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치즈인더트랩>과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들 본문
<뉴로맨서>나 <불사 판매 주식 회사>, <세상 밑 터널>, <쿼런틴>, <스노크래시> 같은 소설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들 자본주의를 극단적으로 상상한 소설들이죠. 수많은 소설들에서 SF 작가들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거대해진 세계를 상상하곤 합니다. 아마 그렇게 자본주의가 현대 문명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체계이기 때문일 겁니다. 자본주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조차 자본주의가 현대 문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겁니다. 어마어마한 대기업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사람들의 명줄을 움켜쥐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대기업들에게 매달려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세상 만물은 돈으로 치환되고, 모든 것은 돈, 돈, 돈으로 흘러갑니다. 사람 목숨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회사들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상품이 되지 않는 것들은 사라집니다. 다들 경제 성장에 매달리고, 대기업들은 경제 성장을 이끄는 주역입니다. 누구도 경제 성장을 부정하지 않고, 경제 성장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경제 성장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 대기업들이 무엇을 하든, 그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대략 이런 모습일 겁니다. 이는 자본주의를 정확하게 분석한 모습이 아니나, 얼마나 자본주의가 비인간적인지 표현할 수 있겠죠. 대기업은 신과 같고, 모든 것은 돈이 되고, 사람들은 대기업과 돈에 매달려야 하고, 경제 성장은 불문율이죠. SF 작가들은 이런 공식에 거대한 상상력을 덧붙이고, 암울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립니다. 대기업은 세계를 통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로잡습니다. 이제 대기업은 더 이상 영리 기업이 아니라 세계를 통치하는 독재자가 됩니다.
대기업은 첨단 도시를 짓고, 첨단 도시는 쭉쭉 뻗은 마천루들을 자랑합니다. 대기업들은 상당한 수익을 올리나, 대부분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가고 온갖 위험한 범죄들을 저질러야 합니다. 양극화는 하늘과 땅, 아니, 우주와 땅과 같습니다. 빈민에게 대기업 총수는 저기 머나먼 외계 행성과 같습니다. 부자들은 온갖 첨단 기술들을 이용하고, 심지어 빈민에게서 육체나 목숨이나 영혼을 빼앗습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나 <얼터드 카본>에서 부자들은 문자 그대로 육체나 영혼을 빼앗아요. 돈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반영구적인 삶을 누립니다.
때때로 이런 모습은 아름답고 장대한 영상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천루들과 요란한 광고들, 빈민들과 세계화를 이용해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는 인상적인 장면들을 연출했습니다. <새틀라이트 레인> 같은 비디오 게임은 <블레이드 러너>를 고스란히 모방했고, 얼마나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아름다운 동시에 비참할 수 있는지 강조해요. 비밀 요원들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고, 수많은 광고판들을 목격합니다. 이런 거대 광고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비롯한 특성이죠. <세상 밑 터널>이나 <쿼런틴>은 어떻게 거대 광고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단편 소설에서 필립 딕은 정말 끈질기고 짜증나는 광고 로봇을 묘사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필립 딕이 광고 로봇을 그리지 않았겠죠. 게임 플레이어들을 위험으로 몰아넣기 위해 <섀도우런> 같은 테이블 롤플레잉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선택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폭력적이고, 수많은 범죄들을 양산합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짜릿한 모험을 원하는 게임 플레이어는 신나는 액션을 펼칠 수 있겠죠. 돈을 노리는 더럽고 비열한 대기업들, 위험천만한 범죄 조직들, 먹고 살기 힘든 빈민들,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 이런 요소들이 뒤섞일 때, 게임 플레이어는 화끈한 총격전을 펼칠 수 있겠죠.
