 문제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들이 나라를 떠나도, 거대 공장들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서구적인 근대화를 따라갈 테고, 대규모 전쟁이나 환경 오염을 고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이슬란디아> 같은 소설에는 순진한 구석이 있으나, 우리는 이런 소설을 쉽게 버리면 안 될 겁니다. 서구적인 근대화는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나, 그건 겉모습일 뿐이고, 속은 썩어 들어갔을지 몰라요.
우리가 부족 사회로 돌아가야 할까요. 과학 기술에 반대하는 몇몇 SF 소설처럼 우리가 부족 사회로 돌아가야 할까요. 르네 바르자벨이 쓴 <대재난>처럼 우리가 온몸으로 과학 기술을 거부해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서구적인 근대화를 거부한다고 해도 무조건 부족 사회로 돌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은 부족 사회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수많은 공동체 운동들, 무트, 코뮌, 소비에트, 인민 공사, 자치적인 마을 같은 실험은 그런 대안일지 모릅니다. 그것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는 방법일지 몰라요.
물론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한다면, 우리는 여러 불편들을 겪어야 할 겁니다. 실험적인 대안이 정상 궤도에 돌입하기 전까지 우리는 덜 먹고, 더 아프고, 더 힘들게 일해야 할지 모릅니다.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러 문제점들에 부딪힐 겁니다. 수명이 줄거나 질병이 더 쉽게 퍼지거나 발품들을 많이 팔아야 할지 몰라요. 저는 그런 부작용들을 확신하지 못하겠으나, 분명히 어떤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당장 대기업들이 떠나고 거대 공장들이 문을 닫는다면, 분명히 우리는 힘들게 살아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삶일지 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 문명을 뜯어고치고 싶다면, 그런 길을 가야 할지 모릅니다.
사실 거대 자본가는 함부로 회사를 옮기거나 공장을 닫을 권리가 없습니다. 공장은 죽은 노동입니다. 공장을 지은 진짜 주인공들은 노동자들입니다. 자본가는 그저 자본을 투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본가가 자본을 소유한 이유는 인류 역사가 학살로 더러워졌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직접 통제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거대 자본가는 함부로 공장을 닫을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 정부는 노동자들보다 거대 자본가를 편들 겁니다. 역사적으로 국가 정부는 언제나 거대 자본가들을 편들었습니다. 심지어 복지 국가조차 그런 결과물이죠. (그래서 복지 국가는 권력의 나팔수가 됩니다.)
만약 국가 정부가 거대 자본가들을 편든다면,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하고 싶어하는 공동체는 대기업이나 거대 공장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은 힘들거나 어려울지 모릅니다. 게다가 국가 정부나 대기업들이 그런 공동체들을 가만히 놔둘까요. 많은 사람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하는 공동체가 낭만적인 발상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들은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국가들과 대기업들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요.
옛날에 디거스가 평등한 토지 공유를 주장했을 때, 권력자들은 그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현대적인 협동 조합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기업들이 그들의 명줄을 흔들기 때문이고요. 자치적인 공동체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체계 속에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기득권들은 다른 것들을 상품으로 만들고, 상품이 되지 않는 것들을 철폐합니다. 자치적인 공동체는 상품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사라집니다. 이는 자치적인 공동체에게 아주 심각한 위협입니다. 만약 동남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이 자치적인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폭력적인 저항이 시작되고, 극단적인 학살이 터지죠. 붉은 크메르 같은 조직은 아무 이유 없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붉은 크메르가 잘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시적인 폭력과 거기에서 파생한 폭력을 구분해야 할 겁니다. 붉은 크메르는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으나, 자본주의 기득권들이 저지른 폭력에 비한다면, 붉은 크메르는 애교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기득권들을 찬양하고, 소규모 저항 세력을 욕합니다. 수구 꼴통들이나 보수 우파들만 아니라 인권 운동가들이나 진보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인권 운동가들이나 진보 지식인들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볼셰비키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 기득권들이 러시아 소비에트를 침략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소비에트가 어떤 외계 행성이나 단절된 차원에서 혼자 고고하게 존재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소비에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본주의 기득권들에게 저항해야 했고, 결국 소비에트 노선에서 탈선했습니다.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 분산하기 원했으나, 1차 대전과 적백 내전과 온갖 사회적 불안들은 그걸 막았습니다. 중국 인민 공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어요.
왜 아무도 이런 현실을 지적하지 않을까요. 왜 사회주의는 무조건 빨갱이 악당이 되어야 하고,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고상하고 세련된 문명이 되어야 할까요. 모두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서구적인 근대화를 빨아주는 상황에서 붉은 크메르 같은 폭력적인 집단이 등장한다면, 그건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닐 겁니다. 붉은 크메르에게 침을 뱉고 싶나요? 네, 뱉으세요. 하지만 먼저 자본주의 강대국들에게 침을 뱉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부러워하고 (침을 뱉지 않고) 침을 흘리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치적인 공동체들이 널리 퍼질 수 있겠어요. 어떻게 사람들이 자치적인 공동체를 응원하겠어요.
소비에트 연방이나 중국 공산당을 비판할 때, 진보 지식인들은 개인의 자유를 언급합니다. 마치 자본주의 체계가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 자본주의 체계가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나요? 그건 헛소리죠. 외모를 뜯어고치는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성형 수술하겠습니까. 왜 여자들이 예뻐 보이기 위해 그렇게 애쓸까요. 왜 가난한 여자들은 창녀가 되고 몸을 팔아야 할까요. 노동자가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직접 통제하지 못하는 체계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계인가요.
여자들이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다면, 여자들이 생산 수단을 차지할 수 있다면, 여자들이 성형 수술에 매달리고 몸을 팔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 지식인들이 그렇게 비난하는 중국 공산당조차 (근대화된 서구 강대국들이 여자들을 깔아뭉갤 때) 여자들에게 생산 수단을 주려고 노력했어요. 인민 공사는 비참한 실패였으나, 적어도 인민 공사는 서구적인 근대화를 피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진보 지식인들은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죽어라 유럽만 빨아줍니다. 저는 진보 지식인들 역시 서구적인 근대화에 두 눈이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웅장한 공장들, 드높은 마천루들, 우아한 자동차들, 깔끔한 병원들, 반짝거리는 컴퓨터들. 서구적인 근대화는 멋지죠.
하지만 우리가 정말 현대 문명이 품은 문제점들을 고치고 싶다면, 우리는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겁니다. 저는 뭐라고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저는 완전히 보편적인 기본 소득 같은 대안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아이슬란디아> 같은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이 떠나고 거대 공장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야 할 겁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발상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 시민들이 계급 투쟁을 일으키고 생산 수단을 되찾는 시나리오를 꿈꿀지 몰라요. 그런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인민들이 스스로 대기업과 거대 공장을 운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 그런 날이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죠. 따라서 대기업이 떠나고 거대 공장이 문을 닫아도 우리는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할 용기가 없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런 방법을 모색하는 집단들을 응원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아이슬란디아> 같은 소설이 여전히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