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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도시>가 좌파적인 소설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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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도시>가 좌파적인 소설인가

OneTiger 2018. 5. 29. 19:27

소설 <이중 도시>는 탐정 소설입니다. 꽤나 독특한 탐정 소설이죠. 제목처럼 소설 속에는 두 도시 베셀과 울코마가 등장합니다. 문제는 두 도시 시민들이 서로 무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 도시 시민들은 서로를 안 보고 안 듣느라 애씁니다. 만약 베셀 시민이 울코마 건물을 쳐다보거나 울코마 시민을 만난다면, 당장 침범국 요원들은 베셀 시민을 잡아갈 겁니다. 울코마 시민이 베셀 건물을 만지거나 베셀 시민과 대화한다면, 침범국은 그걸 범죄라고 규정할 겁니다. 이는 꽤나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규칙이죠.


하지만 어떤 사건이 두 도시에 걸친다면? 저쪽 도시에서 이쪽 시민이 죽는다면? 어떻게 담당 형사가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할까요. 담당 형사는 저쪽 도시 사람이고, 사건을 원활하게 수사하기 위해 이쪽 도시로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저쪽 형사는 이쪽 도시로 쉽게 넘어가지 못해요. <이중 도시>는 이런 설정을 전개합니다. 어쩌면 추리나 수사보다 이중 도시라는 설정이 훨씬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탐정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 역시 이중 도시라는 독특한 설정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이런 설정은 꽤나 급진적인 사회적 주제가 될 수 있어요.



어떤 독자들은 이중 도시와 애국자들, 통합주의자들이 분단 국가나 맹목적인 애국심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이중 도시는 한반도와 비슷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악마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욕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못된 침략자이고 학살자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동남 아시아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수탈했어요. 남한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고 보상하지 않죠. 심지어 남한 대통령조차 그런 학살을 자랑스럽게 떠듭니다. 남한 사람들은 미국을 편들고,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짓밟아도, 미국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남한은 한국 전쟁이 엄청난 비극이라고 호들갑을 떠나,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저지른 훨씬 거대한 학살들과 환경 오염을 가뿐하게 무시하죠.


분명히 한국 전쟁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모든 전쟁은 비극이고,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한국 전쟁보다 훨씬 커다란 비극들을 초래했습니다. 왜 우리가 오직 한국 전쟁에만 호들갑을 떨어야 합니까. 북한은 분명히 억압적인 국가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들은 훨씬 폭력적입니다. 남한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한은 북한을 비난하나, 거기에는 딱히 근거가 없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저 관습적인 주장을 반복할 뿐입니다. 마치 아무 이유 없이 서로 무시하는 이중 도시 시민들처럼. 그래서 많은 독자들은 <이중 도시>가 심각한 사회적 화제를 건드린다고 해석해요. 분단, 혐오, 차별이 심한 국제 사회에서 <이중 도시>는 경고나 비유가 될 수 있겠죠.



어떤 독자들은 차이나 미에빌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는 차이나 미에빌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에 <이중 도시> 같은 급진적인 소설을 썼다는 뜻입니다. 흠, 그게 정말일까요. 저는 <이중 도시>가 급진적인 소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중 도시>가 마르크스주의적인 소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철학을 담을 수 있고, 그걸 일상 생활에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철학이 개념을 제시한다면, 소설은 사례를 알려줍니다. 소설은 어떻게 철학이 제시한 개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철학자들이나 작가들은 소설과 철학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양한 사상가들이 소설을 쓴 것처럼 소설은 철학을 반영하고 풀어낼 수 있습니다. 철학을 풀어내기 위해 소설은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무조건 특정한 사상을 소설 속에 집어넣어야 할까요. 마르크스주의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에 무조건 마르크스주의를 집어넣어야 할까요. 차이나 미에빌은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이는 미에빌이 무조건 좌파적인 소설을 쓴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은 철학책이 아닙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뭘까요. 왜 작가가 소설을 쓸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일 겁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기 위해 작가는 소설을 씁니다. 영화나 비디오 게임, 동영상 사이트가 발달했음에도 여전히 소설은 가장 효과적으로 일상 생활을 담을 수 있는 매체입니다. 환상 소설은 거기에 기이한 세계관을 추가합니다. 환상 소설은 (현실과) 다른 세계를 그리고, 환상 소설가는 기이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울고 웃고 사랑하는지 씁니다. 아무리 시각 효과가 발달해도, 영화나 비디오 게임은 이런 감성들을 깊게 파고들지 못합니다. 사랑을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는 없습니다. 카메라는 그저 사랑하는 연인을 촬영할 뿐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그겁니다. <이중 도시>는 꽤나 독특한 설정을 자랑하고,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독특하게 살아갑니다. 일부러 이웃 도시를 외면하는 시민. 일부러 안 보고 안 듣는 이웃 시민들. 웃기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런 장면들일 겁니다. 저는 왜 차이나 미에빌이 <이중 도시>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에빌이 정말 외국인 혐오나 맹목적인 애국심을 비판하기 원했을까요? 저는 그런 해석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적인 현실에서 그런 해석 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건 핵심이 아닐 겁니다. 환상 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환상적인 세계관이겠죠.



차이나 미에빌은 <이중 도시>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당부했습니다. 소설은 넘치거나 모자라거나 에두르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은 논설이 아닙니다. 논설과 달리, 소설에게 딱 부러지는 해석은 없습니다. <가린의 살인 광선>처럼 프로파간다 소설은 그럴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소설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 어떤 독자가 <이중 도시>를 이용해 우파적인 애국심을 비판한다면, 그런 비판에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이중 도시>가 그 자체로서 좌파적인 소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나 문제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이고,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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