사실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디스토피아 작가들은 매우 심심했을 겁니다. 디스토피아 작가들은 독재 세상을 그리고, 독재 세상 역시 자주 쓰이는 디스토피아 소재입니다. 거대한 독재 정부가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유를 빼앗는 모습은 별로 드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독재 디스토피아는 별로 화려하거나 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흥청망청 생산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꽤나 요란하고 번쩍거리고 풍성합니다. 왜 왕년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자본주의를 칭찬했겠어요. 자본주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고,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그런 놀라운 업적을 열심히 밀어붙이고, 극단적으로 암울한 도시에서 화려한 세상을 그립니다. 독재 디스토피아는 그렇게 하지 못해요. 모든 것이 억압적이기 때문에 요란하고 번쩍거리고 풍성한 재미가 없어요. <우리들>이나 <1984> 같은 소설은 디스토피아의 대표 주자이나, <불사 판매 주식 회사>나 <쿼런틴>이나 <우주 상인>이 그리는 미래보다 별로 재미있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디스토피아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쓸 겁니다. 독재 디스토피아? 그건 너무 밋밋하고 구질구질합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많은 인기를 끄는 장르이고, 덕분에 SF 세상과 자본주의는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자본주의가 SF 세상과 멀어진다면, SF 창작가들은 꽤나 섭섭하다고 느낄 겁니다. 살인적인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쭉쭉 뻗은 마천루들과 화려한 거대 광고. 세상을 통치하는 대기업들. 먹고 살기 위해 변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 폭력배들. 대기업들이 조작하는 살상 로봇들과 사이버 스페이스들과 개조 생명체들. 이런 것들은 SF 세상을 풍성하게 꾸미는 요소들입니다. 자본주의가 SF 세상을 떠난다면, 이런 것들 역시 존재하지 못합니다. 디스토피아 창작가들은 자본주의에게 떠나지 말라고 매달릴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얼마나 많은 디스토피아 창작가들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거나 비판할까요. 자본주의를 신나게 묘사하는 것처럼 SF 창작가들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거나 비판할까요. 아쉽게도 SF 작가들은 그저 자본주의를 열심히 떠들 뿐이고, 제대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그저 황금 만능주의가 나쁘다고 말할 뿐입니다. 사실 황금 만능주의는 자본주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돈보다 생산 수단입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은 생산 수단을 외면하고, 자본주의를 돈과 연결합니다.
SF 소설가들, 영화 감독들, 게임 제작진들은 열심히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립니다. 그런 노력과 달리, 그들은 자본주의를 아주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예언가처럼 SF 소설가들, 영화 감독들, 게임 제작진들은 미래 문명이 암울하다고 주장하나, 그들은 왜 미래 문명이 암울하게 바뀌는지 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자본주의를 피상적으로 미래 사회에 투영할 뿐입니다. 그런 노력은 가공할 세계를 만들었으나, 거기에 정확한 분석은 끼어들지 못합니다. SF 작가들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거나 분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설사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헤게모니를 쉽게 깨뜨리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쓰는 소설가조차 자본주의 헤게모니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저 겉표면만 핥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피상적인 디스토피아 창작물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설가와 영화 감독과 게임 제작진은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자본주의를 자세히 분석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석이 아니라 묘사입니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그게 재미있다면, 그들의 역할은 끝납니다. 세상을 해석하고 바꾸는 역할은 철학자가 맡아야죠.
잠시 시선을 돌려보죠. SF 세상은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묘사합니다. 다른 주류 문학이나 다른 장르들은 어떨까요. SF 이외에 다른 주류 문학이나 다른 장르들이 자본주의를 이용할까요? 어떻게? 사실 자본주의가 현대 문명을 강렬하게 장악했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수많은 창작가들은 자본주의를 그려야 합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처럼 때때로 어떤 장르는 자본주의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 있습니다.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은 노동 계급을 옹호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존 스타인벡은 공산당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소설가이고요.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공황을 일으키기 때문에 <분노의 포도>는 그저 1930년대를 상징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2008년 경제 공황 역시 비슷한 모습이고, 이런 사태는 다시 벌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분노의 포도> 같은 소설보다 좀 더 자극적이고 전형적이고 말랑말랑한 장르를 건드리고 싶습니다. 비단 <분노의 포도> 같은 묵직한 소설만 아니라 자극적이고 말랑거리는 장르조차 자본주의를 신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로맨스 장르는 여기에 부합하는 장르일 겁니다.
커다란 인기를 끄는 로맨스 장르를 골라볼까요. <치즈인더트랩> 같은 로맨스 만화는 좋은 사례가 되겠군요. 다른 로맨스 창작물들이 그런 것처럼 <치즈인더트랩>은 자본주의를 신나게 이용합니다. 이 만화에는 재벌 남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평범한 여자 주인공과 재벌 남자 주인공은 서로 사랑하고, 그래서 온갖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이 만화에서 재벌이라는 요소는 매우 핵심적인 설정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대부분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숱한 사람들이 꼬이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굵직하고 커다란 비극들이 터지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을 겁니다. 남자 주인공이 재벌이 아니었다면, <치즈인더트랩> 같은 만화는 아예 출발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치즈인더트랩>은 자본주의와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치즈인더트랩>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잘 나가는 기업을 물려받고, 덕분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남자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의 아들이었다면? <치즈인더트랩>은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했겠죠.
