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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 사회 구조를 고발하는 역겨움의 미학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페르디도 기차역>, 사회 구조를 고발하는 역겨움의 미학

OneTiger 2018. 7. 17. 20:08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스팀펑크는 19세기 유럽에 첨단 미래 기술이나 대체 역사를 투영하는 장르를 뜻합니다. 만약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인공 지능 로봇들이 돌아다니거나, 커다란 수송 비행선이 둥둥 떠다니거나, 개조 동물들이 뛰어다니거나,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운다면, 그걸 묘사하는 소설은 스팀펑크 소설이 될 수 있겠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책은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의 개정판입니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은 19세기 런던과 비슷한 뉴크로부존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묘시합니다.


뉴크로부존에는 비단 인간만 아니라 양서류 종족, 벌레 종족, 나무 종족, 조류 종족 등 다양한 유사 인간들이 살아갑니다. 지상과 바다에서 기괴한 동물들은 마차들과 화물선들을 이끌고, 인공 지능 로봇들은 증기를 쉭쉭 뿜습니다. 도시의 한쪽에서는 한창 인공 지능이 각성하는 중이고, 개인 경호원부터 동물원까지 역겨운 개조 생명체들이 즐비합니다. 다른 차원들에서 비롯한 악마나 외계 존재, 돌연변이들 역시 뉴크로부존을 지나갑니다. 술집에서는 기계교 신자와 마법사가 자신들의 신념을 이용해 열심히 말싸움을 벌입니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은 아주 놀랍고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를 창조했고,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그런 도시를 샅샅이 누빕니다.



뉴크로부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들 중 하나는 산업 폐기물입니다. 도시 곳곳에는 추악한 산업 폐기물들이 널렸고 널렸습니다. 도시에 진입하는 첫장부터 도시에 정착하는 마지막 장까지, 차이나 미에빌은 쉬지 않고 꾸준히 더러운 쓰레기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는 작가의 개인적인 취향들 중 하나일 겁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역겹고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묘사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데뷔작 <쥐의 왕>은 제목처럼 아주 추잡스럽고 더러운 하수구를 선사합니다. 우리는 이를 역겨움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차이나 미에빌은 쌍수를 들고 역겨움의 미학을 환영해요. 하지만 이런 역겨운 장면들에 오직 미학적인 가치만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산업 폐기물은 19세기 유럽에서 파생한 사회 문제입니다. 19세기 유럽은 산업 혁명을 발전시킨 무대였습니다.


그런 산업 자본주의는 절대 눈부신 진보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19세기 유럽 기록물들을 살펴본다면, 산업 폐기물들을 지적하는 수많은 글들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자본론> 같은 책은 어떻게 산업 자본주의가 더러운 폐기물들을 버리고 도시 환경과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는지 가열차게 고발합니다. 재활용이나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절대 21세기 개념이 아닙니다. 21세기 사람들과 방식은 달랐으나, 이미 19세기 사람들 역시 환경 오염을 고발했고 재활용과 지속 가능성 개념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차이나 미에빌은 그런 추악한 19세기 환경 오염을 반영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읽는 동안 독자는 온갖 역겨운 쓰레기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절대 낭만적이고 신나는 판타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두 눈을 돌린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여전히 환경 오염을 직시해야 할 겁니다. 기후 변화 같은 환경 오염은 행성적인 수준으로 확장했습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적인 환경 재앙입니다. 독자들이 외면하고 싶다고 해도, 지구 그 자체를 외면하지 못하겠죠. 뉴크로부존을 오염시키는 산업 폐기물들과 기후 변화는 서로 다르지 않은 문제입니다. 양쪽 모두 똑같은 원인에서 파생합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역겨운 폐기물들을 양산한 것처럼, 20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불렀습니다. 자연 환경이 파괴되는 이유는 그저 사람들이 탐욕스럽거나 몇몇 기업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사회 구조 때문이죠.


이는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유일무이한 원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숱한 환경 오염들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산업 폐기물들과 기후 변화 같은 현대적인 환경 오염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합니다. 비록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이나,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그런 지저분한 환경 오염과 자본주의를 경고합니다. 뉴크로부존의 산업 폐기물들이 숱한 유사 인간 종족들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현대 인류 문명에서 기후 변화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초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를 비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에 둘러싸입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옳다고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대기업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는지 우리는 절대 고민하지 않습니다. 일개 개인은 거대한 사회 구조에 함부로 저항하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쉽게 비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거시적이고 심각한 폭력 대신 작고 사소한 폭력에 화를 냅니다.


남한 사회에서 메갈리아나 워마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장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메갈리아에게 게거품을 물고 그들이 폭력적이라고 힐난합니다. 하지만 메갈리아가 그렇게 심각한 폭력일까요? 물론 메갈리아는 폭력적인 집단이죠.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메갈리아는 분명히 폭력적인 집단이에요. 하지만 착취적인 자본주의 현실 앞에서 고작 메갈리아가 심각한 폭력인가요? 메갈리아가 엄청난 산업 폐기물들을 쏟았나요? 메갈리아가 몇 백 만 명을 학살했나요? 메갈리아가 생물 다양성을 몇 십 % 감소시켰나요? 메갈리아가 죽음의 바다(저산소 바다)를 늘렸나요?



왜 사람들이 메갈리아에게 게거품을 물고 그렇게 비난할까요? 메갈리아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 지구 행성에는 메갈리아보다 훨씬 거대하고 훨씬 심각하고 훨씬 위험한 폭력이 존재합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기후 변화는 행성적인 위험이고, 행성적인 범죄이고, 행성적인 폭력입니다. 네, 이건 행성 단위로 올라가는 위험이고 범죄이고 폭력입니다. 자본주의 기득권이 신나게 산업 폐기물들을 쏟아부을 때, 인류의 절반 가량은 불지옥을 방황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는 단순한 환경 오염이 아니라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메갈리아에게 게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정말 그들이 거대하고 심각한 폭력을 비판하나요?


글쎄요, 저는 꽤나 회의적입니다. 그들이 메갈리아를 힐난하는 이유는 폭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폭력을 비판하고 싶다면, 그들이 자본주의를 입도 뻥긋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죠. 그들이 메갈리아를 힐난하는 이유는 그저 주류적인 관념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 국가 이데올로기, 대의 제도, 가부장 제도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메갈리아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그런 폭력은 억압적인 가부장 제도에서 파생한 부산물입니다. 우리는 부산물이 아니라 근본적인 억압을 비판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근본적인 억압을 비판하고 싶다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어마어마한 착취를 간과하지 못하겠죠.



이 세상에는, 이 행성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에는 정말 거대하고 정말 심각한 폭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정말 폭력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런 폭력을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추악하고 역겹고 더러운 산업 폐기물들을 늘어놓습니다. 이 소설은 그런 지저분하고 거대한 폭력이 존재한다고 고발합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더없이 밀착합니다. 아니, 이런 소설은 그 어떤 소설들보다 훨씬 현실적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차이나 미에빌은 역겨운 스팀펑크 도시를 이용해 미학적인 가치와 사회 문제를 함께 고찰합니다. 돌 하나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창작 방법은 이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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