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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타임십>이 묘사하는 기술적 유토피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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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십>이 묘사하는 기술적 유토피아

OneTiger 2018. 3. 16. 19:55

※ 소설 <타임십>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스티븐 백스터가 쓴 <타임십>은 허버트 웰즈가 쓴 <타임 머신>의 속편입니다. 서로 다른 작가가 썼기 때문에 <타임십>은 <타임 머신>을 이어가는 동시에 다른 갈래들로 뻗어나갑니다. <타임 머신>에서 시간 여행자는 미래에 도착하고 엘로이들을 만났을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훨씬 먼 미래로 날아가나, 시간 여행자는 주로 엘로이들과 어울렸죠. 엘로이들은 쇠락한 문명을 간신히 유지하는 중이었고, 덕분에 시간 여행자는 첨단 도시 따위를 절대 구경하지 못합니다. 거시적이고 진화적인 관점에서 허버트 웰즈는 아무리 찬란하게 보이는 인류 문명 역시 쇠락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웰즈는 첨단 미래 사회를 보여주지 않았고, 쇠락한 문명을 보여줬죠. 하지만 스티븐 백스터는 보다 긍정적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스티븐 백스터는 다양한 미래 문명들을 보여주고 서로 비교합니다. 어떤 문명은 모순적인 전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어떤 문명은 유토피아 사회를 이룩합니다. 게다가 몰록들 역시 유토피아 사회를 이룩했습니다. <타임 머신>에서 몰록들은 똑똑하나 동족을 잡아먹고 시간 여행자를 공격하는 악당 무리였어요. <타임십>은 완전히 다릅니다.



초반부부터 <타임십>은 몰록들의 어마어마한 사회를 보여주고, 자신이 <타임 머신>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언뜻 몰록들의 사회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 같습니다. 여기에는 화폐가 없고, 시장 경제가 없고, 자본가나 대지주가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모두 막대한 토지와 재화를 소유합니다. 국가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신이 원하는 노동에 종사합니다. 심지어 육체적 노동에 종사하는 몰록은 없는 듯해요. 몰록 사회에서 모든 몰록은 학자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명과 자연을 연구하고, 우주의 진리를 파헤칩니다. 몰록들은 마음대로 행성들과 항성을 개조하고, 에너지를 뽑아냅니다. 몰록들이 생물 다양성을 지킬까요. 글쎄요, <타임십>에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몰록들이 생물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몰록들 중 아무도 환경 오염으로 고통을 받지 않고, 매연이나 토양 침식이나 기후 변화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 정부나 자본가나 대지주가 없기 때문에 어떤 몰록도 다른 몰록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어떤 전쟁이나 범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저는 약간 의문이 들었습니다. <타임십>의 몰록들처럼 인류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한다면, 인류는 범죄를 근절할 수 있을까요. 그럴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모두 막대한 재화를 소유하고, 아무도 굶주리거나 가난하지 않다면, 당연히 돈을 노리는 범죄는 사라지겠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물질과 함께 정신적인 만족감을 차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명예, 사랑, 권력을 갈구합니다. 그것들은 물질적인 것에서 비롯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하죠.


누군가가 명예를 얻고 싶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뭔가를 잘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권력을 얻고 싶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 관계들은 범죄를 부를지 모릅니다. <에코토피아 뉴스>나 <붉은 별> 같은 사회주의 소설들은 유토피아 역시 얼마든지 범죄에 휩싸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아마 숱한 생계형 범죄들은 사라지겠으나, 여전히 정신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범죄는 존재할지 모릅니다.



한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소설은 그저 물질적인 충족이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인류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하고 싶다면, 새로운 사회 구조와 새로운 과학 기술과 새로운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물질적인 부가 늘어난다고 해도,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오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인간을 만들고 싶다면, 교육과 문화를 혁신해야 합니다. 현실 속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명예와 경쟁과 권력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죽이고 짓밟고 수탈하죠.


만약 교육이 대대적으로 바뀐다면? 교육이 공유와 연대와 협동을 가르친다면? 그때 아이들은 새로운 인간이 될 테고, 그런 새로운 인간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면, 범죄가 없는 공산주의 유토피아 역시 찾아올지 모르죠. 아마 그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일 겁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공산주의자들 역시 위험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유토피아 소설조차 범죄를 완전히 근절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어요. 저는 몰록들의 공산주의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계적인 범죄들은 사라지겠으나, 명예 욕구와 권력 욕구, 애정 욕구는 사라지지 않겠죠.