그래서 <치즈인더트랩>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거나 비판할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만화를 끝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사귀기 시작하는 부분까지 읽었습니다. 하지만 만화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치즈인더트랩>은 자본주의를 별로 비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예 만화가가 자본주의가 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실업, 취직, 대기업, 재벌, 돈, 불우한 가정 환경, 밑바닥 계급, 기타 등등. <치즈인더트랩>은 신나게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이용하나, 그것들은 그저 연애를 뒷받침하는 요소들에 불과합니다.
만화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분석할 마음이 없고, 아예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업이 망해도, 재벌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러도, 불우한 가정 환경이 아이들을 억압해도, 사람이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져도, 그건 모두 연애를 위한 밑바탕일 뿐입니다. 만화가는 자본주의를 해부하지 않고, 그저 그것을 연애 이야기에 덧붙일 뿐입니다. <치즈인더트랩>에서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고통들, 불행들, 비극들은 그저 연애 이야기를 빛내는 장식일 뿐입니다. 만화가는 주구장창 재벌을 떠드나, 왜 재벌이 존재하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재벌은 그저 특별한 남자 주인공일 뿐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치즈인더트랩>을 언급했으나, 비단 <치즈인더트랩>만 언급할 이유는 없겠죠. 하이틴 로맨스 소설부터 일일 TV 드라마까지, 수많은 로맨스 창작물들은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열심히 떠듭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열심히 떠들 뿐이고, 제대로 분석하지 않죠.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로맨스 창작물들은 그저 자본주의를 이야기로서 소비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 고통이나 불행이나 비극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해도, 로맨스 창작물들은 그런 것들을 피상적으로 바라봅니다.
로맨스 창작물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이 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로맨스 창작물에게 자본주의를 비판할 의무는 없을 겁니다. 저는 그저 어떻게 대중적인 창작물이 자본주의를 소비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SF 소설가나 로맨스 만화가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소설이나 만화의 역할이 아닙니다. 소설이나 만화는 어떻게 일상이 흐르는지 보여줍니다. 소설이나 만화의 몫은 그것이고, 구태여 세상을 해석하고 바꿀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SF 소설이나 로맨스 만화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겠죠.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들처럼 <치즈인더트랩> 같은 로맨스 만화는 자본주의를 분석하지 않아요. 그런 관점에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와 <치즈인더트랩> 같은 로맨스 만화는 서로 비슷합니다. 예전에 저는 사이버펑크 소설과 로맨스 소설이 서로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이야기의 연장선이 되겠군요. 하지만 자본주의를 들여다보는 도구로서 <쿼런틴> 같은 SF 소설과 <치즈인더트랩> 같은 로맨스 만화가 비슷할까요. 자본주의를 들여다보는 도구로서 무엇이 더 나을까요. 저는 <치즈인더트랩>보다 <쿼런틴>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치즈인더트랩>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달달한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덕분에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불행들은 달달한 장면들에 가려집니다. 어쩌면 로맨스 장르는 자본주의라는 해악을 가리는 아주 좋은 수단일지 모르겠어요. 반면, <쿼런틴>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은 자본주의에게 부정적입니다. <쿼런틴>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나,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걸 극단적으로 미래 사회에 투영했어요.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인식하지 않았다면, SF 작가들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쓰지 않고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썼겠죠. (자본주의 유토피아 역시 존재하나,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훨씬 우세일 것 같군요.)
<쿼런틴>이 <치즈인더트랩>보다 무조건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골수 SF 독자들은 인류의 지성과 외계를 이야기하는 <쿼런틴>이 시시껄렁한 연애담 <치즈인더트랩>보다 낫다고 말할지 모르겠어요. 확실히 <쿼런틴>은 <치즈인더트랩>보다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죠. 하지만 이 글에서 저는 그런 것을 논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들여다보는 도구로서 <쿼런틴>이 <치즈인더트랩>보다 낫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쿼런틴> 같은 소설이 부족하다면, <우주 상인> 같은 소설은 자본주의를 훨씬 적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