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겨울뿐인 미래>, 기후 변화는 그저 겨울 모험일 뿐 본문
소설 <겨울뿐인 미래>는 겨울 세상에서 살아남는 생존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비열하게 싸우고, 소설 주인공은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기후 변화를 불렀고, 기후 변화는 지구를 꽁꽁 얼립니다. 행성적인 재난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야만적인 상태에 돌입합니다. <겨울뿐인 미래>는 성장 소설이고, 그래서 야만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만약 <겨울뿐인 미래>가 <풀의 죽음> 같은 상황들을 연이어 늘어놓는다면, (성장 소설을 읽는) 아이들은 충격에 빠질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성장 소설이 무조건 유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종종 성장 소설은 성인 소설보다 훨씬 충격적이거나 본질적인 사유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성장 소설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할 겁니다.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같은 소설은 끔찍한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묘사하나, <겨울뿐인 미래>는 그런 종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성장 소설들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낯선 소재가 아닐 겁니다. SF 세상에는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성장 소설들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성장 소설 작가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매력적인 소재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자체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매력적인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문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은 우리를 규정하는 가장 거대하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만약 갑자기 이런 문명이 붕괴한다면? 만약 갑자기 이런 문명이 사라진다면? 만약 우리가 더 이상 문명인이 아니라면? 이런 물음들은 꽤나 흥미롭습니다. 이런 물음들은 우리 자신을 벌거벗기고, 우리가 누구인지 근본적으로 들여다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우리가 누구이고, 사회가 무엇이고, 문명이 정말 문명적인지 묻습니다.
만약 어떤 SF 작가나 독자나 평론가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가장 뛰어난 SF 장르라고 꼽는다고 해도, 저는 거기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숱한 사람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사랑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영원히 SF 울타리 안에 머물 겁니다.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성장 소설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까요? 성장 소설에서 소설 주인공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돌봐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아이들은 보호자를 잃을 겁니다. 가혹한 세상에서 보호자 없이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는 정말 눈물 겨운 성장이겠죠.
소설 작가들에게 고아는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나 <위대한 유산> 같은 사회 소설부터 <해리 포터> 같은 도심 판타지 소설까지, 고아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돌봐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보호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중대한 위험에 빠질 테고, 작가는 심각한 갈등 관계를 조성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소설 작가들이 고아에 주목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고아들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정말 엄청난 고아들이 나타날 겁니다.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고아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면? 아니, 올리버 트위스트는 죽 한 그릇을 달라고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죽 한 그릇을 위해 아이들조차 비열하게 싸울지 모릅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는 가혹한 시련에 직면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고아는 훨씬 가혹한 시련을 거쳐야 할 겁니다. 그런 시련은 고아를 매섭게 채찍질할 테고, 고아는 장엄한 성장 과정을 거쳐야 할 겁니다.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성장 소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 소설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성장 소설이 머물러야 할까요? 성장 소설이 오직 참담한 재난을 이용만 해야 할까요? 만약 성장 소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한다면, 그 소설은 현대 문명이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왜 어른들의 세계가 잘못되었는지 배워야 합니다. 미래 세대로서 아이들은 잘못된 과거를 배우고 거대한 과오 없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행성적인 재난이 닥치고, 왜 인류 문명이 무너지고, 왜 사람들이 아비규환에 빠지는지, 성장 소설은 물어볼 수 있을 겁니다. <겨울뿐인 미래>가 그런 것들을 물어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겨울뿐인 미래>는 그저 혹한 모험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고, 왜 행성적인 재난이 몰려왔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는 오직 모험을 제공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겨울뿐인 미래>는 기후 변화를 이용해 현대 문명을 비판하지 않아요. 소설 속에서 어떤 할아버지는 소설 주인공에게 항공기나 자동차 산업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나오지 않습니다. <겨울뿐인 미래>는 왜 현대 문명이 잘못 되었는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장 소설 작가에게 현대 문명을 비판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SF 울타리 안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성장 소설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겨울뿐인 미래>가 그런 소설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 소설 표지에 쓰인 홍보 문구는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홍보 문구는 <설국열차>와 <투모로우>를 잇는 종말 문학 운운합니다. 왜 소설의 홍보 문구가 영화를 가리키나요? <설국열차>가 소설인까요? <투모로우>가 소설인까요? 홍보 담당자는 겨울 아포칼립스를 가리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남한 출판사가 해외 홍보 문구를 잘못 번역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얼어붙었다고 해도, 왜 구태여 SF 소설이 SF 영화인 <설국열차>와 <투모로우>를 강조하는지…. SF 울타리 안에는 <설국열차>와 <투모로우>보다 훨씬 뛰어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