어쩌면 그런 범죄들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우리 인류가 정신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상상이고, 저는 정신적인 공동체를 쉽게 논의하지 못하겠어요. <블러드 뮤직>이나 <유년기의 끝>, <인간을 넘어서> 역시 정신적인 공동체를 흐릿하게 보여줄 뿐이죠. 최신 하드 SF 소설들은 좀 더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신 하드 SF 소설들 역시 정신적인 공동체를 뚜렷하게 그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임십> 역시 정신적인 공동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몰록들은 엄청난 업적들을 달성했으나,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따라서 몰록들의 사회에는 여러 범죄들이 존재할 겁니다. 누군가는 몰록과 인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할지 모르겠군요. 몰록과 인간은 생리적으로 서로 다르고, 그래서 심리 상태가 다를 테고, 따라서 몰록은 명예나 권력, 사랑을 추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몰록은 인간과 아주 유사합니다. 사실 몰록은 인간의 후예입니다. <타임십>에서 시간 여행자와 몰록 교사는 함께 여행하죠. 시간 여행자는 조상이고, 몰록 교사는 후손이에요. 조상과 후손이 함께 여행한다는 뜻이죠. 마치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에서 조상과 후손이 함께 유토피아를 둘러보는 것처럼.



저는 몰록의 심리 상태가 인간과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몰록들의 사회에 범죄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백스터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범죄를 근절할 거라고 묘사했으나, 저는 그런 묘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어떨까요. 스티븐 백스터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전쟁을 근절할 수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영구적인 토지와 재화가 무조건 전쟁을 막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타임십>에서 시간 여행자가 미래에 도착했을 때, 몰록 교사는 시간 여행자에게 다른 종족들을 보여줍니다. 막대한 토지와 재화가 있음에도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고 서로 싸웠어요.


몰록 교사는 그 광경을 보고, 왜 그들이 어리석게 전쟁을 일으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탄하죠. 전쟁이 발발하는 이유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강한 상황에서 인류는 전쟁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전쟁은 국가 정부라는 지배 계급이 국민이라는 피지배 계급을 전장으로 몰고 가는 사태입니다. 특히, 현대적인 전쟁은 더욱 그렇습니다. 현대적인 전쟁에서 대부분 지배 계급은 전장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전장에서 죽는 대부분 사람들은 피지배 계급입니다.



따라서 국가 이데올로기가 약해진다면, 국가 정부라는 지배 계급이 약해진다면, 더 이상 거대한 전쟁은 발발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소규모 국지전은 존재할지 모르나, 거대한 전쟁은 터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몰록들이 서로 싸우지 않는 이유는 몰록들의 사회에 국가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르죠. 몰록들의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보여준 이후, 사실 <타임십>은 곧바로 유럽 전쟁을 보여줍니다. 이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2차 대전이 아닙니다. 보행 전차들이 포탄들을 쾅쾅 날리는, 스팀펑크 향취가 가득한, 평행 세계의 전쟁입니다.


시간 여행 소설로서 <타임십>은 평행 세계들을 넘나들고, 보행 전차 같은 새로운 전투 병기를 선사합니다. 스티븐 백스터가 이런 보행 전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SF 세상에서 보행 전차는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전투 병기이고, 그래서 스티븐 백스터 역시 이런 전투 병기를 집어넣은 것 같군요. 저는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 아니라 <타임십> 같은 하드 SF 소설에서 보행 전차를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리온 전선에서>처럼 스티븐 백스터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밀리터리 SF에 일가견이 있죠.)



