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은 출구 없는 미궁을 방황한다 본문
[이런 디스토피아는 현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출구가 있을까요.]
소설 <강철 군화>와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는 모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와 달리, <강철 군화>는 미래 사회가 디스토피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강철 군화>가 다루는 디스토피아는 꽤나 현대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강철 군화>를 SF 디스토피아 목록에서 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미래 시점을 상정하고,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다들 <강철 군화>를 SF 디스토피아 목록에 끼워넣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철 군화>와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가 드러내는 차이는 비단 이것만이 아닐 겁니다. 사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숱합니다. 예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 <피에 담긴 것> 같은 인터넷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피에 담긴 것>은 <스타크래프트>에서 파생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테란과 프로토스가 싸우는 전쟁이나 우주 함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피에 담긴 것>은 어떤 외계 행성의 우주 항구를 보여주고, 전형적인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를 변주합니다.
<피에 담긴 것>을 읽은 이후, 독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성한 폭력을 한 번쯤 고민할 겁니다. <피에 담긴 것>은 진부한 주제와 진부한 내용을 담은 진부한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정도 멋진 기교를 선보이고, 괜찮은 결과를 보장합니다. 양극화가 조성한 뒷골목 세계를 읽은 이후, 독자는 고민에 빠질 수 있을 겁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 역시 독자에게 그런 감성을 전달하겠죠. 훌륭한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독자를 그런 고민으로 유도합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출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민은 그저 세상이 나쁘다고 말할 뿐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심각하게 고민한다고 해도, 고민은 그저 고민으로서 끝납니다. 출구와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고민에서 빨리 벗어나고, 더 이상 문제를 붙들지 못합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에게는 그런 한계가 있습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을 읽은 이후, 독자들은 다양한 감상문들을 남깁니다. 그런 감상문들은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고민하나, 대안이나 출구를 모색하지 않습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일종의 모순입니다. 그것들은 출구가 없는 미궁을 상정합니다. 다들 미궁을 방황하나, 아무도 빠져나가기 위한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작가들 역시 출구를 알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숱한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얄팍한 고민들을 반복합니다.
<강철 군화>는 다릅니다. <강철 군화>는 확실한 해답(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깔아놓고,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강철 군화>에서 여러 디스토피아 양상들은 해답으로 가기 위한 전제입니다. 그래서 결국 <강철 군화>는 유토피아에 다다릅니다. 디스토피아 분위기가 꽤나 짙고, 소설의 주된 부분들은 디스토피아임에도, 결국 <강철 군화>는 유토피아를 이야기하죠. 종종 저는 이런 SF 소설이 절실하다고 느낍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생태 사회주의 혁명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틀렸을지 모릅니다. 생태 사회주의 혁명은 대안이 아닐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SF 소설이 대안이나 출구를 제시하는 상황입니다. SF 소설이 대안이나 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다들 갑갑한 미궁을 계속 헤맬 테고, 결국 다들 체념할 겁니다. 다들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겠죠. 다들 사람들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할 테고, 기득권에게 충성하겠죠. 과거에 막심 고리키가 비판적인 리얼리즘을 이야기했을 때, 고리키는 비슷한 반박들에 부딪혔을 겁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그저 막막한 미궁만 강조할 뿐이고, 출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미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출구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는 우리가 대안을 고민하기 전에 먼저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슬라보예 지젝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해도 출구와 대안은 중요합니다.
낭만적인 출구는 위험할 겁니다. 저는 낭만적인 출구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출구 없는 미궁처럼 낭만적인 출구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적인 출구는 헛된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헛된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좌파 소아병 운운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히 출구가 필요합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이 계속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면, 그건 체념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기득권의 앞잡이가 될지 모르죠. 현대 사회에서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작품들은 지배적인 관념이 옳다고 계속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SF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그런 세뇌를 부채질할 수 있습니다.
SF 장르로서 디스토피아 소설은 암울한 현실을 몇 배 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암울한 상상력은 독자들을 더욱 체념으로 몰아붙일지 모릅니다. 그때 SF 디스토피아 소설은 권력의 앞잡이가 될 겁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디스토피아 소설은 권력의 앞잡이가 될 겁니다. 따라서 저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SF 작가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SF 작가들은 현실을 더욱 자세하게 분석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파고들어야 할 겁니다. SF 작가들은 더 이상 권력의 앞잡이가 될 수 있는 소설들을 양산해서는 안 될 겁니다. 아쉽게도 그런 소설들은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불러옴에도, 기후 변화가 아주 심각한 위협이 되었음에도, 출구를 제시하는 소설들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해외 출판계에는 그런 소설들이 많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남한은 어떨까요? 남한의 SF 및 판타지 작가들이 출구와 대안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한의 SF 및 판타지 작가들이 출구와 대안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많이 안타깝습니다. 재앙이 코 앞으로 몰려온다고 해도, 다들 출구 없는 미궁을 방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