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에서 지식인 계층이 차지하는 위상 본문
SF 소설에서 과학자는 아주 상징적인 등장인물입니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썼을 때부터 과학자 빅트로 프랑켄슈타인은 소설 제목을 장식했습니다. 19세기 SF 소설들은 모로 박사나 지킬 박사나 챌린저 교수나 아로낙스 박사 같은 과학자들을 이야기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온갖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 속에서 과학자들은 다양하게 활약하는 중입니다. 이는 SF 창작물들이 오직 과학자에게 치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창작물들은 과학자 이외에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SF 창작물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과학자는 여전히 가장 근본적인 등장인물입니다. 대부분 SF 소설들은 어떻게 과학 기술이 인류 문명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그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과학자가 중요하게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우주 비행사나 전문 기술자나 비전투적인 공병이나 뛰어난 발명가는 과학자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주 비행사, 전문 기술자, 공병, 발명가가 과학을 연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그들이 과학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SF 독자들에게는 각자 좋아하는 가상의 과학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 독자들이 개성적인 마법사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SF 독자들은 특정한 과학자들을 선망할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빼앗긴 자들>에 등장하는 타크베르가 마음에 들더군요.) 해리 셀던처럼 종종 자연 과학자가 아닌 학자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자들 역시 상위 지식인 계층이고, 그런 관점에서 해리 셀던은 과학자들과 비슷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자는 우주 비행사, 뛰어난 발명가, 경이로운 학자, 비전투적인 공병, 전문 기술자와 함께 고급 인력, 지식인 계층에 속합니다. SF 소설에서 이런 지식인 계층은 첨단 기술을 연구하거나 비판합니다.
덕분에 그들은 핵심적인 등장인물이 되고, SF 독자들은 이런 지식인 계층을 선망할지 모릅니다. 사실 많은 독자들은 해리 셀던 같은 지식인을 선망합니다. 어떤 독자는 우주 비행사를 좋아하거나, 어떤 독자는 전문 기술자를 좋아하거나, 어떤 독자는 비전투적인 공병을 좋아할지 모르죠. 심지어 어떤 독자는 물리학 교사가 매력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소설 <휴먼 디비전>에서 숱한 난관들을 해결하는 주연 등장인물은 원래 물리학 교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등장인물은 분명히 지식인이고, 고급 인력에 속합니다. 아무도 이런 등장인물이 하층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이렇게 온갖 SF 소설들에서 과학자를 비롯해 지식인 계층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SF 소설 속에서 그런 것처럼 현실 속에서도 지식인 계층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쉽게 권력에 다가설 수 있고, 막강한 권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 계층은 제한적입니다. 만약 모든 사회 구성원이 지식인 계층이라면, 아무도 단순 노동을 맡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에는 단순 노동들이 필요합니다. 노동이나 생산 활동이 지겹고 단순하더라도, 누군가는 그걸 맡아야 합니다. 육아는 지겹고 힘든 노동이나, 누군가는 아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누군가는 농장에서 낫질해야 하고, 누군가는 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워야 하고, 누군가는 트럭에 택배 상자를 실어야 하고, 누군가는 부엌에서 생선을 썰어야 하고, 누군가는 공사장에서 삽질해야 하고, 누군가는 숲 속에서 산불을 감시해야 합니다. 이런 노동들은 분명히 세련된 활동이 아닙니다. 지식인 계층이 연구하는 모습은 고귀하고 세련되게 보이나, 농사, 청소, 요리, 택배, 삽질, 산불 감시는 미천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런 활동들이 미천하다고 생각합니다. 환경 미화원이 세련되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겠어요. 아마 다들 환경 미화원을 기피하고 싶어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농민, 요리사, 청소부, 택배 기사, 산불 감시원은 중요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유치원 선생님 역시 중요합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다수이나, 지식인 계층은 소수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소수 지식인 계층이 권력을 독점할 우려가 존재합니다.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을 반복하는 다수 민중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소수 지식인 계층은 권력을 얻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은 얼마든지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할지 모릅니다. 다수 민중이 여기에 반발한다면, 지식인 계층과 다수 민중은 크게 충돌할지 모릅니다. 문화 대혁명은 그런 결과입니다. 그래서 숱한 지식인들은 그렇게 문화 대혁명을 비난하죠. 그들이 권력을 내놓기 싫어하기 때문에.
이는 문화 대혁명을 비판하는 모든 지식인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많은 지식인들은 진짜 거시적인 폭력을 빨아주고, 문화 대혁명처럼 부차적인 폭력을 비난합니다. 그런 지식인들 때문에 우리는 문화 대혁명이 폭력적이라고 호들갑을 떱니다. 물론 문화 대혁명은 끔찍한 비극이죠. 하지만 훨씬 더 거대한 착취가 존재합니다. 수 천 년 동안 지식인 계층은 다수 민중을 착취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이고 거대한 착취에 분노하지 않고, 대신 작고 후천적인 폭력에 게거품을 뭅니다. 지식인들이 권력에 빌붙고,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따라서 다수 민중은 스스로 지식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노동 시간 단축일 겁니다. 노동 시간이 짧아진다면, 민중은 스스로 공부하고 지식인이 될 수 있겠죠. (당연히 노동 시간이 짧아지더라도 임금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몇몇 SF 소설은 아예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식인이 되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만약 완전한 자동화 기계가 나타난다면, 만약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나타난다면, 그런 사회는 꿈이 아니겠죠. 저는 그런 사회가 오기 원하나, 언제 그런 사회가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민중이 지식인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과학자를 상징적으로 내세움에도, SF 소설들은 별로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SF 소설은 과학자 같은 지식인 계층과 다수 민중을 뚜렷하게 양분하죠. 지식인 계층은 단순 생산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는 귀족에 가깝죠. 고급 지식 인력임에도, <빼앗긴 자들>에 등장하는 타크베르는 어느 정도 단순 생산 활동에 참가합니다. 이런 지식인 계층이 등장하는 SF 소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SF 소설이 드러내는 한계들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