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최고의 SF 소설 100선이 선정하는 가치 본문
최고의 SF 소설 100선. 당신이 읽어야 할 SF 소설 100선. 가장 뛰어난 SF 소설 100선. 인터넷에는 이런 SF 선정 목록들이 많습니다. 도서 사이트에는 이런 목록이 하나쯤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순위 목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채점 답안이 아닙니다. 누가 소설에게 정확한 점수를 매길 수 있겠어요. 분명히 이 세상에는 보편적인 문학 이론이 존재하나, 보편적인 문학 이론은 소설을 완전하게 정의하지 못합니다. 문학 평론가들에게는 각자 싫어하는 작가들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빅토르 위고가 세계적인 문호라고 해도,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빅토르 위고를 싫어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레 미제라블>이 대단한 소설이라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레 미제라블>이 정말 지루한 엉터리 소설이라고 느낄지 모르죠. 문학 평론가들은 <레 미제라블>을 이용해 보편적인 문학 이론을 전개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레 미제라블>이 몇 점짜리 소설인지 점수를 매기지 못할 겁니다. 이는 문학 이론이나 문학 평론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문학 이론은 소설에게 무슨 경향이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어요.
오늘날에 숱한 대중은 온갖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문화 시장이 커졌기 때문에 대중은 문화 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자본주의 문화 시장은 상품성을 추구하나,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문화 시장은 커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문화 평론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문화 평론가가 존재하지 않아도, 일반 대중이 얼마든지 소설과 영화와 게임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화 평론가는 필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문화 비평 이론은 필요합니다. 이론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그저 자신이 겪은 주관적인 경험에만 의존할 겁니다. 그런 비평은 진짜 비평이 아니라 그저 주관적인 감상문에 불과하겠죠. 그건 그저 감상을 적은 일기나 수필에 불과할 겁니다. 문제는 문화 비평 이론을 공부하지 않는 대중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다면, 대중 역시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과 지식 연구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 연구가 오직 지식인의 몫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대중이 공부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계속 지식인에게 끌려다니겠죠.
하지만 아무리 문학 비평 이론을 공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소설에게 정확한 점수를 매기지 못할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소설이 품은 모든 것을 숫자로서 계산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최고의 SF 소설 100선 같은 선정 목록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화성 연대기>를 10위 안에 올려놓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화성 연대기>를 50위 밖으로 내릴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해변에서>를 30위에 놓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해변에서>를 60위에 놓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타우 제로>가 최고의 SF 소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누군가는 <타우 제로> 같은 소설이 100선에서 빠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저는 모두 옳고,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SF 소설 100선은 문제가 많은 목록입니다. 최고의 SF 소설 100선이 빼먹은 소설들은 꽤나 많습니다. 저는 <라마와의 랑데부>나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최고의 100선에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소설이 장르 창작물들에게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라마와의 랑데부>와 <인스머스의 그림자>는 절대 빠져서는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라마와의 랑데부>와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빠진 소설 목록을 몇 번 봤습니다. <유년기의 끝>이나 <2001 우주 대장정>이 들어있기 때문에 <라마와의 랑데부>가 빠진 것 같더군요. <2001 우주 대장정>보다 <라마와의 랑데부>를 훨씬 감동적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런 선정 목록에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모노리스와 스타 게이트보다 초거대 인공 생태계가 훨씬 근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100선에서 빠져야 합니까? 만약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와 공포 장르는 엄청난 유산을 잃어버릴 겁니다.
하지만 어떤 SF 100선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빼먹었습니다. 우주적 공포가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에? 아, 그래요? 하지만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판타지라면, 왜 <크리스탈 세계>가 SF 100선 목록에 들어가야 할까요? 사실 <크리스탈 세계> 역시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만약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빠져야 한다면, <크리스탈 세계> 역시 빠져야 할 겁니다. 하지만 어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은근히 무시하고 제임스 발라드를 띄워주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이런 선정 목록이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목록은 SF 독자들이 무슨 소설을 읽는지 대략적으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SF 세상에 막 들어온 입문자에게 이런 선정 목록은 꽤나 유용할지 모릅니다. SF 입문 독자가 무슨 소설을 읽어야 할지 주저할 때, 100선 목록은 중요한 소설들을 알려줄 수 있죠. 게다가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하위 장르들을 선정할 수 있습니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최고의 대체 역사 100선이나 최고의 시간 여행 100선을 선정할 수 있겠죠. 만약 SF 입문 독자가 특정한 하위 장르를 좀 더 파고들고 싶다면, 이런 선정 목록은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만약 제가 독서 경험을 풍성하게 키울 수 있다면, 저는 생태 철학을 이야기하는 SF 소설 100선을 꼽아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