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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타임 머신>의 엘로이들과 개돼지들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타임 머신>의 엘로이들과 개돼지들

OneTiger 2018. 8. 15. 18:35

※ 이 게시글은 소설 <타임 머신>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을 포함합니다. 사실 이게 아주 유명한 설정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내용 누설이 아닐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저는 내용 누설을 경고하고 싶습니다.



소설 <타임 머신>은 일반적인 시간 여행 이야기들과 많이 다릅니다. <타임 머신>은 시간 여행 이야기보다 미래의 묵시적인 문명을 체험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는 시간선을 꼬거나 역사를 바꾸거나 역사적인 사건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오직 미래 문명을 체험하고 어떻게 미래 생태계가 바뀌었는지 목격할 뿐입니다. 미래로 떠나기 전에, 시간 여행자는 미래 문명이 아주 찬란할 거라고 여겼습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시간 여행자는 미래 문명이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보다 훨씬 찬란한 업적을 이룩할 거라고 예상했죠.


하지만 그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미래 문명은 스러지는 중이었고, 미래 사람들(엘로이들)은 각종 지식들을 잃었습니다. 저는 퇴행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으나, 시간 여행자는 엘로이들이 퇴행했다고 여길지 모르죠. 무엇보다 가장 경악스러운 상황은 인류가 두 종류로 나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하 몰록들은 유사 인간 괴물이 아니라 또 다른 인류죠. 그런 몰록들은 엘로이들을 잡아먹고요. 사실 엘로이들은 몰록들의 가축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 문학 비평가들은 <타임 머신>이 자본주의 계급 갈등을 풍자한다고 해석합니다.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화사하게 살아갔습니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우중충하게 살아갔죠.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 계급이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피지배 계급이었습니다. 미래 문명에서 여전히 부르주아 계급(엘로이들)은 화사하게 살아가고, 프롤레타리아 계급(몰록들)은 우중충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지배 관계는 바뀌었습니다.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프롤레타리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으나, 미래 문명에서 몰록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축은 엘로이들입니다. 엘로이들은 몰록들의 가축입니다. 몰록들은 엘로이들을 키우고 잡아먹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생산을 몰록들이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이라 계급, 노동자 계급은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현대 문명과 계급 관계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지배 계급은 온갖 세뇌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하지만 미래 문명에서 계급 관계는 뒤집어졌고,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가축들이 아닙니다. 가축은 엘로이들입니다. 엘로이들은 몰록들에게 소나 돼지, 닭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은 이른바 개돼지 비하와 유사합니다. 한때 국내에서는 개돼지라는 표현이 유행했습니다. 남한 민중들은 스스로 개돼지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반어와 해학이 뒤섞인 표현이었죠. 그건 무산자 민중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는 표현이었죠. 하지만 <타임 머신>은 정말 피지배 계급이 개돼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돼지는 가축입니다. 개돼지는 인간이 부려먹거나 잡아먹는 가축입니다. 몰록들은 엘로이들을 부려먹지 않습니다. 몰록들이 엘로이들을 부려먹고 싶다면, 몰록들은 엘로이들에게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지만 엘로이들 중 몇몇은 억압적인 구조를 깨달을지 모르고, 그들은 저항을 주도할지 모릅니다.


결국 몰록들과 엘로이들은 전쟁을 벌일지 모르고, 엘로이들은 독립할지 모릅니다. 몰록들은 그런 상황을 피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몰록들은 노예들을 가르치는 수고를 원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엘로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가축입니다. 하지만 노예와 가축 모두 비참한 신세입니다. 노예와 가축 모두 주인이 시키는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당나귀와 노새 이야기처럼, 노예와 가축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 노비는 힘들게 일하는 농장 소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 민중 계급은 노예 및 가축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임금 노예 제도이고, 노동자들은 임금 노예입니다. 자본가 계급에 동조하는 정치인들은 국민이 가축이라고 생각합니다. 농민이 돼지들을 새끼 치는 것처럼, 정치인들은 피지배 계급 암컷들이 계속 새끼들을 치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가임 여자들이 얼마나 많이 분포하는지 조사하죠. 피지배 계급 여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새끼를 치는 가축 암컷입니다.


어쩌면 <타임 머신>에서 몰록들은 엘로이 여자들이 새끼를 치는 가축 암컷이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19세기 유럽 사람 허버트 웰즈는 21세기 남한 사회에서 개돼지라는 표현이 유행할지 몰랐을 겁니다. 허버트 웰즈가 무슨 방법으로 미래를 예언하겠어요. 하지만 19세기 유럽 사회와 21세기 남한 사회는 똑같이 자본주의라는 억압적인 사회이고, 그래서 무서우리만치 <타임 머신>은 21세기 남한 사회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비단 자본주의 사회만 아니라 억압적인 수직 계급 사회는 모두 이런 비유에 들어맞을 겁니다. 피지배 계급이 한껏 저항할 수 있는 사회 이외에 다른 사회들은 모두 이런 비유에 해당하겠죠.



피지배 계급은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지배 계급은 최대한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양쪽 모두에서 피지배 계급은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참여 민주주의나 완전한 기본 소득은 최소한의 저항 수단일지 모릅니다. 투표 권리나 복지 제도 따위는 최소조차 충족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사회 구조가 참여 민주주의와 완전한 기본 소득을 보장할 때, 그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은 가축 및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타임 머신>은 미래를 예언하는 소설이 아니나, 이런 점을 무섭게 꼬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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