유럽 전쟁 대목에서 <타임십>은 강력한 국가 이데올로기를 보여줍니다. 물론 스티븐 백스터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스티븐 백스터는 무엇이 전쟁을 일으키는지 자세히 분석하지 않고, 그저 전쟁이 비극이라고 되풀이할 뿐입니다. 현대적인 전쟁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입니다. 국가 정부는 권력을 움켜쥐기 원하고, 그걸 위해 막대한 재화가 필요합니다. 대기업들은 막대한 재화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를 확장하고 싶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복지 국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지 국가들 역시 자유 무역에 찬성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여자들을 억누르고, 자연 환경을 오염시킵니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쟁은 우리가 피하지 못하는 모순이 됩니다. 비극이기에 앞서 전쟁은 모순입니다. 우리가 끝낼 수 있으나, 끝내지 않는 모순이죠. 국가가 우리에게 노예가 되라고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뇌를 받아들이고요. 자발적으로 국가를 선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가 열리면, 다들 국가를 응원하죠. 자발적으로 국가를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스티븐 백스터는 이런 과정을 분석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티븐 백스터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보여줬으나, 좌파적인 시각은 꽤나 희미합니다. 몰록들의 사회는 기술적 유토피아입니다. 전통적인 공산주의자들이나 이안 뱅크스나 켄 맥레오드가 그리는 이상적인 문명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에코토피아 뉴스>나 <아이슬란디아>나 <빼앗긴 자들>과 대비되는 유토피아죠. 기술적 유토피아에서 좌파적인 사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학 기술이 충분히 발달한다면, 물질적인 재화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면, 그것들은 새로운 사회 구조와 새로운 인간을 뒷받침할 겁니다. 이는 보수 우파 역시 동의하는 유토피아입니다. 지배 계급을 타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지배 계급이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타파하지 않아도, 물질적인 부는 피지배 계급을 지배 계급으로 끌어올릴 테고, 결국 모두 부자가 되겠죠. 계급 투쟁이 없는 유토피아. 지배 계급을 공격하지 않는 유토피아. 보수 우파는 그런 유토피아에 동의할 겁니다. 그런 시대가 올까요. 인류가 개조 생명체들을 만들고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면, 그런 기술적 유토피아에 도달할까요. 생산 양식이 바뀐다면, 분명히 사회 구조도 바뀔 겁니다. 하지만 그 사회 구조가 무조건 기술적 유토피아일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기술적 유토피아가 목적이 된다면, 거기로 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할지 모릅니다. 기술적 유토피아는 첨단 과학 기술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특히, 지배 계급은 과학 기술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빈민들을 착취하고 자연 환경을 수탈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지배 계급은 나중에 생산량이 늘어났을 때 모두가 풍족하게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할지 모릅니다. 그런 이유로 착취와 오염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기술적 유토피아에 이른다고 해도, 과거의 잘못들을 반성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술적 유토피아에 이르고 계급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온갖 차별들과 착취들과 오염들을 반성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비해 21세기 사람들은 엄청나게 풍족한 생산량을 누립니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이 제국주의와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을 반성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유럽 국가들이 세련되고 고상한 문명이라고 빨아줍니다. 여전히 우리는 국가에 복종하고 침략 전쟁들을 미화합니다.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용감한 탐험가이고, 아메리카 부족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개인들에 불과하죠.



여전히 여자들은 성 폭행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조금 저항할 때,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남자들은 게거품을 물고 난리법석을 부립니다. 우리는 영웅 신화를 바라고, 현명한 왕이나 아름다운 공주를 숭배합니다. 군주가 노비를 부리고 여자를 차별하고 계급을 구별했음에도, 우리는 똑똑한 왕이나 인자한 왕 같은 미사여구를 열심히 덧붙입니다. 아름다운 공주는 선망의 대상이고, 우리는 자꾸 그런 것을 여자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낚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피를 흘리는 동물을 보고 즐거워하죠. 물고기의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철철 흘러도, 다들 웃고 떠들어요.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21세기 사람들은 풍족한 부를 누리나, 이런 것들을 반성하지 않고 임금 노예와 성 노예와 종 차별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생산력과 사상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까요. 저는 기술적 유토피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켄 맥레오드가 상상하는 유토피아, 이안 뱅크스가 상상하는 유토피아, 조 홀드먼이 상상하는 유토피아…. 네, 좋아요.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생산력은 사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생산력과 함께 새로운 인간상을 요구할 겁니다.



어쩌면 인류가 인류라는 종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정말 뭔가를 이룩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쩌면 기술적 유토피아가 더욱 발달했을 때, 정신적인 공동체가 나타날지 모르죠. 기술적 특이점이나 개조 미생물들은 정신적인 공동체를 뒷받침하는 기술일지 모르죠. 저는 나노 기술 문명보다 개조 미생물 문명(?)에 희망을 거는 편입니다. 생물적인 그레이 구라고 부를 수 있겠죠. 저는 기술적 특이점보다 생체 공학이 더 급진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리보펑크> 같은 책과 달리 저에게는 특별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저 저는 생명의 역사가 기계의 역사보다 오래 되었기 때문에 생체 개조가 기술적 특이점보다 더 급진적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당장 기술적 유토피아만 논의하기에도 벅차군요. <타임십>은 인상적인 소설이고, 인상적인 (기술적)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보여줬습니다. 언젠가 인류가 그런 시대에 도달한다면, 정말 바랄 게 없겠어요. 하지만 스티븐 백스터는 기술적 유토피아에 너무 의지하는 것 같고, 그래서 저는 약간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빼앗긴 자들> 같은 소설들이 중요하겠어요. 이런 소설들은 <타임십>의 몰록 사회를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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